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허락한 바람

남편이 허락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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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ng_E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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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한 남편 차재헌은 이혼을 180일 미루는 대신 서로의 외부 교제를 허락한다. 하지만 문예원이 건축가 권시혁을 진짜 사랑하게 되자, 가장 먼저 무너진 건 자유를 제안한 남편이었다. 아직 법적으로 부부인 채 남은 180일, 허락됐지만 금지된 사랑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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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남편이 허락한 바람

탁자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는 지나치게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법무법인 세림]

남편 차재헌이 일하는 곳이자, 그가 머지않아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대형 로펌.

예원은 봉투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의 직장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서류가 아내인 자신에게 속달로 도착했을 때, 그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은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고요하고 완벽한 거실. 예원은 마른 손가락을 뻗어 밀봉된 입구를 뜯었다.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류의 제목은 예상대로 간결하고, 폭력적이었다.

[이혼 및 별거 합의서]

충격은 없었다.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으니까.

세 달 전, 재헌의 코트 깃에서 훅 끼치던 낯선 향수 냄새.

주말 자정을 넘겨 걸려 오던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예원을 투명 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재헌의 서늘하고 무관심한 눈빛.

예원은 그 모든 외도의 흔적들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더 참아내고, 이 위태로운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련했던 인내의 결과는 결국 이 서류 한 장으로 완성되어 돌아왔다.

건조한 눈으로 첫 장을 넘기던 예원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이혼'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기만적인 숫자 때문이었다.

[제1조. 양 당사자는 본 합의서 서명일로부터 180일간 별거한다. 해당 기간이 종료된 후, 어떠한 조건 없이 이혼 절차에 협조한다.]

당장 이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180일의 유예.

이유는 명백했다. 재헌은 다가오는 세림의 파트너 승진과 법무법인 조직 재편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혼 스캔들이 터진다면 흠결 없는 엘리트 변호사라는 그의 완벽한 평판에 치명타가 될 터였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아내와의 이혼마저 180일 뒤로 미뤄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마음껏 선을 넘으면서도, 대외적인 '차재헌의 아내'라는 방패는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지독한 오만함.

명치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배신감으로 인한 비참함이나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갉아먹던 막연한 불안과 고통이, 활자화된 남편의 이기심을 마주하는 순간 서늘하고 선명한 종료 의지로 바뀌고 있었다.

‘나를 180일 동안 안전한 쇼윈도로 쓰시겠다.’

미온개발 브랜드전략팀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매일 치열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예원에게, 이 서류는 더 이상 남편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었다. 철저히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작성된 비열한 계약서였다.

예원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조항들을 읽어 내려갔다.

사생활 불간섭, 주거지 분리. 철저히 재헌의 현재 외도를 보호하고 덮기 위한 조항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의 마지막 단락.

예원의 눈동자가 특정 문장에 꽂힌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재헌이 자신의 외부 교제를 별거 기간의 권리처럼 못 박기 위해 끼워 넣은, 이 합의서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만적인 조항이었다.

[제4조. 별거 기간 동안 쌍방은 서로의 사생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적으로는 아직 차재헌의 아내인 180일 동안,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오만한 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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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남편이 허락한 바람
탁자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는 지나치게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법무법인 세림]남편 차재헌이 일하는 곳이자, 그가 머지않아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대형 로펌. 예원은 봉투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남편의 직장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서류가 아내인 자신에게 속달로 도착했을 때, 그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은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뻔했다.햇살이 부서지는 고요하고 완벽한 거실. 예원은 마른 손가락을 뻗어 밀봉된 입구를 뜯었다.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류의 제목은 예상대로 간결하고, 폭력적이었다.[이혼 및 별거 합의서]충격은 없었다.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으니까.세 달 전, 재헌의 코트 깃에서 훅 끼치던 낯선 향수 냄새. 주말 자정을 넘겨 걸려 오던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예원을 투명 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재헌의 서늘하고 무관심한 눈빛.예원은 그 모든 외도의 흔적들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더 참아내고, 이 위태로운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련했던 인내의 결과는 결국 이 서류 한 장으로 완성되어 돌아왔다.건조한 눈으로 첫 장을 넘기던 예원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이혼'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기만적인 숫자 때문이었다.[제1조. 양 당사자는 본 합의서 서명일로부터 180일간 별거한다. 해당 기간이 종료된 후, 어떠한 조건 없이 이혼 절차에 협조한다.]당장 이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180일의 유예.이유는 명백했다. 재헌은 다가오는 세림의 파트너 승진과 법무법인 조직 재편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혼 스캔들이 터진다면 흠결 없는 엘리트 변호사라는 그의 완벽한 평판에 치명타가 될 터였다.그래서 그는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아내와의 이혼마저 180일 뒤로 미뤄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마음껏 선을 넘으면서도, 대외적인 '차재헌의 아내'라는 방패는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지독한 오만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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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당신도 만나고 싶으면 만나
[제4조. 별거 기간 동안 쌍방은 서로의 사생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그 문장은 폭력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예원은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얼굴로 합의서를 덮었다.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내에게까지 자유라는 이름의 조항을 내민 태도가 기가 막혔다.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단축번호 1번. 길고 건조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예원은 거실 베란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독하게 지쳐 보일 뿐이었다."어, 나야."세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된 남편의 목소리는 소름 돋도록 평온했다. 수화기 너머로는 희미한 재즈 음악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요일 밤 8시. 로펌에서 야근을 한다던 남자의 배경음치고는 지나치게 사적이고 관능적이었다.그때, 미세하게 섞여드는 낯선 기척이 예원의 고막을 찔렀다. 아주 작게 들려온, 하지만 분명한 여자의 웃음소리. 곧바로 방문이 닫히는 듯 소음이 차단되었지만 이미 충분했다."서류 받았어.""그래?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재헌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당황함도 없었다. 마치 중요한 계약서를 퀵으로 보낸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듯한 사무적인 톤이었다."확인했으면 사인해서 내 사무실로 보내. 서로 피곤하게 시간 끌 것 없잖아.""제4조."예원은 서류의 모서리를 구길 듯 쥐며 낮게 읊조렸다."사생활 불간섭, 그리고 외부 교제 제한 없음. 이게 당신이 말하는 합의야?""합리적이잖아."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예원은 하마터면 헛숨을 들이킬 뻔했다."어차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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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수정된 합의서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그러니까, 당신도 만나고 싶으면 만나. 그럴 사람이 있다면.’귓가에 맴도는 재헌의 비릿한 조소가 오히려 예원의 이성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남편의 뻔뻔한 외도 확인에 배신감으로 무너져 내릴 줄 알았지만, 슬픔이나 비참함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판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의 오만함이, 예원 안에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서늘하게 깨우고 있었다.관계를 유지하려면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된다고 믿었던 어제의 문예원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예원은 탁자 위에 놓인 합의서를 챙겨 들었다. 버려진 아내처럼 거실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다음 날 오후, 강남의 한 조용한 프라이빗 카페."차재헌, 이 미친 자식 제정신이야?"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서류가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예원의 대학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자 기업 계약과 컴플라이언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 박소경이었다. 그녀는 감정적인 위로보다는 냉철한 법률 검토로 힘이 되어주는 완벽한 실전형 아군이었다. 소경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이건 합의서가 아니라 지 불륜 보호용 면책 특권이잖아. 사생활 불간섭? 외부 교제 허용? 당장 서류 찢어버리고 유책 배우자로 소송 걸어. 내가 그 자식 가식적인 껍데기 다 벗겨줄 테니까."소경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맞은편에 앉은 예원의 얼굴은 놀랍도록 고요했다."소송으로 가면 흙탕물 싸움이 될 거고, 그 긴 시간 동안 난 계속 '차재헌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법정을 오가야 해."예원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식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또렷하게 말했다."난 그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어. 180일 뒤에 깔끔하게 이혼 도장을 찍어 준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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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스스로 걸어 들어간 함정
이틀 뒤, 세림 근처의 고급 프라이빗 라운지.건너편에 앉은 재헌은 예원이 내민 새로운 합의서를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내와 별거 조건을 조율하는 남자의 무거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의 방어적인 수정 요청을 대충 검토하는 듯한, 지루하면서도 여유로운 기색뿐이었다."제3조. 직장 및 업무에 대한 직접 개입 및 제삼자를 통한 압력 행사 금지. 제4조 2항. 쌍방 교제 상대에 대한 조사 및 접촉 금지."수정된 조항들을 소리 내어 읽어 내리던 재헌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실소가 터졌다."문예원. 당신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네. 내가 뭐 하러 당신 회사 일에 개입하고, 있지도 않은 당신 교제 상대를 뒷조사하겠어?""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예원은 차가운 찻잔을 매만지며 담담하게 대꾸했다."당신이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혹시라도 내 커리어를 흠집 내서 협상 우위를 점하려 들지, 누가 알아. 그리고 뒷조사 금지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거일 수도 있고."재헌은 피식 웃으며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로 시선을 넘겼다. 예원과 소경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이 계약의 핵심이자 완벽한 올가미가 될 단서 조항이었다.[쌍방은 별거 기간 중 발생한 상대방의 외부 교제를 이혼 협상에서 문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위 조항을 위반한 경우, 이혼 조건은 위반하지 않은 상대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다.]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재헌의 눈매가 미세하게 휘어졌다. 화를 내거나 깐깐하게 반발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예원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예원은 그의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조항들이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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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D-180, 비 내리는 바
재헌은 합의서에 서명한 날부터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말에 사람을 보내 남은 짐을 정리하겠다는 말만 남긴 채였다.재헌의 흔적이 빠져나간 거실은 낯설 만큼 넓고 고요했다. 달력에 표시된 날짜 위로 서늘한 숫자가 덧입혀졌다. D-180. 합의서에 명시된 별거 계약이 발효된 첫날이었다.예원은 텅 빈 소파에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남편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는 상실감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대신 묘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지난 몇 달간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남편의 외도 흔적을 애써 외면하고 참아내야 했던, 그 숨 막히는 일상의 무게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텅 빈 자리에 천천히 차오른 것은 서늘하고 낯선 해방감이었다.창밖으로는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청담동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프라이빗 바. 낮게 깔린 재즈 선율과 짙은 위스키 향 사이로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자, D-180일. 너의 완벽한 사생활 독립을 축하하며."소경이 앰버 컬러의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원도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잔을 맞부딪쳤다.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예원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백금 반지가 바의 간접 조명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그 기만적인 조항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편이 문서로 허락한 180일간의 자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좋다는 오만한 승인. 그러나 손가락에 옥죄듯 남아 있는 이 반지가 증명하듯, 법적으로 그녀는 아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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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울 것 같은 얼굴이라
허공에서 부딪친 시선은 기묘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적막한 바 안에는 낮게 흐르는 재즈 선율과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예원은 왼손 약지를 감싼 차가운 백금 반지를 의식하면서도, 낯선 남자의 깊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남자 쪽이었다.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텐더를 향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짙은 네이비 수트 위로 빗방울이 미세하게 맺혀 있었다.예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었다. 빈속에 연거푸 들이켠 독주 탓에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단순히 알코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처음 보는 남자의 시선 한 번에 이토록 날 선 긴장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웠다.‘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서류에 적혀 있던 남편의 기만적인 허락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80일 동안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재헌의 오만한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듯했다.하지만 막상 매력적인 낯선 남자의 시선을 받게 되자, 예원의 내면에서는 오랜 시간 학습된 기혼자로서의 경계심이 반사적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서류상으로 허락받았다 한들, 현실의 감각까지 그렇게 단숨에 뒤바뀌지는 않았다."여기, 마시던 걸로 한 잔 더 주세요."예원이 복잡한 속을 씻어내리듯 빈 잔을 밀어내며 말했다.취기가 올라 발음이 아주 미세하게 흩어졌다.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위스키 병을 집어 들려던 찰나였다."한 잔 더 마시면 꽤 취하겠는데요."낮고 묵직한 음성이 예원의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두 자리쯤 떨어져 앉아 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시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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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오늘만큼은,
"계속 울 것 같은 얼굴이라."그 담담한 한마디에 예원은 하마터면 쥐고 있던 얼음물 잔을 놓칠 뻔했다. 잔 속의 얼음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지만, 예원의 귓가에는 남자의 낮고 묵직한 음성만이 비현실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울 것 같은 얼굴.가슴 한구석을 예리한 칼끝으로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예원은 지난 석 달간 남편의 외도 흔적을 눈치채고도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운 적이 없었다. 어제 그 모욕적인 이혼 및 별거 합의서를 받아 들었을 때도, 텅 빈 집안에서 홀로 180일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오늘 아침에도 그녀의 눈물샘은 지독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슬픔보다 분노가 앞섰고, 무너지는 대신 협상자가 되기를 선택했으니까.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고작 몇 분 시선을 교차한 남자가 그녀의 그 견고한 방어막을 뚫고 들어왔다.가장 가까워야 할 남편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아니, 애써 외면했던 그 짓눌린 감정의 밑바닥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잘못 보셨네요."예원은 애써 굳어진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알코올 덕분에 달아올랐던 뺨이 오히려 서늘하게 굳어지는 느낌이었다."난 오늘 아주 홀가분한 기분이거든요.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고 온 참이라서, 우는 게 아니라 후련해서 웃고 있는 중인데."방어적인 가시가 돋친 목소리였다. 치열한 회의실에서 매일같이 변수와 싸우던 프로젝트 매니저의 방어 기제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예원의 날 선 반박에도 무안해하거나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위스키 잔을 가볍게 흔들며,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예원을 응시할 뿐이었다."다행이네요."짧은 대답이 돌아왔다."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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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편, 차재헌 맞죠?
"오늘만큼은, 스스로를 너무 숨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그 낮고 고요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은 순간, 예원은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 그것은 남편 차재헌이 합의서 한 장으로 던져주었던 기만적인 '자유'나 '허락'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차재헌의 허락이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오만한 덫이었다면, 이 낯선 남자의 한마디는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코르셋을 스스로 풀어도 좋다는 낯선 위로처럼 들렸다.지난 석 달간, 완벽한 아내이자 냉철한 프로젝트 매니저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었던가. 남편의 외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녀의 짓눌린 이면을, 몇 분 마주친 낯선 남자가 정확히 짚어냈다.어떤 대답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매끄러운 블랙 톤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바 테이블 위로 가볍게 밀어주었다. 간접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명함이었다."명함이라고 꼭 당장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남자는 예원의 눈빛에 어린 복잡한 파문을 읽은 듯,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다만, 다음에 또 비가 오는 날 혼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어지면."그는 뒷말을 아꼈다. 강요나 재촉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명함을 건내며 자신의 존재를 무리하게 밀어 넣지 않고, 언제든 예원이 거절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 주는 태도. 예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명함 위로 향했다.은색 활자로 새겨진 이름 아래, 낯선 직함이 조그맣게 보였지만 예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박힌 것은 세 글자였다.[권 시 혁]완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머릿속으로 그 세 글자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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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 사람에게 받을 게 있습니다
주말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게 지나갔다.차재헌은 합의서에 적힌 조항대로 사람을 보내 자신이 쓰던 서재의 짐과 옷가지들을 모두 빼내 갔다. 텅 빈 옷장과 절반이 비어버린 신발장. 그 물리적인 공백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정말로 유예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서늘하게 증명하고 있었다.일요일 늦은 밤. 예원은 거실 테이블에 홀로 앉아 매끄러운 블랙 톤의 종이 한 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권 시 혁]청담동의 프라이빗 바에서 마주쳤던 낯선 남자의 명함이었다.'남편, 차재헌 맞죠?'그가 빗기를 머금은 깊은 눈동자로 던졌던 마지막 질문이 주말 내내 예원의 귓가를 맴돌았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완벽한 타인인 줄 알았던 남자가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남편의 존재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처음에는 차재헌이 고용한 사설탐정이나 뒷조사 인력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그 가설은 폐기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 재헌이, 고작 180일 계약의 위반 꼬투리를 잡기 위해 그렇게 허술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사람을 보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바에서 마주했던 권시혁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보였을 긴장이나 계산적인 흔적이 없었다.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차재헌이라는 남자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얽혀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아내인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낸 사람.예원은 명함의 모서리를 매만지던 손가락을 멈췄다.과거의 문예원이라면 이 불확실한 상황 앞에서 불안해하며 상대의 다음 수를 기다렸을 것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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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우연의 만남
"그 사람에게 받을 게 있습니다."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권시혁의 음성은 서늘하고 묵직했다. 예원은 거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굳은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빨라졌지만, 그녀의 이성은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받을 게 있다고요."예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그 말을 곱씹었다."돈이나 위자료 같은 평범한 단어로는 들리지 않네요. 차재헌이 당신에게 뭘 빼앗기라도 했나요?""내 가족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입니다."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예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가족이 잃어버린 것. 단어가 품고 있는 묵직한 이면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순히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에서 벌어질 법한 수임료 분쟁이나 사소한 마찰이 아니었다."7년 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시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구구절절한 감정적 호소는 배제된, 철저히 사실만을 전달하려는 듯한 건조한 어투였다."문제가 터졌을 때 누군가는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은 내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짧은 침묵이 통화선을 타고 흘렀다. 그 건조한 요약 안에서도, 그가 짊어져 온 시간의 무게가 예원의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차재헌은요. 그 일에 내 남편이 어떻게 개입된 거죠?"예원의 질문에 시혁의 대답이 지체 없이 이어졌다."차재헌은 당시 그 사건과 관련된 문서에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 서명이 사건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죠."퍼즐이 맞춰지는 소리가 예원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세림의 엘리트 변호사로 탄탄대로를 걸어온 차재헌. 그의 화려한 경력과 완벽한 평판 밑바닥에 이런 과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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