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열이 나는 거 아니야?”하도진은 민하윤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걸 굳이 따지지 않았다.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평소 차분하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민하윤도 머리가 조금 어지럽기는 했다.하지만 오후 내내 햇볕을 쐰 데다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잔 탓이라고 생각했다. 민하윤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하도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도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집에 체온계 있어요?”민하윤과 더 실랑이할 생각도 없이 곧장 가사 도우미에게 구급상자를 가져오라고 했다.체온계를 몇 번 털어 온도를 내린 뒤 민하윤에게 내밀었다.민하윤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뻗지 않았다.그러자 하도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어르신들이 곁에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낮게 말했다.“내가 직접 재 줄까?”민하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곧바로 매섭게 노려봤다.“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열이 나는 게 아니에요.”하지만 하도진은 믿지 않았다.손에 느껴지는 감각보다 체온계에 찍히는 숫자를 더 믿었다.무엇보다 하도진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늘 민하윤의 건강이었다.민하윤이 화가 나서 자신을 피하는 것도 말을 섞기 싫어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민하윤의 몸이 좋지 않은 지금만큼은 달랐다.싸웠든 냉전 중이든 그런 건 전부 뒤로 미뤄야 했다.민하윤의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결국 민하윤도 더는 버티지 못했고 어른들의 앞에서 계속 실랑이를 벌여 분위기를 더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속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민하윤은 마지막 체면은 지키며 체온계를 받았다.잠옷 단추 두 개를 풀고 겨드랑이에 끼웠다.그제야 김옥자도 두 사람이 싸웠다는 걸 눈치챘다.어쩐지 민하윤이 하루 종일 기운 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웃는 얼굴도 한 번 보이지 않았다.민하윤이 아침부터 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려 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민하윤은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머리가 멍해지고 자꾸 눈이 감겼으
“와, 다들 밖에 나와 있었네요. 이렇게 더운데 왜 안에 안 있고 다들 마당에 있어요?”“네 할머니가 에어컨 켜 둔 방에 애들이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을까 봐 그러셨어. 해도 거의 졌고 해서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야.”아빠를 발견한 주주와 연이는 동시에 장난감을 내려놓고 통통한 두 팔을 활짝 벌렸다.그건 하도진더러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하도진은 마음이 금세 풀려 한 아이씩 품에 안아 들고 번갈아 볼에 입을 맞췄다.김옥자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하윤이랑 여기서 먹고 같이 가. 내일 애들은 기사 시켜서 다시 데려오면 되잖아. 여기 애 봐줄 사람 많으니까 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김옥자는 두 사람이 크게 다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저 집 안에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해 주는 두 증손주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반면 채선화는 어젯밤 일을 대충 알고 있었다.채선화는 하도진을 한번 흘겨보더니 손주의 입가를 닦아 주는 척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타박했다.“애들은 봐줄 사람 있으니까 얼른 올라가서 네 아내부터 달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아내랑 툭하면 싸우고 삐지는 거야? 네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네 아버지한테 한 소리 제대로 들어야 정신 차리겠어?”그 순간, 하도진의 입가에 있던 웃음이 굳었다.“또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으셨어요?”“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윤이가 나한테 일러바친 게 아니야.”채선화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애들이 계속 울더라. 하윤이가 이 애를 안았다가 저 애를 안았다가 번갈아 달래느라 한밤중까지 고생했어. 그런데 넌 어디 있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하윤이는 아무 말도 안 하더라.”하도진은 눈을 내리깔고 짧게 대답했다.“알겠어요.”이번에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품 안의 두 아들만 가볍게 달랬다.두 아이가 팔 안에서 신나게 몸을 움직이던 그때, 하도진의 시선이 갑자기 멈췄다.주주와 연이의 목과 팔 여기저기에 작은 붉은 자국이 몇 개
하도진은 술에 취해 디진 라운지 클럽 꼭대기 층의 룸에서 그대로 밤을 보냈다.다음 날 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명원은 한창 8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연일 폭염경보가 내려질 정도로 날씨가 뜨거웠다.하도진은 샤워를 마친 뒤 서명인에게 깨끗한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휴대전화에는 밤사이 연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채선화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열 통도 넘게 와 있었고 평소 아들과 별다른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하준혁까지 웬일로 문자 한 통을 보내 집에 들어오라고 재촉했다.하도진은 소파에 기대앉아 다시 맨 위에 고정된 대화창을 바라봤다.여전히 조용했다.새로 온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하도진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어젯밤 마신 술이 아직 덜 깼는지 머리가 지끈거린 하도진은 지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옆에 던져 버렸다....하씨 본가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집 안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그런 사정을 모르는 건 주주와 연이뿐이었다.두 아이는 가사 도우미와 산후 도우미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놀고 있었다.민하윤은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무릎 위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고 오후 햇살이 집 안으로 가득 들어와 옆얼굴을 비췄다.따뜻한 빛에 감싸인 민하윤의 모습은 평온하고 고요해 보였다.채선화는 사람을 시켜 보양차를 끓여 민하윤 앞에 가져다주며 말했다.“뭐라도 좀 먹어. 그 녀석도 참 철이 없어. 애 아빠까지 된 사람이 아직도 성질을 못 죽이고 한밤중에 뛰쳐나가서는 밤새 집에도 안 들어오다니 말이야.”채선화는 자기 아들이라고 감싸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나서 얼굴이 굳었다.새벽 한두 시쯤이었다.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온 채선화는 복도 끝 침실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알아챘다.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아기 둘이 번갈아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채선화는 문을 가볍게 두드린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그 순간, 한 손으로 우는
“보통은 내가 무슨 일을 말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하지만 하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준오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고 손등에 핏줄까지 불거질 만큼 화가 치밀었다.“넌 아직도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하냐? 송지훈이랑 둘이 입 맞춰서 나한테 숨기고 그 자식이 내 동생과 만나는 걸 빤히 보고만 있었어?”구준오는 이를 악물었다.“둘도 참 대단하네. 결국 너희 둘만 친구였던 거네. 난 동생도 뺏기고 친구까지 잃게 생겼으니 말이야.”“둘이 사귀는 건 알고 있었어. 임신한 건 두 시간 전에 처음 알았어.”구준오가 갑자기 차갑게 웃었다.“하 대표는 소식도 참 빠르시네. 이런 일이 벌써 네 귀에까지 들어갔어?”그러더니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설마 송지훈 그 자식이 일부러 소문낸 건 아니겠지? 우리 가문이 어쩔 수 없이 이현이를 자기한테 시집보내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하도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요즘 세상에 결혼 전에 임신했다고 해서 무조건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었다.다만 구이현처럼 명원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딸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그런 가문일수록 딸의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다.이 일이 밖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구씨 가문 역시 여러 상황을 따져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그때 구준오가 차갑게 말했다.“이현이는 평생 결혼 안 해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어.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알 게 뭐야.”술잔을 움켜쥔 구준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송지훈이 정말 그런 치졸한 수를 쓴 거라면 내가 악역이 되는 한이 있어도 절대 가만 안 둬. 그 자식이랑 친구는 못 해도 난 내 동생 하나 못 지킬 것 같아?”하도진은 눈을 내리깔았다.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아직 소문난 건 아니야. 네가 송지훈을 병원에 실려 갈 만큼 패 놨다길래 내가 가서 봤어. 그 일은 내가 캐물어서 직접 들은 거고...”구준오의 표정은
하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민하윤이 왜 하필 이 문제에서만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왜 이 일만큼은 끝까지 자신과 부딪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더구나 민하윤이 왜 그런 애매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한 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신 중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두 사람이 다퉜는데 민하윤은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집을 나가 버렸다.한밤중에 지갑도 휴대전화도 챙기지 않은 채 화가 난 얼굴로 혼자 밖으로 나갔다.하도진도 처음에는 화가 나서 집에 버티고 있었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차 키를 들고 뛰쳐나갔다.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르네 별장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정원 산책로에서 민하윤을 발견했다.민하윤은 계속 눈물을 닦으면서도 죽어도 차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버텼다.하도진은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심정으로 달랬다.그때 민하윤이 뜬금없이 한마디했다.“나 정말 너무 지쳤어요. 조금은... 후회되기도 해요.”그 말을 들은 순간 하도진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하지만 민하윤이 대체 무엇을 후회한다는 건지 차마 묻지 못했다.하도진은 아이를 생각해서 자신이 먼저 물러섰고 애써 장난스럽게 웃으며 민하윤을 달랬다.“우리 사이가 깨질 만한 말은 하지 말자. 내가 잘못했어. 화 안 풀리면 날 한 대 때릴래?”결국 두 사람은 다시 화해했다.그날 밤 있었던 일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하도진은 가끔 생각했다.‘하윤이는 왜 후회한다고 했을까. 무엇을 후회한 걸까...’사실 하도진의 마음속에는 이미 떠오르는 답이 하나 있었다.다만 인정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다시 만난 뒤 두 사람은 마치 겨울 호수 위의 얼음을 손잡고 걷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 얼음이 얼마나 두꺼운지는 아무도 몰랐다.혹시 다음 한걸음에서나 아니면 바로 다음 순간에 얼음이 깨져 두 사람이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을지도 몰랐다.사실 얼음에는
두 사람 모두 간신히 마지막 이성은 붙잡고 있었다.침대 위에서 낮은 목소리로 다투는 동안, 옆에서 자던 연이도 분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듯 좀처럼 편히 자지 못했다. 작은 손을 자꾸 움직이다가도 갑자기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민하윤은 문득 너무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몸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가 밀려왔다.‘그때 다시 화해했던 게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닐까? 결국 우리 두 사람은 또 예전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걸까...’두 사람은 성격부터 살아온 환경까지 너무 달랐다.하도진은 명원에서도 손꼽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란 사람이었다. 늘 당당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반면 민하윤은 사소한 일 하나도 몇 번이고 곱씹는 성격이었다.마음이 여리고 예민해서 작은 일도 쉽게 넘기지 못했고 늘 불안해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도 쉽게 떨쳐 내지 못하는 열등감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민하윤에게는 언제나 안정감이 부족했다.하도진이 아무리 큰 재산을 가지고 있고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민하윤에게 있어서 일자리는 단순히 월급을 받는 직장이 아니었다.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자 독립적인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였다.지금 두 사람이 다투는 이유도 단순히 육아휴직을 한 달 일찍 끝내고 복직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그건 그저 쌓여 있던 문제를 터뜨린 계기에 불과했다.애초부터 두 사람의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었다.서로를 충분히 믿지 못했고 하도진은 늘 자신의 방식으로만 민하윤을 사랑했다.정작 민하윤이 어떤 마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그 사랑은 너무 무거웠고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하윤아,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하도진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민하윤의 턱을 잡았고 시선은 민하윤의 입술에 고정돼 있었다.당장이라도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