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차라리 저랑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유건 씨는 밤에 처리할 업무도 있고, 게다가 남자 셋이 함께 한 방에서 자긴 어렵잖아요.” ‘그래, 이 말도 그럴듯한 말이었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시연은 거절하려던 참이었지만, 소미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시연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 드러나자, 유건이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네 몸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그 말속에는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시연에게 무리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고, 라운지에서 밤을 지새운다면 정말로 병이 날 수도 있었다. 시연은 잠시 망설이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밤을 참고 견뎌야 할지 고민했다. “네, 그럼 가요.” 소미는 더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는 제가 지 선생님께 잘못했으니, 저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세요.” 결국 시연은 동의했고, 소미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소미는 시연의 팔을 놓고,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던졌다. “너랑 유건 씨 무슨 관계야? 너, 유건 씨와 너무 가까워지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소미의 질문에 시연은 놀라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다는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진지하게 묻고 있어. 유건 씨는 신사야. 넌 단지 유건 씨를 치료하고 있는 주치의고! 유건 씨가 널 존중하는 거지. 너 착각하지 마!” “하하하.” 참지 못하고 시연은 크게 웃어버렸다. 소미는 점점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야?” “어머나.” 시연은 배를 잡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너 혹시, 불륜 자식 증후군이 있니? 네 엄마가 불륜녀였으니까, 너도 언젠가 네가 ‘불륜녀’가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하,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고 순리라는 거구나!” “너
그러나 임신 중에는 잠이 훨씬 많이 쏟아지기 마련이라, 시연은 결국 호텔 라운지 소파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 한밤중, 노은범이 SYD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소파가 있는 로비의 라운지에서 시연을 발견했다. 시연이 올린 사진을 보며 어느 각도에서 사진이 찍혔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막 잠든 상태였다. 몸을 웅크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은범은 조심스럽게 시연 앞에 쪼그려 앉았다.지금 시연를 깨울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깨우지 않는 쪽이 낫겠어. 그냥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은범은 시연의 SNS를 보자마자 이미 빈방을 예약해 두었다. 막 안아 들자마자, 시연이 눈을 떴다. 은범은 즉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고,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시연이 혹시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시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이야...” 은범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기쁜 감정이 온몸에 휘몰아쳐 흥분된 목소리로 떨면서 대답했다. “나야, 시연아. 나 여기 있어.” “응.” 시연은 눈을 감으며 안도한 듯 그의 품에 기대었다. 은범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때, 시연은 갑자기 눈을 뜨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노은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지금의 시연은 아까 은범에게 기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경한 얼굴로 은범을 대했다. 은범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서, 나에게 화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 시연이 잠에서 덜 깼을 때 나를 ‘은이야’라고 불렀어...’실은 조금 전 시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찾고 의지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은범은 시은이 자신을 ‘은이야’라는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호텔 주방. “선생님, 주문하신 재료는 모두 준비됐습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은범은 재료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친절하게 말했다. “재료들을 잘게 다지고, 속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반죽은 발효시켜 주세요.” 그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제 톡 좀 추가해 주세요. 아내가 특별히 먹고 싶어 해서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서, 작은 성의 표시로 감사 인사 전하고 싶습니다.” “아, 무슨 말씀이세요.” 몇 명의 주방 직원들이 놀라서 톡을 추가하자마자, 은범은 주방에 있던 직원들에게 바로 각각 20만 원씩 송금했다! 주방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은범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단단히 맸다. 주방 직원들은 기꺼이 은범을 도와 만둣국에 넣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몇 분 전, 유건 역시 주방에 전화를 걸어 만둣국을 주문했다. 그는 시연이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시연이 배가 고프면,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잠을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만둣국을 만드는 셰프가 퇴근했습니다.]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임신하고 나서 지시연 입맛이 까다로워졌는데...’ ‘방금도 주문한 만둣국을 못 먹고 빵 한 조각만 먹었잖아...’그저 한 그릇의 만둣국인데, 자신이 시연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유건은 화가 치밀었다. “형!” 정기환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건에게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만둣국 만들 줄 알아요.” ‘응?’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가자!” 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환까지 끌고 다짜고짜 주방으로 향했다. “형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주방, 만둣국 만들러.” 유건 일행이 주방에 도착했을 때, 은범이 막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시연은 부드러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은범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 시연이 잠들기 전 그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범이 들어왔다. “깼어?” 그는 미소 지으며 손에 든 도시락 상자를 내려놓았다. “세수하고 와서 아침 먹자.” “응, 알았어.” 간단히 씻고 나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은 먼저 차를 가지러 갔다. 문 앞에서 은범은 차를 세우고 말했다. “내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게.” “그래.” 멀지 않은 곳에서, 유건 일행도 내려오고 있었다. 정기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유건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형수님 아니에요? 겨우 찾았네요! 밤새도록 형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는지만 고민했어요!” 유건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연이 가방을 메고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운전석에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유건의 눈동자는 깊게 어두워졌고, 차가운 기운이 시연을 감쌌다.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밤새 저 여자를 걱정했는데!!!’ ‘지시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새로운 만나 남자도 벤틀리 콘티넨털을 타다니!’ ‘허.’“형, 내가 형수님 불러올게...” “됐어, 그만 해!” 민환이 동생 기환의 목덜미를 잡고는 눈치를 보며 유건을 살폈다. 그런데 유건은 말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 차 안에서, 은범은 시연에게 담요를 건넸다. “덮어, 추울 거야.” “응.” 시연은 담요를 받아 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네 취향 맞아? 너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이렇게 여성스러운 무늬는 오히려 시연의 취향과 맞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연은 은범이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거 네 여자 친구 거지?” 말하고 나니 시연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마치 은범의 여자 친구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장소미는 이 근처에서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유건은 촬영장을 방문하다가 마침 시간이 남아 그녀와 함께 쇼핑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쇼핑하네요. 신상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유건이 쇼핑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렇게 함께 나와준 것만으로도 소미는 고마워했다. 소미는 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어 유건을 보며 말했다. “유건 씨, 저기 가서 앉아서 기다려요. 제가 금방 갈게요.” “그래.” 유건은 별로 흥미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아는 속으로 놀랐다. ‘원래 고유건이 우리 시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더구나 그 여자 친구가 장소미였다니!’ ‘고유건 눈이 정말 멀었군!’ “어?” 소미의 시선이 진아가 보고 있던 드레스에 멈췄다. 진아가 조금 전에 예쁘다고 했던 바로 그 드레스였다. “와, 정말 예쁘다.” 그녀는 그 드레스를 꺼내 들고 유건에게 보였다. “유건 씨, 어때? 저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 “응.” 유건은 멀리서 소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에 한 여인의 날씬하고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시연이었다. 키가 170cm에 가까운 시연은 날씬한 몸매에 캐러멜 색상의 긴 드레스를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했다. 어깨는 살짝 드러났고, 민낯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소녀다운 생기 넘치는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유건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내인 지시연은 타고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정말 예쁘세요.” 직원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모델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우와!” 진아는 두 손을 모아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시연, 너 정말 너무 예뻐!
흔히들 말하길, 같은 옷을 입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둘 중 누구 한 사람이 더 옷과 잘 어울리느냐가 문제라고 한다. 소미가 이 옷과 잘 어울리는지는 똑같은 옷을 입은 비교 대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비교는 끝나버렸다. “허허.” 소미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옷 별로인 것 같아요. 그냥 안 살래요...”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잠깐.” 유건이 그녀를 불렀다. “유건 씨?” 소미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유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은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아주 예뻐. 사.” “하지만...” 소미는 살짝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옷을 입었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야?” 유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카운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드레스, 전부 내가 살게.” 그리고 덧붙였다. “본사에 이 드레스를 전부 내리라고 해. 내 여자 친구는 다른 사람과 같은 옷을 입기 싫어하니까.” “저... 저기...” 직원은 깜짝 놀라며, 얼떨결에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시연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유건은 그 시선을 보자마자 가볍게 말했다. “저분한테 옷을 벗으라고 해.” “뭐라고 하셨죠?” 직원은 당황해 물었다. “벌써 말했는데.”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뚜렷하게 말했다. “벗으라고.” 이번에는 직원이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는 손님들은 모두 VIP였지만, G시에서 유건은 그중에서도 VVIP이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 대표님.” 직원은 시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 드레스를 벗어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옷을 한번 보시는 건 어떨까요? 보상으로 모든 신상품을 30%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시연은
그날 밤, 유건은 BLUE을 찾았다. 부지하와 주정빈이 먼저 와 있었고, 한 달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유강석도 도착해 있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서 마치 우아하게 차를 끓이는 척하고 있었다. 강석은 유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나, 우리 고 대표가 오셨네. 이 차 좀 맛보시게.” 유건은 차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면서 지하와 정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석이가 술집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보고만 있는 거야?” 지하가 웃으며 말했다. “막을 수 있어야 말이지. 요즘 우리 강석 도련님은 차에 빠져 있거든.” “허허.” 강석은 한숨을 내쉬며 유건 옆에 앉아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저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넌 다르지. 듣자 하니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 대표는 본처와 첩을 동시에 얻었다던데.” “하하하!” “멋지다!” 주변의 남자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건은 그 친구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자식들, 날 비웃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아이고.” 강석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유건에게 윙크를 보냈다. “고 대표, 진지하게 하나 물어보자, 본처가 더 좋아? 아니면 첩이 더 좋아?” 유건은 순간 멍해지며 잠시 침묵했다. “그게 질문이 될까?” 지하가 정빈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방금 한 수를 놓으며 강석의 말에 대신 대답했다. “정실이 마음에 든다면 첩을 둘 필요가 있겠어? 하하하!” “맞아.” 강석도 지하의 말에 동의했다.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유건의 결혼은 그의 할아버지 고상훈의 결정이었고, 유건도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유건이 자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귀찮아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신경 쓰지 마.” 강석은 유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좋아하시니까 그냥 놔둬. 네 조건이면 마음속에 둔 사람을 놓칠 일 없잖아?” 유건은 강석을 흘겨보며
점심시간, 시연은 진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연은 크게 하품했다. 진아는 그녀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고 물었다. “얼굴 왜 이렇게 피곤해? 몇 시 잤어?” “모르겠어, 아마도 새벽에.” 진아가 말했다. “알바하느라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마. 건강이 우선이야.” “응, 알았어.” 시연은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잠을 못 잔 건 번역 때문이 아니라... 눈만 감으면 유건의 커다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젯밤, 고유건이 정말 나에게 키스하려던 걸까?’ ‘그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게 아니었다면 또 어땠을까?’ “시연아.”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진아였다. “얼굴이 이렇게 빨개? 열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따뜻한 국물 먹어서 그런지 좀 덥네...” 점심 후, 시연은 진료실로 돌아왔다. 주하은이 그녀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시연아, 양석현 교수님이 너 돌아오면 교수님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 지금 안에 계셔.” “알았어.”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가운을 입고 들어가려 했다. “시연아.” 주하은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장성산 교수님도 함께 계셔. 양석현 교수님과 함께 문광수 과장님을 만나러 갔는데, 상황이 안 좋아 보여...” 그 말을 듣자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문광수는 외과 과장으로, 내년에 은퇴할 예정이다. 양석현과 장성산은 부과장으로, 두 사람은 과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는 언제나 불편했다. 양석현은 실무 능력이 뛰어났고, 장성산은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내는 사람이었다. 양석현은 장성산을 무시했고, 장성산은 양석현을 질투했다. 특히 얼마 전 고유건이 부상으로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그날 밤 장성산이 2차 당직을 맡고 있었다.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양석현 혼자 감당하지 못할 때 장성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