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좀 넣어줘요.”“아, 네.”시연은 리슬에게서 컵을 받아서 들며 조용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얼음물... 고유건이랑 똑같네. 이런 사소한 것도 닮을 수 있구나.’그녀는 잔에 얼음을 듬뿍 채워 다시 리슬에게 건넸다.그때, 식당 입구 쪽 계단에서 유건이 내려오고 있었다.리슬에게 얼음물을 건네는 시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유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침부터 저 둘이 또 무슨...’“일어났네요!”리슬은 반가운 얼굴로 유건을 끌어 앉혔다.잠시 후, 마수경도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왔다.“대표님, 아침 차려드릴까요?”“응.”유건은 짧게 대답했다.“네.”마수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하... 인원도 안 맞춰 놨는데 왜 갑자기 손님이 늘어...’결국 시연이 조용히 자신의 몫을 리슬에게 양보했다.리슬은 눈치도 없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이 아가씨는 뭐 하나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손만 늘어...’마수경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그걸 눈치챈 시연은 조용히 말했다.“전 괜찮아요. 이따가 샌드위치 하나 먹으면 돼요. 이분은 대표님 손님이니까요.”“제가 지금 만들어줄게요.”마수경은 씩씩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감사해요.”하지만, 속이 뒤틀린 마수경은 일부러 리슬의 식기 세트를 빼놓았다.“어?”리슬은 잠시 당황한 듯 자리를 살폈다.그러고는 시연을 향해 손짓했다.“식기 좀 줘요. 손으로 먹으라는 거예요?”‘이건 뭐, 대놓고 나를 가사도우미로 보네.’마수경은 시연의 샌드위치를 준비하느라 손이 비지 않았다.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잠깐만요.”시연은 조용히 찬장에서 식기를 꺼내어 리슬 앞에 놓았다.“맛있게 드세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잠시 후, 마지막 탕약이 완성됐다.시연은 조심스럽게 약을 그릇에 따르고 유건 앞에 가져다주었다.“대표님, 약이에요. 캔디는 옆에 뒀으니까 꼭 드시고요.”그녀는 시계를 흘긋 보았다.‘조이 깼겠네. 올라가서 봐야겠다.’시연은 다시 조
아침 일찍, 시연은 두 번째 탕약을 막 다려낸 뒤, 물을 한 번 더 붓고 세 번째 약을 달이고 있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띵동.마수경은 바쁘게 부엌을 오가며 말했다.“지 선생님! 잠깐만 도와줄 수 있어요?”“네.”시연은 앞치마를 정리하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훅 들어왔다.“어? 시연 씨였군요.”도리슬이었다.리슬은 시연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익숙한 얼굴로 안쪽을 향해 물었다.“유건 씨 아직 안 깼어요?”“모르겠는데요...”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럼 제가 올라가 볼게요!”리슬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그 모습은 마치 본인 집인 양 익숙했다.‘참 편하네.’시연은 묘하게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했다.리슬은 망설임 하나 없이 2층으로 올라가, 유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방 안은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컴컴했다.유건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오? 아직도 자요?”리슬은 쾌활하게 웃으며 두 발짝 앞으로 다가가, 이불을 잡았다.“일어나요! 나가야죠!”순간, 방 안에 불이 켜졌다.잠에서 깨자마자 유건은 눈살을 팍 찌푸렸다.리슬을 노려보며, 이불을 다시 댕겨 덮었다.“또 리슬 씨야? 들어올 땐 문 좀 두드려. 그리고 누가 남자 이불을 막 걷으래?”‘하마터면... 진짜 다 보일 뻔했잖아.’‘다행히도 어제는 잠옷 입고 잤지... 안 그랬으면 아주 생쇼였겠네.’하지만 리슬의 시선은 이미 꽤 많은 걸 훑고 지나간 후였다.유건의 상반신은 단단하고, 매끈했다.핏줄 따라 이어지는 근육 라인은 눈에 선명했고, 숨만 쉬어도 탄력이 느껴졌다.‘와... 몸 진짜 미쳤다...’‘이 정도면 화보 찍어야 하는 거 아냐?’리슬은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고, 볼이 살짝 붉게 물든 후 목소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오늘 지하 오빠랑 배 타기로 했잖아요. 빨리 안 일어나면 늦을 거예요.”“뭐?”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당
시연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유건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웠다.시연은 침 뜸 가방을 열고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다.“어때요? 느낌 있어요?”“음...”유건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속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아.”“그럼 잘 침이 효과 있다는 증거예요.”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삼십 분만 하고 뺄게요.”“알았어.”침을 다 놓고 난 후, 시연은 유건 옆에 조용히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늘... 조이한테 준 선물, 너무 과했어요.”‘또 그 얘기네.’유건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그래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에겐 별거 아닐지 몰라도... 우리 모녀한텐 감당하기 어려운 선물이었어요.”시연은 아까 잠깐 틈을 내어 핸드폰으로 브랜드를 검색했었다.고급 브랜드의 유아용 머리핀.작은 크기의 조각난 다이아몬드라도, 다섯 자리 가격은 기본이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유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다시 돌려주겠다고 말하려는 거면 그냥 버려. 당신이 돌려줘봤자, 난 쓰레기통에 버릴 거니까.”‘이 남자... 이런 거 하나는, 예전이랑 똑같네.’하지만 시연이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건, 단순한 핀 하나가 아니었다.유건이 조이에게 너무 잘해주고 있다는 사실.‘너무 따뜻하게 대하는 게... 무섭다.’‘익숙해지는 게 무섭고, 기대하는 게 더 무섭다.’“대표님.”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조이는 아직 어린아이예요. 굳이 그렇게까지 마음 써서 달래주지 않아도 돼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유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지. 모를 리가 없지.’그녀의 말은 분명했다.조이에게 너무 잘해주지 말 것.아이와 너무 가까워지지 말 것.‘지금 내가 조이랑 가까워지는 게 싫은 거야. 그래서 선 넘지 말라는 거지.’갑작스럽게 유건의 혀끝에 쓰디쓴 맛이 퍼졌다.조금 전 마신 한약보다 더 독한
“안 돼요! 안 돼요!”조이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작은 손으로 핀을 꼭 누르며 사라질까 봐 불안한 눈빛으로 시연을 올려다봤다.“조이야.”시연은 인내심을 꾹꾹 누르며 부드럽게 타이르기 시작했다.“엄마가 말했지? 남이 준 거, 아무거나 받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아직 너무 어려. 값어치로 교육하긴 이르지. 하지만 지금부터 습관은 잡아야 해...’“하지만...”조이는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아저씨가 줬는걸요. 조이가 막 가져간 거 아니에요.”‘저렇게 아끼는 거 보니... 정말 마음에 들긴 했나 보네.’“지조이.”이성적인 설명이 통하지 않자, 시연은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조이의 어깨가 움찔했다.‘엄마... 진짜 화났다...’“지조이.”시연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핀 빼서 아저씨한테 돌려드려. 알았지?”조이는 입을 삐죽이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볼이 부풀어 오르고, 작은 몸이 금세 위축됐다.“엄마, 셋 셀게.”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하나...”“엄마...”결국 조이는 입을 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으아아앙...”조이는 억지로 손을 들어 머리에 얹힌 왕관 핀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그만!”그 순간, 옆에 있던 유건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날카롭게 목소리를 내며 시연 쪽을 향해 말했다.“핀 하나 가지고 그러는 거야? 애가 저렇게 무서워서 우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해? 조이 울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야?”그는 곧바로 조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따뜻하게 말했다.“조이, 안 빼도 돼. 그냥 계속 하고 있어. 그건 아저씨가 준 선물이니까. 아저씨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조이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을 들더니, 말없이 유건을 쳐다봤다. 곧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눈물방울이 톡 하고 뺨을 타고 떨어졌다.작은 몸이 돌연 움직이더니, 조이는 유건 쪽으로 달려가 그의 다리를
유건은 조이가 엄마인 시연처럼 그렇게 달래기 어려운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조이 눈높이에 맞추려고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쭈그려 앉았다.유건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아침엔 아저씨가 잘못했어. 조이 우유병 떨어뜨려서 더럽게 만들었지?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조이, 아저씨 용서해 줄 수 있을까?”조이는 유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 이사 오게 된 건지, 왜 이 아저씨랑 같이 살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아저씨, 좋은 사람이에요?”‘어라.’유건은 입꼬리를 씰룩였다.‘지난번엔 좋은 사람이라더니, 이번엔 확신이 없나?’‘여자의 마음은 바닷속 바늘이라더니, 꼬맹이도 예외는 아니구나.’다행히도 유건은 미리 대비해 둔 게 있었다. 단순히 사과 한마디로 조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 작은 상자를 꺼내 조이 앞으로 내밀었다.“조이 선물이야. 마음에 들까?”파란 벨벳으로 감싼 작은 보석함 안에는 반짝이는 핀 하나가 들어 있었다.작은 왕관 모양의 디자인,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반짝반짝 빛났다.“와!”조이의 얼굴에 금세 환한 미소가 퍼졌다.‘역시. 반짝이는 걸 싫어하는 여자아이는 없어.’유건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매장 직원 말이 맞았어. 모든 여자아이에겐 공주 로망이 있다니까.’‘왕관을 싫어할 공주가 어딨어.’조이는 통통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아저씨, 조이 가져도 돼요?”“그럼.”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이 주려고 산 거니까.”그는 조심스럽게 핀을 꺼내 조이 머리에 꽂아주고,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정말 예쁘다.”“보고 싶어요!”조이는 얼른 일어나 보려고 허둥댔다.하지만 급하게 움직이자 동작이 더 꼬였다.그 순간 조이는 빠르게 판단했고, 통통한 팔을 쑥 내밀었다.“아저씨, 안아줘요!”“좋아.”유건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조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봐, 역시 조이는 나를
약을 마신 유건은 찡그린 얼굴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진짜 이 맛은 여전하네... 사람 입에 넣을 게 아니야, 이건.’옷을 갈아입고 다시 내려온 유건.거실에선 마수경이 조이와 함께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화면엔 두 마리 아기 돼지가 신나게 진흙탕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유건이 내려오는 걸 본 마수경은 재빨리 일어나며 조심스럽게 웃었다.“대표님, 지 선생님은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어요. 곧 조이 어린이집 데려다 줄 거래요. 그래서 조금만 TV 보게 해줬어요. 딱... 조금만요.”말끝의 힘 준 ‘조금만요’가 왠지 더 눈치를 보게 했다.마수경은 한껏 조심스러운 표정이었고, 조이는 마수경 뒤에 몸을 숨긴 채, 큰 눈으로 유건을 올려다봤다.‘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유건은 괜히 턱이 뻐근했다.‘하나같이 나를 무슨 괴물 보듯이 하네.’그렇다고 그는 일일이 해명하는 성격도 아니었다.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섰고, 차에 올라탄 순간에도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운전대 앞에서 유건은 괜히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봤다.‘왜 저러지, 조이...?’‘지난번엔 나한테 그렇게 잘 붙어 있었으면서...’자꾸 마음이 쓰였다. 처음 봤을 땐 자기 다리 붙잡고 안 떨어질 기세였던 애가, 왜 오늘은 눈만 마주쳐도 울려고 하는 건지.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무심코 검색창을 열었다.손가락이 멈춘 키보드 위에 적힌 글자.[세 살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행동][세 살 아이 마음 얻는 방법]‘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그날은 수요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시연은 오대민의 진료 예약을 받게 됐다.문을 열고 들어가던 시연이 치료 카트를 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오늘 웬일이세요? 이렇게 기습 방문하시는 거 보니까, 혹시 제 치료가 마음에 안 드셔서 항의하러 오신 거 아니죠?”“하하!”오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연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정답. 치료가 너무 좋아서 따지러 왔지. 지난번에 준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