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외도한 남편 차재헌은 이혼을 180일 미루는 대신 서로의 외부 교제를 허락한다. 하지만 문예원이 건축가 권시혁을 진짜 사랑하게 되자, 가장 먼저 무너진 건 자유를 제안한 남편이었다. 아직 법적으로 부부인 채 남은 180일, 허락됐지만 금지된 사랑이 시작된다.
View More탁자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는 지나치게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법무법인 세림]
남편 차재헌이 일하는 곳이자, 그가 머지않아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대형 로펌.
예원은 봉투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남편의 직장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서류가 아내인 자신에게 속달로 도착했을 때, 그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은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고요하고 완벽한 거실. 예원은 마른 손가락을 뻗어 밀봉된 입구를 뜯었다.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류의 제목은 예상대로 간결하고, 폭력적이었다.[이혼 및 별거 합의서]
충격은 없었다.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으니까.
세 달 전, 재헌의 코트 깃에서 훅 끼치던 낯선 향수 냄새.
주말 자정을 넘겨 걸려 오던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예원을 투명 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재헌의 서늘하고 무관심한 눈빛.예원은 그 모든 외도의 흔적들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더 참아내고, 이 위태로운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련했던 인내의 결과는 결국 이 서류 한 장으로 완성되어 돌아왔다.건조한 눈으로 첫 장을 넘기던 예원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이혼'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기만적인 숫자 때문이었다.[제1조. 양 당사자는 본 합의서 서명일로부터 180일간 별거한다. 해당 기간이 종료된 후, 어떠한 조건 없이 이혼 절차에 협조한다.]
당장 이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180일의 유예.
이유는 명백했다. 재헌은 다가오는 세림의 파트너 승진과 법무법인 조직 재편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혼 스캔들이 터진다면 흠결 없는 엘리트 변호사라는 그의 완벽한 평판에 치명타가 될 터였다.그래서 그는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아내와의 이혼마저 180일 뒤로 미뤄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마음껏 선을 넘으면서도, 대외적인 '차재헌의 아내'라는 방패는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지독한 오만함.명치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배신감으로 인한 비참함이나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갉아먹던 막연한 불안과 고통이, 활자화된 남편의 이기심을 마주하는 순간 서늘하고 선명한 종료 의지로 바뀌고 있었다.‘나를 180일 동안 안전한 쇼윈도로 쓰시겠다.’
미온개발 브랜드전략팀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매일 치열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예원에게, 이 서류는 더 이상 남편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었다. 철저히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작성된 비열한 계약서였다.
예원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조항들을 읽어 내려갔다.
사생활 불간섭, 주거지 분리. 철저히 재헌의 현재 외도를 보호하고 덮기 위한 조항들이 줄을 이었다.그리고 첫 페이지의 마지막 단락.
예원의 눈동자가 특정 문장에 꽂힌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재헌이 자신의 외부 교제를 별거 기간의 권리처럼 못 박기 위해 끼워 넣은, 이 합의서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만적인 조항이었다.
[제4조. 별거 기간 동안 쌍방은 서로의 사생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적으로는 아직 차재헌의 아내인 180일 동안,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오만한 허락이었다.다음 날 오후, 미온개발 본사.오전 내내 밀려 있던 루센 프로젝트 관련 부서 회의를 마친 예원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모니터 옆에 올려둔 휴대전화의 화면이 밝아지며 진동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차재헌]어젯밤 통화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뜬 이름이었다.예원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가만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내 일정 보고할 의무 없어."라고 선을 긋고 끊어냈던 어제의 통화가 떠올랐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그녀는 일정을 방어했다는 사실에 굳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되새기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손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어."— "바빠?"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화가 났다거나 어제의 통화를 따져 묻기 위해 벼르고 있는 어조가 아니었다."아니, 회의 끝나고 서류 정리하는 중이야."— "어제, 루센 현장에 늦게까지 있었다며."예원의 서류를 넘기던 손끝이 아주 잠시 멈췄다.어제 위치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건만, 재헌은 이미 사실의 일부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쩌다 루센 쪽 얘기가 나와서 들었어.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예원에게는 재헌이 정보의 출처를 대수롭지 않게 뭉뚱그려 넘기려는 것처럼 들렸다.그의 말대로 출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예원은 목소리의 높낮이를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랬어. 프로젝트 관련해서 현장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사실을 부인하거나 핑계를 댈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예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주 짧고 미묘한 뜸 들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비좁은 자재 샘플실 안을 가르며 날카로운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예원의 시선이 손에 들린 휴대전화 액정 위로 떨어졌다.화면 위에서 점멸하고 있는 세 글자, [차재헌].불과 몇 초 전까지 권시혁의 체온이 닿았던 손끝의 낯선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도한 이름이었다.예원은 발신자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다른 남자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은 죄책감이나 당혹감은 아니었다.그저 묘한 타이밍이었다.조금 전까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믿었던 법적 남편이라는 현실이, 이 작은 기기 하나를 통해 너무도 쉽고 당연하게 자신의 사적인 시공간으로 틈입해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시혁은 예원의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누구냐고 캐묻지 않았다.그는 들고 있던 마감재 샘플 보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예원에게는 그 짧은 움직임이 자신이 통화할 공간을 남겨주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원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디야?"인사조차 생략된,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질문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다급한 용무가 있거나 화가 잔뜩 난 음성이 아니었다.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내의 위치를 묻는 것에 어떤 거리낌도 없는 평온한 어조였다.과거의 문예원이라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루센 현장이야.'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누구와 같이 있어.'남편이 자신의 행방을 묻는 데에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 그가 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만 하는지 단 한 번도 반문해 본 적이 없었다.부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 오래된 습관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왔으니까.질문을 받
루센 현장 실사가 마무리되고 며칠 뒤.예원과 시혁은 현장 사무실 뒤편에 마련된 작은 자재 샘플실에 들어와 있었다.벽면 양쪽으로 마감재 샘플 보드와 사인물, 각종 자재 박스가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탓에, 통로는 성인 한 명 반 정도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비좁았다.적어도 예원은 그 비좁은 거리를 처음부터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며칠 전 사적인 저녁 식사 이후 시혁을 향한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고, 현장에서 그의 판단을 묵직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예원은 선반 위를 훑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제 요청한 메인 라운지 미디어 월 마감 샘플이 이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텍스처를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A구역 선반 쪽에 있을 겁니다."시혁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 두 사람은 도면과 자재 리스트를 대조하며 비좁은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 저기 있네요."예원의 시선이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짙은 회색의 샘플 보드에 멎었다.그녀가 까치발을 들며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도면을 확인하던 시혁 역시 예원이 찾던 것과 같은 샘플 보드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가죽 장정된 두꺼운 보드 모서리 위로,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아니, 정확히는 얽히거나 겹쳐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찰나, 두 사람의 손끝이 가볍게 스치듯 닿았을 뿐이었다.예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닿은 건 정말이지 손끝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찰나에 닿은 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선명했다.늘 서늘하고 이성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권시혁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체온을 가진 한 '남자'로 감각되는 낯설고 강렬한 순간이었다.당황한 예원
날카로운 기계음과 둔탁한 파열음이 뒤섞인 루센 프로젝트 시공 현장.임시 가림막 너머로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 예원은 안전모의 턱끈을 단단히 조이며 발걸음을 옮겼다.며칠 전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채우고 있던 고요하고 따스한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두 사람은 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완벽하게 사적인 온도를 지워내고, 미온개발의 총괄 PM과 아크온의 대표 건축가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며칠 전의 편안했던 분위기를 핑계로 친밀한 농담을 건네거나 사적인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다.예원 역시 그를 '며칠 전 저녁을 함께 먹은 남자'가 아니라 현장을 책임지는 파트너로만 상대했다."문 PM님, 2층 메인 라운지 진입 구간 실측 결과입니다."현장 소장이 태블릿 화면을 띄우며 보고를 시작했다."도면상 설계된 대로 진입로 폭 2.5미터 정확하게 확보했습니다. 법적 소방 기준이나 통행 규격에도 전혀 문제없습니다."예원은 소장이 건넨 태블릿의 수치와, 바닥에 임시로 그어진 붉은색 마스킹 테이프의 간격을 번갈아 확인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오차가 없었다. 하지만 마스킹 테이프가 그어진 실제 공간 안에 직접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예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소장님. 도면상 폭이 확보됐다는 것과, 실제로 사람이 쾌적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예? 하지만 기준치에 완벽하게 맞춘 건데……."예원은 현장 바닥의 한 지점을 안전화 끝으로 가리켰다."이곳은 루센의 메인 라운지로 들어가는 핵심 진입로입니다. 주말 피크 시간대 대기 인원의 동선과, 내부 F&B 매장을 오가는 대형 서비스 카트의 동선이 정확히 이곳에서 교차합니다."예원의 시선이 도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게다가 이쪽 벽면에 예정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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