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시연은 부드러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은범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 시연이 잠들기 전 그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범이 들어왔다. “깼어?” 그는 미소 지으며 손에 든 도시락 상자를 내려놓았다. “세수하고 와서 아침 먹자.” “응, 알았어.” 간단히 씻고 나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은 먼저 차를 가지러 갔다. 문 앞에서 은범은 차를 세우고 말했다. “내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게.” “그래.” 멀지 않은 곳에서, 유건 일행도 내려오고 있었다. 정기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유건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형수님 아니에요? 겨우 찾았네요! 밤새도록 형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는지만 고민했어요!” 유건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연이 가방을 메고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운전석에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유건의 눈동자는 깊게 어두워졌고, 차가운 기운이 시연을 감쌌다.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밤새 저 여자를 걱정했는데!!!’ ‘지시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새로운 만나 남자도 벤틀리 콘티넨털을 타다니!’ ‘허.’“형, 내가 형수님 불러올게...” “됐어, 그만 해!” 민환이 동생 기환의 목덜미를 잡고는 눈치를 보며 유건을 살폈다. 그런데 유건은 말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 차 안에서, 은범은 시연에게 담요를 건넸다. “덮어, 추울 거야.” “응.” 시연은 담요를 받아 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네 취향 맞아? 너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이렇게 여성스러운 무늬는 오히려 시연의 취향과 맞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연은 은범이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거 네 여자 친구 거지?” 말하고 나니 시연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마치 은범의 여자 친구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장소미는 이 근처에서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유건은 촬영장을 방문하다가 마침 시간이 남아 그녀와 함께 쇼핑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쇼핑하네요. 신상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유건이 쇼핑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렇게 함께 나와준 것만으로도 소미는 고마워했다. 소미는 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어 유건을 보며 말했다. “유건 씨, 저기 가서 앉아서 기다려요. 제가 금방 갈게요.” “그래.” 유건은 별로 흥미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아는 속으로 놀랐다. ‘원래 고유건이 우리 시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더구나 그 여자 친구가 장소미였다니!’ ‘고유건 눈이 정말 멀었군!’ “어?” 소미의 시선이 진아가 보고 있던 드레스에 멈췄다. 진아가 조금 전에 예쁘다고 했던 바로 그 드레스였다. “와, 정말 예쁘다.” 그녀는 그 드레스를 꺼내 들고 유건에게 보였다. “유건 씨, 어때? 저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 “응.” 유건은 멀리서 소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에 한 여인의 날씬하고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시연이었다. 키가 170cm에 가까운 시연은 날씬한 몸매에 캐러멜 색상의 긴 드레스를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했다. 어깨는 살짝 드러났고, 민낯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소녀다운 생기 넘치는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유건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내인 지시연은 타고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정말 예쁘세요.” 직원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모델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우와!” 진아는 두 손을 모아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시연, 너 정말 너무 예뻐!
흔히들 말하길, 같은 옷을 입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둘 중 누구 한 사람이 더 옷과 잘 어울리느냐가 문제라고 한다. 소미가 이 옷과 잘 어울리는지는 똑같은 옷을 입은 비교 대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비교는 끝나버렸다. “허허.” 소미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옷 별로인 것 같아요. 그냥 안 살래요...”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잠깐.” 유건이 그녀를 불렀다. “유건 씨?” 소미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유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은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아주 예뻐. 사.” “하지만...” 소미는 살짝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옷을 입었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야?” 유건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카운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드레스, 전부 내가 살게.” 그리고 덧붙였다. “본사에 이 드레스를 전부 내리라고 해. 내 여자 친구는 다른 사람과 같은 옷을 입기 싫어하니까.” “저... 저기...” 직원은 깜짝 놀라며, 얼떨결에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시연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유건은 그 시선을 보자마자 가볍게 말했다. “저분한테 옷을 벗으라고 해.” “뭐라고 하셨죠?” 직원은 당황해 물었다. “벌써 말했는데.”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뚜렷하게 말했다. “벗으라고.” 이번에는 직원이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는 손님들은 모두 VIP였지만, G시에서 유건은 그중에서도 VVIP이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 대표님.” 직원은 시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 드레스를 벗어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옷을 한번 보시는 건 어떨까요? 보상으로 모든 신상품을 30%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시연은
그날 밤, 유건은 BLUE을 찾았다. 부지하와 주정빈이 먼저 와 있었고, 한 달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유강석도 도착해 있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서 마치 우아하게 차를 끓이는 척하고 있었다. 강석은 유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나, 우리 고 대표가 오셨네. 이 차 좀 맛보시게.” 유건은 차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면서 지하와 정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석이가 술집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보고만 있는 거야?” 지하가 웃으며 말했다. “막을 수 있어야 말이지. 요즘 우리 강석 도련님은 차에 빠져 있거든.” “허허.” 강석은 한숨을 내쉬며 유건 옆에 앉아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저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넌 다르지. 듣자 하니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 대표는 본처와 첩을 동시에 얻었다던데.” “하하하!” “멋지다!” 주변의 남자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건은 그 친구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자식들, 날 비웃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아이고.” 강석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유건에게 윙크를 보냈다. “고 대표, 진지하게 하나 물어보자, 본처가 더 좋아? 아니면 첩이 더 좋아?” 유건은 순간 멍해지며 잠시 침묵했다. “그게 질문이 될까?” 지하가 정빈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방금 한 수를 놓으며 강석의 말에 대신 대답했다. “정실이 마음에 든다면 첩을 둘 필요가 있겠어? 하하하!” “맞아.” 강석도 지하의 말에 동의했다.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유건의 결혼은 그의 할아버지 고상훈의 결정이었고, 유건도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유건이 자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귀찮아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신경 쓰지 마.” 강석은 유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좋아하시니까 그냥 놔둬. 네 조건이면 마음속에 둔 사람을 놓칠 일 없잖아?” 유건은 강석을 흘겨보며
점심시간, 시연은 진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연은 크게 하품했다. 진아는 그녀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고 물었다. “얼굴 왜 이렇게 피곤해? 몇 시 잤어?” “모르겠어, 아마도 새벽에.” 진아가 말했다. “알바하느라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마. 건강이 우선이야.” “응, 알았어.” 시연은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잠을 못 잔 건 번역 때문이 아니라... 눈만 감으면 유건의 커다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젯밤, 고유건이 정말 나에게 키스하려던 걸까?’ ‘그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게 아니었다면 또 어땠을까?’ “시연아.”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진아였다. “얼굴이 이렇게 빨개? 열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따뜻한 국물 먹어서 그런지 좀 덥네...” 점심 후, 시연은 진료실로 돌아왔다. 주하은이 그녀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시연아, 양석현 교수님이 너 돌아오면 교수님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 지금 안에 계셔.” “알았어.”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가운을 입고 들어가려 했다. “시연아.” 주하은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장성산 교수님도 함께 계셔. 양석현 교수님과 함께 문광수 과장님을 만나러 갔는데, 상황이 안 좋아 보여...” 그 말을 듣자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문광수는 외과 과장으로, 내년에 은퇴할 예정이다. 양석현과 장성산은 부과장으로, 두 사람은 과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는 언제나 불편했다. 양석현은 실무 능력이 뛰어났고, 장성산은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내는 사람이었다. 양석현은 장성산을 무시했고, 장성산은 양석현을 질투했다. 특히 얼마 전 고유건이 부상으로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그날 밤 장성산이 2차 당직을 맡고 있었다.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양석현 혼자 감당하지 못할 때 장성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차는 많은 양의 배기가스만 남기고 부릉거리며 떠났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정말 속이 좁네!” 시연은 윤건이 아까 칭찬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고유건이 아직도 내가 장소미와 같은 드레스를 골랐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아니겠지?’‘정말이면, 고유건은 장소미에 완전히 빠졌구나!’ ... 시연이 BLUE에 도착했을 때,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엘리베이터 좀 기다려 주세요!” 시연은 급히 뛰어가며 외쳤는데, 순간에 멈칫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유건이 서 있었다. 그도 여기에 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건의 마음은 복잡했다. ‘지시연이 이런 옷을 입고 BLUE에 온 건, 그 드레스를 사준 남자를 만나러 온 거겠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지한이 당황했다. “형님!” 시연이 막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이 차갑게 그녀 앞에서 닫혔다. 시연은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고유건!!!” 할 수 없이 그녀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시연이 도착했을 때, 양석현은 이미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고, 고객을 접대하는 이런 자리에서 요령도 하나 없이 거절하지도 못하고 상대방이 권하는 대로 술을 다 마시고 있었다. 시연은 깊은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앞으로 나섰다. “교수님, 늦어서 죄송해요.” 시연이 도착하자마자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양 교수님, 이 아가씨가 교수님의 제자입니까?” 양석현이 대답했다. “네, 제 가장 뛰어난 제자 지시연 선생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젊고, 게다가 여자가 이렇게 예쁘기까지 하다니.” 다른 한 남자가 술잔을 들
호보창조차 돌아서서 웃음을 지었다. 쩔쩔매며 아첨하는 모습은 아까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고 대표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연을 재촉했다. “지 선생,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호보창이 말한 ‘고 대표님’이 바로 고유건이었다. ‘고유건도 이 자리에 있었다니!’ 시연이 다시 술잔을 들기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너, 이리 와.”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쿡 찌르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 보지 마.” 유건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너 말이야, 이리 와.”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쏠렸다. 시연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 뭘 하려는 속셈이지?’ 순간에, 룸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건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 호보창은 안달이 나서 시연의 허리를 살짝 밀며 말했다. “지 선생, 뭘 멍하니 서 있어요? 고 대표님이 부르는 거 못 들었어요?”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유건 앞까지 걸어갔다. “고 대표님.” “응.” 유건은 느긋하게 시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와서 술 따라.”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고, 많은 사람 앞이기도 해서 시연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연은 웨이터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제가 따를게요.” 그러고 나서 유건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시연은 샤넬의 시즌 최신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얇은 두 줄의 끈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으며, 우아한 쇄골과 가슴선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유건의 목울대가 불편하게 움직였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시연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를 꼭 붙잡고, 얼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유건은 고개를 들어 호보창을 바라보았다. 유건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호보창은 이미 겁에 질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제 와서 고유건이 지시연을 눈여겨봤다는 걸 몰랐다면, 그는 지금까지 헛살았던 셈이다. ‘비록 내가 먼저 그 지시연이라는 의사를 마음에 두었지만, 만약 지금 내가 고유건이 눈에 둔 이 여자 의사를 건드리면, 나중에 고유건이 나한테 따지고 들겠지? 그때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자 호보창이 시연에 대해 갖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은 눈을 살짝 움직이며 양석현을 가리키고는 차갑게 말했다. “G시 최고의 외과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존경받아 마땅한 학자를 이 정도로 모욕한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네, 제 잘못입니다.” 호보창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저 학자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유건은 시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감싸며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양석현을 향해 말했다. “양 교수님, 더 이상 여기서 이런 고생은 하지 마세요. 후원금 건은 제가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양석현은 깜짝 놀라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시연도 놀라서 유건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야 해?”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그럼 가요.” 유건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며 정민환에게 지시했다. “양석현 교수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 “네, 형님.” 방 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민환이 양석현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호보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양 교수가 정말 훌륭한 제자를 얻으셨군!” ... BLUE을 나와서도 유건의 차에 탄 시연은 계속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유건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