BLUE.도착하자마자, 시연은 깨달았다.유건이 여배우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다.이곳은 술자리였다. 비즈니스 회식이나 연회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더 많은 거래를 논의하곤 했다.각양각색의 남자들과 각양각색의 여자들.하지만 차이가 있든 없든, 공통점 하나는 여자들이 다들 분위기를 잘 맞추고, 술도 잘 마신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시연은 그 분위기에서 확연히 안 맞았다.‘난 애초에 술을 못 마시는데...’지금은 몸 상태가 안 되지만, 임신 전에도 한 잔이면 끝이었다.유건과 함께 자리에 앉자, 시연은 단숨에 모든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첫째, 그녀는 유건이 데리고 온 여자였고,둘째, 이곳에 온 여자들은 모두 화려하게 화장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만큼은 아무런 치장 없이, 베이지색 롱 원피스를 입고, 심지어 어깨에는 백팩까지 메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학생 같았다. 남자들은 슬쩍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고 대표님, 저런 스타일이 취향인가?’ ‘하지만 확실히 청순하고 예쁘긴 하네.’‘...’“꼬마 아가씨.”누군가 시연에게 술을 따라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긴장하지 마, 다들 즐기러 온 거잖아? 한잔해.”가득 채워진 술잔을 보며, 시연은 고민에 빠졌다.‘마셔야 하나?’유건이 여배우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걸 보면, 시연을 곤란하게 만들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술은 피할 수 없는 건가?’시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고유건은 나쁜 놈이긴 해도, 내 배 속의 아이를 배려해 줬어.’‘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 이제 나를 증오하는 건가?’‘아무래도... 나를 장소미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시연은 유건이 고상훈을 미워할 수 없으니, 그 모든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마시고 바로 화장실 가서 토하면 되니까.’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손을 뻗어 술
“별거 아니에요.”“별거 아니라고?”유건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연의 핸드폰을 낚아챘다.“왜요? 돌려줘요!”시연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남자는 키도 컸기에, 팔만 살짝만 들어도 그녀는 전혀 닿을 수가 없었다.유건은 한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시간이 짧아 아직 자동 잠금이 걸리지 않아서 그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검색 화면에는 ‘이연우’에 대한 정보가 떠 있었다.남자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불꽃이 튀었다.‘질투 안 난다고?’‘안 난다면서 몰래 이연우를 검색했다고?’‘이 여자, 겉과 속이 다르네. 입만 살아서!’유건은 피식 웃으며 시연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질투 나면 질투 난다고 솔직하게 인정해. 별거 아니잖아.”시연은 그가 완전히 오해했다는 걸 알고, 어이없었다.‘그냥 궁금해서 찾아본 건데...’‘이연우가 무슨 제2의 장소미라도 되나? 질투할 상대라도 되면 몰라.’그녀가 해명하지 않자, 마치 동의라도 한 듯 보여 유건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그는 시연을 다시 자리로 끌어앉히고, 그녀의 접시를 힐끗 내려다보았는데, 자신이 자리를 비우기 전과 똑같았다.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맛없어?”“네, 맛없어요.”BLUE는 원래 음식이 목적이 아니라, 술자리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음식이 맛없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먹지 마.”유건은 여자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고, 냅킨을 들어 그녀의 입가를 가볍게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시연의 백팩을 집어 들었다.“어디 가요?”“맛없다며. 그럼 제대로 된 곳에서 먹어야지.”...장소를 옮긴 곳은 ‘영복루’이었다.커다란 중식 원형 테이블 위로, 시연의 앞에 다양한 요리가 쌓였다. 심지어 작은 전골냄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전골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유건은 그녀를 위해 직접 재료를 넣어 익히고 있었다.그리고 적당히 익은 음식을 건져내고, 소스까지 곁들여 시연의 그릇에 올려주었다.“맛있어?”“네
결국 시연은 타협했고, 결혼식 당일 우주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우주의 예복을 보내주려던 차에, 유건이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가려고요?”“그렇게 놀랄 일인가?” 유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처남을 만나지도 못했네. 결혼 전엔 꼭 만나봐야지.”이유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니, 시연은 거부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우주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누나를 보자마자 우주는 기뻐하며 손을 꼭 잡고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생각보다 똑똑해 보이네.’‘역시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아이야.’“누나?”우주는 유건을 발견하고 누나에게 눈으로 물었다.시연이 소개하기도 전에 유건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안녕, 난 고유건이야. 네 누나의 남편, 즉 네 매형이 될 사람이야. 곧 결혼할 거야.”“매형?”우주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누나를 바라봤다.“우주야.”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했다.“매형이라는 건, 앞으로 누나랑 함께 살면서...”“그리고 누나와 함께 널 아껴줄 사람이기도 하지.” 유건이 말을 덧붙였다.“아...”우주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지만, 유건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폈다.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으로 유건을 가리키며 외쳤다.“아!!”“왜 그래?” 시연이 이마를 찌푸렸다.“마술사 형!”우주는 갑자기 신이 나서 소리치며 환하게 웃었다.‘이 아이... 설마 아직도 내가 도와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나?’유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기억하고 있구나. 대단한데?”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마술사 형이라니? 전에 만난 적 있어요? 왜 난 몰랐죠?”그 일이라는 것은 전에 유건이 우주를 찾아 헤맸던 것이었다. ‘우리 처남은 역시 똑똑해! 기억력도 보통이 아니야!’유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만의 비밀이야. 미안하지만, 말
“네?”이호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이 말씀 안 하시던가요? 아마 사모님께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준비하려는 걸 거예요.”그러고 나서 설명을 덧붙였다.“도련님께선 사모님의 동생분이 ‘웰스’로 가시면, 분명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미리 간병인을 구했다고 하셨습니다. 남은 시간은 두 사람이 서로한테 적응하는 기간이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경험이 아주 풍부한 간병인입니다. 나이도 마흔 넘었으니, 꽤 잘 어울리실 거예요.”시연은 그 말을 듣고 물었다.“그럼, 그 간병인도 우주와 함께 웰스로 간다고요?”“네.”이호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동생분의 상황이 특이한지라 ‘웰스’ 쪽에서도 간병인을 동반하는 걸 허용했고요”시연은 그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것도 힘들 정도인데, 전문 간병인을 고용할 돈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도련님께서 그 간병인에게 GP그룹 정직원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셨으니, 동생분에게 정말 충실할 거예요.”‘아, 그렇게 되면 그 간병인은 평생 우주에게 의지하게 될 테니까...’“알겠어요, 이제 이해했어요.”시연은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고씨 가문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것이 너무 많아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내 결혼은... 내가 지금까지 받은 것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오늘 밤, 유건은 그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시연은 샤워를 마친 후, 서재에 가서 책을 읽으려 했다.하지만, 책을 펼치기 전에 먼저 장부를 꺼냈다.그리고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았다.그 장부에는 그녀가 유건에게 빚진 돈뿐만 아니라, 고상훈이 부담한 ‘웰스’ 비용까지 기록되어 있었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고씨 가문과의 일을 이 장부에 계속 기록해 둬야 할까?’‘기록만 하고 갚지 않으면, 너무 억지스럽지 않을까?’잠시 망설이다가, 시연은 결국 펜을 들어 또 하나의 항목을 적었다.[XX년 X월
진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 시간에 온 택배면 결혼 선물 아니야?”“그럴 수도 있지.”“빨리 뜯어봐. 뭐야? 혹시 난 빠져줘야 해?”시연은 진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그러면서 택배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작은 주얼리 상자가 들어 있었다.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 같았다.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대로 팔찌였다.“오?”진아의 눈이 반짝였다. “예쁘네.”무엇보다도, 이 팔찌는 딱 봐도 시연의 취향과 잘 맞았다.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일상에서도 착용하기 좋은 디자인이었다.함께 들어 있던 카드에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너에게 한 사람이 나타나, 기쁨의 성을 선물하고, 따뜻한 노래로 삶을 채워주기를.]필체에서는 단정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노은범의 친필이었다.진아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고, 시연 역시 그랬다.은범이 이 글을 적으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수 없었다.이 팔찌는, 시연이 웨딩드레스를 보러 갔던 날, 매장에서 착용해 봤지만 사지 않았던 바로 그 팔찌였다.은범은 그때도 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그런데 결국, 그는 몰래 사서 결혼식 전날 시연에게 보냈다.시연은 눈을 깜빡였다. 가슴 한쪽이 서서히 저렸다.은범을 생각하니, 두 사람이 놓쳐버린 과거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화해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아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끝나는 게 가장 좋아.”...저녁 무렵, 제남도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밤이 깊어질수록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조금 늦은 시간, 유건이 도착했다.시연은 남자의 재킷을 받아서 들었다. 유건은 차를 타고 왔지만, 옷에는 빗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샤워해요. 다 준비해 놓았어요.”“알겠어.”유건은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반지랑 액세서리는 이미 시내에 도착했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내일 아침에 가져오겠대. 웨딩드레스랑 같이 확인하면서 전체적인 느낌 보면 될 거야.”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결혼식 전에 같이 자면 안 된대요... 그게 고씨 가문의 규칙이라고 하셨다고요!” 옛 어른들의 규칙에 따르면, 결혼식 전에는 신랑 신부가 아예 얼굴도 보지 않는 게 좋다고들 했다. 고상훈도 손자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유건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규칙이야? 그냥 할아버지가 대놓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잖아?’ “하하.” 시연은 유건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불만 있으면 직접 가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요. 나는 못 해요.” “너는 못 한다고?” 유건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할아버지는 너를 더 아끼시잖아. 나보다 네가 진짜 손주 같지! 네가 못 하면 난 더더욱 할 말이 없어. 두고 봐, 내가 널 그냥 둘 것 같아?” “하하하...” 예민한 부위를 간질이니 시연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유건이 단단히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시연은 바닥에 나뒹굴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럴게요! 안 그럴게요!” 연신 손을 흔들며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만 봐준다.” 유건은 대장처럼 거들먹거리며 여자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갔다. 옷을 다 갈아입을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유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소미 씨.” [유건 씨...] 장소미는 울먹이고 있었다. [모레가... 유건 씨의 결혼식이라고...]이 말을 듣자, 유건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했다. [유건 씨...] 소미는 흐느껴 울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나... 너무 힘들어요... 너무 속상해요... 나... 나 정말 유건 씨를 보고 싶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유건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지
순간, 시연은 얼어붙었다.‘장소미가 왔다고?’지동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소미는 분명 고유건을 찾으러 갔을 거야. 너 지금 고유건과 같이 있지? 잘 지켜봐. 네 남편이 네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동성이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흘려줄 줄은 예상치 못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분명, 유건이 방금 나간 이유는 소미를 만나러 가기 위함일 터.시연이 이해할 수 없던 건, 지동성이 왜 자신에게 이런 전화를 했냐는 점이었다.‘장소미는 나보다 더 소중한 딸인 거 아니었나? 심지어 죽을병에 걸려서도 장소미한테는 간 이식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지...’시연은 바로 물었다. “왜 인제 와서 그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시연아...]지동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예전에는... 아빠가 많이 잘못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고유건... 그 사람, 네가 기대기엔 부족해.]하지만 시연은 지동성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호흡도 거칠어졌다.바로 분노 때문이었다.시연이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지동성이 하는 이 따위 ‘사과’였다.지동성은 과거 십여 년간 시연과 우주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걸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시연과 우주가 잃어버린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왜냐하면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지금 나가면, 어쩌면 유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솔직히, 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한 번이라도 배신한 남자는 평생 용서받을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건은 시연이 선택한 남자가 아니었다.그는 고상훈이 시연에게 맡긴 사람이었다.결국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두드린 뒤, 얇은 카디건을
제남도는 관광지인 만큼, 호텔과 숙박시설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유건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한 경비에게 건넸다.“차 좀 가져다주세요.”“네, 고 대표님.”경비는 공손히 키를 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려 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고, 입술을 살짝 떨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사모님.”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본처가 현장을 덮치는 거야? 하필 내가 이걸 봐야 한다고?!'“안녕하세요.”시연은 우산을 받쳐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어서 시선이 유건에게 향했다.그 순간, 유건의 등골이 서늘해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지어 혀가 굳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시연의 눈길이 남자의 품 안에서 의식이 흐릿한 소미를 스쳤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차를 가져가려고요? 어디 가려고 해요?”유건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미 시연이 나타난 이상, 소미를 데리고 나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소미를 여기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시연아.”유건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취했고, 온몸이 다 젖었어. 이렇게 놔두면 감기에 걸릴 거야. 우선 방을 하나 잡아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게 해야 해.”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럼 차는 뭐예요? 이 호텔로 들여보내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래.”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허락해 준다면...”‘허락해 준다면?’시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허락 안 하면 상황이 달라지나?’ “유건 씨...”소미가 남자의 품에서 몸을 움찔거리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너무 힘들어요... 너무 추워요...”그리고 계속해서 유건의 허리를 감싸며 매달렸다. 마치 풀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유건은 소미를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씻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부탁했다.“그냥 씻고 옷만 갈아입히는 거야. 네가 지켜보고 있으니, 아무 일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