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부위 때문에, 소미는 어깨가 드러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왼팔부터 턱 아래까지, 하얀 붕대가 겹겹이 감겨 있었고, 응급 처치 과정에서 급히 잘라낸 머리카락은 자비 없이 뚝뚝 잘려져 있었다. 게다가 계속 울었던 탓에, 얼굴은 눈물과 붉은기, 부은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유건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하며,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주었다. “울지 마. 눈물이 상처에 닿으면 안 좋아.” “유건 씨...” 소미는 눈을 꼭 감더니,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 “어떡해요... 저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무서워하지 마.” 유건은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요즘 의학, 많이 발전했잖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그게 안 되면요...?” 소미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영원히 못 고치면요...? 그런 일, 충분히 있을 수 있잖아요?” 유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여자를 바라볼 뿐. “봐요... 대답 못 하잖아요. 저를 위로하려고 한 말인 거 다 알아요.” 소미는 울음을 꾹 참으려다, 다시 숨을 들이켰다. “아...!!!” 그러고는 그대로 눈이 뒤집히며 쓰러졌다. “소미 씨!” 유건은 당황해서 그녀를 흔들었다. “의사! 간호사!” “들어갑니다!” 의료진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상태가 왜 이래요? 아까까지 괜찮았잖아요!” “고 대표님, 환자분은 광범위 화상으로 인한 쇼크 증세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응급 처치가 필요하니,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병실 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침대 가리개가 닫히고, 유건은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가 뒤돌아선 순간, 시연이 병실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유건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여보...” 시연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유건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피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왜냐하면, 시연은 다 보고 말았으니까.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둘은, 이전처럼 지내는 게 좋겠어요. 더 먼 미래는...” “잠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비웃듯 되물었다. “‘이전처럼’이라는 게, 어떤 거지?” “네?” 시연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말 그대로 명목상 부부, 서로 터치 안 하고, 간섭도 안 하고...” “하.” 유건은 코웃음을 내뱉었다. “먹은 밥을 도로 뱉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무슨 소리야?’ 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동의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요?” “왜냐고?” 유건은 속이 뒤집힐 듯한 감정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던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한테 화난 거야? 당신 쪽으로 먼저 안 갔던 거, 그거 때문에?” 시연이 대답할 틈도 없이, 유건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 입장에선 당연히 화날 수 있어. 나한테 뭐라고 해도 좋아. 근데...” “그래요. 당신 말대로, 내가 화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시연이 무표정하게 남자의 말을 끊었다. 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역시... 시연이는 화가 난 거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맞아, 다 이해해.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당신한테 갔다면, 구출이 더 늦어졌을 거야. 기환이가 당신 옆에 있기도 했고, 지하한테 부탁하기도 했으니까...” “알아요.”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그 반응에 유건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알면서 왜...?” ‘왜 이러는 건데...?’ 시연은 미세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
시연이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당기려던 찰나, 뒤에서 다가온 유건이 팔을 뻗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남자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시연의 머리 위를 감쌌다. “그래, 진료받을게. 대신 같이 가자.” “뭐라고요?” 시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요?” “지시연!” 유건의 미간에 분노가 깊게 드리워지며 얇은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넌 내 아내야.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요, 난 당신 아내예요. 하지만...” 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당신 그 상처... 나 때문에 입은 거 아니잖아요.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때문에 다쳤는데, 그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하죠?” “당신!” “아, 맞다...” 시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웃음을 더했다. “이젠 내가 당신을 돌볼 생각이 없으니까, 돈이 많은 당신은 간병인을 쓰면 되잖아요. 한 명으로 부족하면 두 명을 쓰고...”“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새까만 먹물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게 있어! 장소미는 나 때문에 다쳤어! 그런 사람을 안 돌보면... 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 돌보지 말란 말은 안 했어요.” 시연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오히려 돌보라고 했잖아요. 옆에 있어 주라고요. 진심이에요.” “그럼 왜 이러는데? 왜 이렇게 구는 거야?” “내가 뭘요?” 시연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냥,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잖아요. 나도 내 선택을 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이해돼요?”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웃었다. “네 선택? 명목상 부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요?” 시연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제안, 처음 꺼낸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 유건은
유건은 능력 있고, 잘생기고, 집안까지 완벽하며, 시연에게도 잘했다. 시연이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이성을 놓고,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 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해.’ ‘그리고 이제 나는, 정말 푹 자야 해...’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잘못된 감정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밤새 깊은 잠을 잤다. 시연이 눈을 떴을 때, 팔이 묘하게 무거웠다. 아파서가 아니라, 눌린 느낌.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유건이었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의 손을 꼭 잡은 채, 팔에 머리를 얹고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무겁더라.’ 그녀는 이 남자가 언제 왔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시연은 팔을 힘껏 빼보려 했지만,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 “유건 씨.” 시연은 더 이상 뵈는 게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팔 저려서 미치겠으니까.” “응...?” 유건은 곧바로 눈을 떴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여자의 팔을 풀어줬다. “여보, 일어났네.” ‘그건 나도 알지.’ 시연은 유건의 의미 없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침착하게 침대 옆 호출 벨을 눌렀다. 곧 간호사가 들어왔다. “사모님, 일어나셨네요. 세수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몸이 훨씬 나아졌어요. 퇴원하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럼 주치의한테 여쭤볼게요.” “네, 부탁해요.” 간호사가 나가고, 시연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건이 그 뒤를 따랐다. “벌써 퇴원하게? 하루쯤 더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철컥-남자의 코앞에서 문을 잠갔다. 유건은 멈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잡이를 잡아보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시연의 어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유건의 귀에는, 그 말투가 기묘하게 비꼬는 듯 들렸다. 그는 애초에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복되는 비아냥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내가 팔을 다친 건, 다 너 때문이야!”“네?” 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말요...?”“그래!” 유건은 당황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설명하려 들었다.“그때 나는...”“그만해요.” 시연은 그의 말끝을 잘랐다.“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유건은 움찔했다. 차가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왠지 모를 무력감이 밀려왔다.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그래, 안 할게. 가자.”그렇게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고씨 가문의 본가였다.본가에 도착하니, 집 안에는 왕성애만 있었다. 고상훈이 입원 중이라 이호민은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집안일은 왕성애가 맡고 있었다.거실에 들어서자 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모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객실 하나 정리해 주세요.”“네...?” 왕성애가 잠시 멈칫하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런데 유건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눈치였다. 이 얘기는 금시초문인 듯했다.“객실은 왜?”“내가 써야 하니까요.” 시연은 얕게 웃으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이모님, 제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어서 고유건 씨랑 따로 자는 게 편할 것 같아요. 부탁드릴게요.”“지시연!” 유건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왕성애를 힐끔 보더니, 낮게 말했다. “이모님, 먼저 들어가 계세요.”“아, 예예...” 왕성애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유건은 시연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가, 침실 문을 닫았다.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다.“도대체 너, 뭐 하자는 거야? 어?”“왜 소리를 질러요?
“그래?” 유건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투는 싸늘했다. “그깟 걸로 죽진 않을 거야.”‘이젠 아프다고 유세네.’‘이러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았나?’ 시연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죽어요.”유건은 움찔하며 눈빛이 갈라졌다. “여보!”“왜 그렇게 쳐다봐요?” 시연은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내 앞에서 불쌍한 척은 왜 해요?” 이 말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 죽기라도 하면, 장소미는 슬퍼서 엉엉 울 거예요. 어쩌면... 장소미도 따라 죽을지 모르죠.” 그러고는 조롱 섞인 미소로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네요. 완전 비극 속의 연인 같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저승까지 함께 간다니... 축하해요.” “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레졌고, 눈은 타오르듯 번뜩였다. “진심이야? 너, 진짜 날 미치게 만들고 싶구나?!”“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시연은 더 이상 말 섞을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왕성애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119 좀 불러주세요. 저 상태로 놔두면 열 때문에 곧 의식 잃을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지시연!!” 하지만 계단을 몇 걸음 오르기도 전에... 쿵! 시연의 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이어 왕성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도련님!”시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왕성애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울먹였다.“사모님... 이제 어쩌죠?”“119 부르세요! 지금 당장이요!”“네, 네!”곧 119가 도착했고, 구급대원들이 유건을 들것에 실었다.“가족 분도 함께 타세요.” 구급대원이 말하자, 왕성애가 시연을 슬쩍 바라봤다. “사모님...?”“전 안 갈 거예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모님,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랑 간호사가 잘 돌볼 거예요.”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진짜로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유건은 지한의 말을 들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뭐 하러 왔냐? 할 말 없으면 나가.”딱 봐도 발끈한 상태였다. 지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받아쳤다. “좀만 기다려봐. 사과 아직 덜 깎았거든.”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말했다. “근데 말이야, 진짜 어떻게 할 건데?”“뭘 어떻게 해?” 유건은 째려보듯 눈을 흘겼다. ‘뭔 헛소리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시연 씨가 화내는 거, 솔직히 이해돼. 너는 정말 과거를 다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장소미만 문제였으면 말을 안 해. 근데 지금은 나비 공주 일까지 겹쳤잖아? 그 사람은 네가 몇 년이나 마음에 품어온 첫사랑이야. 그런 감정을, 진짜 시연 씨를 위해 놓겠다고?” 그 말에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과를 다 먹은 지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 만약 못 놓겠으면, 친구로서 한마디만 할게. 시연 씨, 그냥 놔줘.”이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던 지한을 유건이 불러 세웠다. “지하야.”“응?”유건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혼할 생각 없어. 시연이랑 헤어질 마음도 없고.”지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오케이. 알았어.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말만 해.”...밤이 되자, 시연은 임진아와 저녁을 약속했다. 고상훈이 병원에 있기에 집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마침 잘 됐다 싶어 외식을 포기하고 배달 음식을 시켰다. 진아의 자취방엔 이미 샤부샤부, 꼬치, 치킨까지 전부 세팅되어 있었다. 진아는 닭날개를 오물거리며 말했다.“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 아니, 아예 집에 가지 마. 그 두 사람은 그냥 묶어놔야 해. 세상에 나와서 민폐나 끼치고 말이야...”“응, 그래.” 시연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소고기 완자를 입에 넣었다.그때,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이번엔 밀크티다!” 진아는 닭날개를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됐거든요! 저 남자 친구 있어요!”“뭐...?” 지하는 순간 멍해졌다.그 틈을 타, 진아는 드디어 자기 밀크티를 낚아채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잠깐만!” 지하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 사람, 누군데?”“누가요?” 진아는 한 박자 늦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남자 친구 말하는 거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누구긴 누구겠어요? 부 대표님도 아는 사람이죠. 진성빈이요!!”‘진성빈...? 아, 그놈!’ “쳇.” 지하는 혀를 차더니, 손을 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러더니 갑자기 진아의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하지만 입으로는 계속 중얼댔다. “그 어린애? 취향 진짜 별로네.”“뭐라고요?!” 진아는 깜짝 놀라며 지한을 노려봤다. “성빈이가 뭐 어때서요? 그리고... 잠깐...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누가 들어오래요?! 당장 나가라고요!!!”하지만 지하는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진아는 다급히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라니까요! 못 들었어요?!”지하는 여자의 손을 내려다봤다. ‘오? 얼굴은 통통한데 손가락은 엄청 가늘잖아?’ ‘얼굴에 있는 건 그냥 젖살이었네.’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목 안이 간질거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진아 씨, 지금... 나한테 손댔잖아. 책임져야지.”“뭐, 뭐라고요?!” 진아는 흠칫 놀라며 다급히 손을 뗐다.“푸하하하하!!!” 지하는 또다시 박장대소했다. ‘아, 진짜 너무 재미있다니까? 미치겠네.’하지만 그는 자기가 왜 왔는지를 기억하고, 더는 장난치지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테이블 쪽에 있던 시연이 샤부샤부 국물에서 고기를 건져내며 말했다.“진아야, 너 아까 배달원한테 뭐라고 했어? 잘생겼다고? 넌 진짜 잘생긴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오? 얘 꽃미남 수집가였어?’지하는 고개를 숙여 진아를 쳐다봤다. 진아는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