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문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은범은 단지 묘지만 알아본 것뿐만 아니라, 풍수사에게도 의뢰하여 이장하기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았다. 당일, 날씨는 맑고,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성빈과 진아는 시연과 함께 묘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은범이 이미 와 있었다. 시연은 놀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은범의 시선을 피했다. 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진성빈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성빈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전혀 모르는 척했다. “시연아.”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은범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명주 이모를 보내 드리는 데 오지 않으면 양심에 걸릴 것 같아서 왔어.” 진아는 바로 반박했다. “너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었어?” “진아야.” 시연이 진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불만을 억누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시연은 은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어머니의 안식을 위한 날이었기에, 시연도 어머니의 묘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은범은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천만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는 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부명주의 안장식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시연은 어머니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진아는 시연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뒤에서 성빈이 은범에게 속삭였다. “왜 시연이에게 다 말하지 않아?” 은범이 묘지 문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시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은범은 시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내가 하는 일은 시연이를 감동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인생은 길어. 내가 시연에게 잘해주는 모든 걸 굳이 다 알릴 필요는 없잖아.” 성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지나치게 헌신적이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참, 시연이가 나에게 송금한 돈, 네가 처리한 거니까
“뭐라고?” “네가 직접 손으로 만든 거라고?” 유건은 깜짝 놀라 다시 셔츠를 보았다. 갑자기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왔다. “네가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거야?” “네.” 시연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약간 부끄러워했다. 부명주는 생전에 패션 디자이너였고, 집에는 작업실도 갖고 있었다. 시연은 걷기도 전부터 바늘을 잡았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옷을 만드는 시연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셔츠 하나쯤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유건은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연의 뜻밖의 실력에 깜짝 놀라고 감탄했다. ‘진짜로 지시연이 직접 만든 거야! 한 땀 한 땀, 모든 바느질 자국이!’ 시연은 유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그녀는 유건이 준 카드에서 또 돈을 인출해서 썼기 때문에 화낸 거라는 말은 못 하고 그냥 핑계를 댔다. 시연의 이 말은 유건에게 물러날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상대방이 한 걸음 물러서면 자신도 상대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남자다.“됐어.” 유건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범한 척 말했다. “나는 상남자라 여자한테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아” “그럼...” 시연은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셔츠, 입을 거예요?” “그냥 둬.” 유건은 자존심을 부리며 셔츠를 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옷장에 널리고 널린 게 셔츠야.” “아...” 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그렇지, 고유건이 내가 만든 셔츠를 입을 리 없겠지. 아마도 옷장 깊숙이 넣어두겠지... 하지만 더 비싼 옷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일정이 좀 빠듯해서요.” 시연이 나가자 바로 주지한이 들어왔다. “형님, 이건 방금 받은 프로젝트 서류인데요...” “어, 웬 셔츠가 있네요?” 지한은 셔츠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낮게 깔린 경고가
그림 미술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소미는 유건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건은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머릿속에는 자꾸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시연은 내 데이트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유건 씨.”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소미가 손을 살짝 움직이자, 유건은 정신을 차렸다. 소미는 약간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니면 상처가 불편한 거예요?” “아니야, 일도 아니고 상처도 괜찮아.” 유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지금 대체 뭘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지시연이 나한테 신경 쓰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그 여자는 단지 명목상 아내일 뿐, 진짜는 아니니까.’ ‘게다가, 이 명분도 오래가지 않을 거야. 지금 내 옆에 있는 장소미가 진짜로 나와 함께할 사람인데...’ “그냥 그림에 몰입한 것뿐이야.”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고, 다정하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있어? 마음에 들면 사 줄게.” “음...” 소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을 긁적였다. “조금 더 둘러볼게요. 아직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안 보이네요.” 사실, 그녀는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그림을 사서 뭘 하겠어?’소미에게는 그림보다 보석이나 명품 가방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유건은 어두운 눈빛으로 잠시 소미를 응시했다. “그래, 조금 더 보자.” 유건은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소미가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금세 알아챘다. 왜냐하면 둘이 전시회장에 들어온 이후 소미의 시선은 그림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유건은 소미의 취향이 그림이 아니라는 것에 크게 상관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유건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소미의 의도였다. 기분이 이미
“저에게 밥을 사주신다고요?” 시연은 의아했지만, 유건의 의도를 굳이 묻지는 않았고, 대신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고유건 씨는 공식적으로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잖아요. 여자 친구랑 몰래 데이트하는 건 못 본 척할 수 있었지만, 저는 당신의 주치의예요. 환자랑 장난칠 순 없어요.” “말이 참 많네.” 유건은 날카로운 턱선을 더욱 단단히 조이며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밥 먹을 건지, 말 건지만 말해.” “먹어... 야겠죠?” 무표정한 유건의 얼굴을 보고 시연은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가 왜 밥을 사주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유건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병실에서 보자.” ... 유건의 VIP 병실은 호텔의 로얄 스위트룸과 다를 바 없었다. 거실, 다이닝 룸, 심지어 주방까지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주방은 사용하지 않고, 그는 직접 외식 서비스를 주문했다. 시연이 도착하자, 음식 배달차 온 셰프가 직접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두 분, 맛있게 드세요.” 시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유건은 그녀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만해, 이런 거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지 마.” “전 정말 이런 세상을 처음 보거든요.” 시연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맞받아쳤다. “밥 먹게 해줄 거예요, 말 거예요? 더 뭐라 하시면 저 정말 그냥 갈 거예요.”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앉아서 먹자.” 유건은 콧소리를 내며 킬킬 웃었지만, 시연에게 앉으라며 의자를 직접 빼주었다. “이쪽 자리로 모셔도 될까요?” “네, 좋아요!” 시연은 의자에 앉으며 음식들을 살펴보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맛있어 보이네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았고, 시연은 천천히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근데, 왜 이러는 거예요? 이유라도 알아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죠.” 유건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일어나 벽 쪽으로 걸어갔다. 시연은
“어?” 소미는 차려진 식탁을 보며 두 개의 식기 세트가 마주 보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혹시 지금 유건 씨의 병실에 누구 와 있어요?” 유건은 소미가 올 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소미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유건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마음 깊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늘 아무에게나 당당했던 자신이 소미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아 말투도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지한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네.” “아...” 소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혹시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그래, 그럴 리가 없지. 주지한 때문이구나.’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혼자 먹으면 재미없잖아요. 제가 같이 먹을게요.” 유건이 가만히 서 있자 소미는 다정하게 말했다. “빨리 앉아요.” “그래.” 유건은 대답했지만,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앉자, 소미는 벽 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을 보았다. ‘저건 오늘 고유건이 미술 전시회에서 산 그림이 아닌가?’ ‘고유건은 이 그림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거라고 했었는데, 여기에 놓아두다니. 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했던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소미도 더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근데, 정말 뭔가 수상하네...’ ... 화장실 안에서 시연은 지루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실습생 단톡방에서는 야근을 앞둔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녁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현진: 저녁 뭐 먹지?] [주하은: 구내식당 어때? 내가 사 올게, 몇 개나 가져올까?] [인턴A: 야근인데 구내식당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거 먹어야지.][인턴B: 그러면 새콤한 생선찜이나 먹을까? 그리고 꼬치구이도 추가!] [인턴C: 좋아, 어디가 맛있어?]시연은 몰래 대화를 엿보다가 한마디 남겼다. [지시연: 문창길에 있는 집 맛있더라.] 시연이 임진아와 함
시연은 손목을 살짝 비틀며 유건에게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가도 돼요?” “어디로?” 유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이제 시연도 화가 나기 시작해서, 입을 꾹 다문 채 말했다. “고유건 씨, 대체 저한테 왜 화내는 건데요? 밥 먹자고 해놓고 날 화장실에 두 시간이나 가둬놨잖아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연의 말이 너무 당연해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건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유건 스스로도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왜 시연을 화장실에 밀어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후로 후회와 자책,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현재의 감정 상태를 만든 것이었다. “하...” 시연은 한숨을 쉬며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에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저도 유건 씨의 입장를 이해해요. 당연히 여자 친구가 더 중요하죠.” ‘지시연의 말은 맞지만, 따지고 보면, 지시연이 내 아내인데!’ 얽히고설킨 이 상황 속에서 유건은 여전히 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너 아직 밥도 안 먹었잖아.” “맞네요.” 시연은 눈을 살짝 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손 좀 놔줄래요?” 그녀는 유건을 가리키며 그가 여자 친구와 함께 먹던 식탁을 가리켰다. “설마 제가 고유건 씨와 여자 친구가 남긴 음식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저도 사람이에요, 키우는 개가 아니라고요.” 말하며 시연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고 대표님, 대표님 집에서 키우는 개도 이런 음식 안 먹을걸요?” ‘웃긴가?’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농담은 여기까지예요.” 시연은 손목을 돌리며 부탁하듯 말했다. “저 정말 배고파요, 제발 밥 먹게 해줘요.” 유건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새로 한 상 더 차리게 할게.” “
기나긴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시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 모습을 본 유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멍청한 자신에게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왜 화만 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지시연...” 유건은 후회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유건 씨의 말이 맞아요. 제 배 속에 있는 애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예요. 저 같은 사람은 고유건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는 저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시연!” 유건은 손을 뻗어 시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시연이 이미 빠르게 뛰어나가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순간 유건이 주먹을 꽉 쥐고, 엘리베이터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분노와 불편함이 그를 짓눌러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 시연이 회진하러 왔을 때, 주지한은 유건이 퇴원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연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유건의 상태로는 며칠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말했다. 특히 봉합한 복부의 실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만, 그때까지 쉬기에 유건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입원 중에도 일 처리를 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시연은 그의 퇴원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한이 퇴원 수속을 밟으러 나갔다. “퇴원 후에도 당분간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시연과 유건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한 사람은 의사로서 사무적으로 말만 하고, 한 사람은 환자로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대화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시연이 주의 사항을 전달하던 도중, 지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지한의 표정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큰일 났어요! 고 어르신께서 형님이 다
고상훈은 이미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고, 그의 주름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연은 고상훈이 어떤 심정인지 금방 눈치챘다. “할아버지, 유건 씨는 괜찮아요. 유건 씨의 부상은 제가 다 확인했고, 제가 계속 돌보고 있어요. 저를 믿으셔야죠.” 고상훈은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몇 번 깜박였고,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유건은 시연의 말을 듣고 옆으로 다가와, 고상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보세요,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고상훈은 힘겹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할아버지, 말씀해 보세요” 고상훈은 천천히 시연의 손과 유건의 손을 잡아 함께 포개어 놓았고, 그 뜻은 분명했다. 그는 두 사람이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건은 목이 메며 목구멍에 돌이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잘 지내고 있어요.” 고상훈은 너무나도 기력이 약해져 있었던 터라, 유건의 말을 들은 후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 좀 더 쉬셔야 해요.” ... 병실을 나서며 문을 닫자, 시연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상태는 위험해 보였지만, 사실...” 유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무슨?”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순간, 유건의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유건은 강한 힘으로 두 팔 벌려 시연을 꽉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등을 받치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건의 품은 단단하고 따뜻했으며, 희미한 페퍼민트 향의 향수가 배어 있었다. 시연은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온몸이 굳어버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유건 씨?”“응.” 유건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마치 어른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잠깐만, 잠깐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