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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화

Author: 금소
민하윤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고 달아오른 볼은 만져 보기만 해도 뜨거울 것 같았다.

임형섭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휴대폰으로 대리운전을 예약했다. 그리고 지갑에서 지폐 5만 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민하윤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목울대가 한 번 굴렀고 임형섭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하윤아, 이제 집에 가자. 걸을 수 있어?”

민하윤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임형섭을 올려다보다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임형섭은 몇 초 망설이다가 민하윤의 앞에 등을 내밀며 다시 쪼그려 앉았다.

“그래. 그러면... 업혀. 내가 업어 줄게.”

임형섭은 숨을 죽였다. 민하윤의 가늘고 긴 팔이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너무 말라서, 등에 닿는 무게감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민하윤의 몸이 임형섭의 등에 바짝 붙었다. 희고 가는 손목뼈가 그의 가슴 앞쪽으로 축 늘어졌다. 미지근한 매실주 향과 민하윤의 몸에서 은근히 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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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92화

    임형섭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하 대표님은 다른 여자랑 약속 잡아도 되고, 우리는 오래된 친구끼리 얼굴 한번 보는 것도 안 됩니까?”하도진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어이없다는 듯 비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말로 저를 자극하지 마세요. 임 팀장님, 굳이 다시 말해 줘야 하나요? 민하윤은 제 아내입니다. 남의 아내한테 마음 품을 생각이라도 하는 거예요?”룸 안쪽에서는 주사위 굴리고 술을 들이붓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졌다.“누나, 왜 안 마셔요! 자, 원샷! 원샷!”임형섭은 술기운이 오른 듯, 뿌옇게 김 서린 유리창을 노려보며 마음이 뒤집힌 채로 내뱉었다.“하 대표님은 본인 주변의 여자부터 정리하시죠. 본인은 감정에도 결혼에도 불성실하면서... 왜 하윤이한테만 선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건가요? 하윤이가 원한하면 저는 언제든지 하윤이를 데려가겠습니다.”“데려간다고요?”하도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는 동안, 미세한 전류음이 섞인 듯한 통화 너머로 남자의 낮은 웃음이 흘렀다.“그런 허튼 꿈부터 접어요. 제가 죽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안 떨어져요.”임형섭은 입을 열어 반박하려다, 그대로 끊겨 버린 통화음에 말끝을 삼켰다.휴대폰에 주소 메시지가 떴다. 임형섭은 그 주소를 그대로 대리기사에게 읊어 주었다.차는 서서히 도심의 흐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임형섭은 창에 기댄 채, 가로등 불빛과 붉은 테일 라이트의 흐릿한 잔상을 바라봤다.터널 안은 밝았다가 어둡기를 반복했다. 임형섭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유리에 비친 그 얼굴만 응시했다.민하윤의 살짝 올라간 눈꼬리, 요염한 선이 도는 얼굴, 가늘게 휘어진 눈썹, 오뚝한 콧날,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이 보였다.뒷좌석에서 웅크린 민하윤은 잠든 숨결에 맞춰 살짝 들썩였다.임형섭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길고 선명한 마디가 유리 위의 잔상을 떨리는 듯 어루만졌다.임형섭의 손끝이 민하윤의 눈썹과 눈매를 따라가다 멈췄다. 임형섭은 창에 이마를 기댄 채, 터널을 빠져나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91화

    민하윤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고 달아오른 볼은 만져 보기만 해도 뜨거울 것 같았다.임형섭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휴대폰으로 대리운전을 예약했다. 그리고 지갑에서 지폐 5만 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민하윤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목울대가 한 번 굴렀고 임형섭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하윤아, 이제 집에 가자. 걸을 수 있어?”민하윤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임형섭을 올려다보다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임형섭은 몇 초 망설이다가 민하윤의 앞에 등을 내밀며 다시 쪼그려 앉았다.“그래. 그러면... 업혀. 내가 업어 줄게.”임형섭은 숨을 죽였다. 민하윤의 가늘고 긴 팔이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너무 말라서, 등에 닿는 무게감조차 선명하지 않았다.민하윤의 몸이 임형섭의 등에 바짝 붙었다. 희고 가는 손목뼈가 그의 가슴 앞쪽으로 축 늘어졌다. 미지근한 매실주 향과 민하윤의 몸에서 은근히 스며 나오는 차가운 향기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임형섭은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틀고, 등을 더 곧게 세우며 민하윤이 편하도록 자세를 가다듬었다.임형섭은 민하윤의 가방을 자기 목에 걸어 멘 채, 단단히 업고 골목을 걸었다. 따뜻한 숨결이 일정한 리듬으로 임형섭의 목덜미에 닿았다.임형섭은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절대 이 틈을 이용할 수 없었다. 민하윤을 향한 마음은 언제나 존중이 먼저였다.임형섭은 민하윤을 조심스럽게 차 뒷좌석에 옮겨 눕혔다. 민하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 긴 머리칼이 흐트러져 퍼져 있었고, 눈꼬리에는 눈물에 젖은 잔머리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임형섭은 무심코 그 잔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손을 허공에서 멈췄다. 대신 두툼한 코트를 민하윤의 몸 위에 덮어 주고 히터를 틀었다.문을 닫고 나오자, 초봄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숨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임형섭은 시선을 골목 안쪽 테이블로 보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90화

    잘게 박힌 다이아가 큰 별 하나, 작은 별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팔찌 끝에는 잔 다이아로 만든 작은 알파벳 하나가 달려 있었다.H.민하윤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손끝이 저절로 그 글자를 몇 번이고 더듬었다.H는 민하윤이 예전에 쓰던 이름, 양부모가 지어 준 이름의 표식이었다.[희].희망의 ‘희’자였다.“생일 축하해, 희야.”임형섭이 직접 팔찌를 채워 줬다.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 제작이었다. 마디가 또렷한 임형섭의 길고 단단한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끝의 얇은 굳은살이 민하윤의 손목뼈를 스치고 지나갔다.민하윤은 코끝을 세게 훌쩍였다. 울음은 죽어도 들키기 싫어서, 입술을 꾹 깨문 채 오른손을 들어 수어로 답했다.[고마워요.]대학 시절, 민하윤은 아르바이트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하루에 두 탕을 뛰던 날도 많았고, 한때는 수제 만둣집에서 점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가게 사장은 서른쯤의 언니였다. 이혼하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도 마음이 참 따뜻해서, 매일 밤이면 뜨끈한 만둣국 한 그릇을 따로 싸서 기숙사에 가져가라고 건네주고는 했다.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이제 민하윤은 그때처럼 쪼들리며 살지 않았다. 매일 뛰어다니며 지하철을 환승하고, 알바를 붙잡고 살지 않아도 됐다.그런데도 민하윤의 발은 익숙한 골목으로 자연스레 들어섰다. 갖가지 길거리 음식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가게 앞에는 이미 네모난 테이블들이 몇 개 놓여 있었고, 근처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떠들어 댔다.간판이 눈에 들어왔다.[언니 수제 만두]민하윤은 익숙한 글자와, 바뀐 인테리어를 멍하니 바라보며 복잡한 숨을 삼켰다.열일곱 이후의 삶은 유난히 힘들었다. 남의 집에 얹혀살며, 그 집 사람이 아닌 공간에서 버텼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손을 벌려야만 하는 생활이었다.땅값도 물가도 미쳐 날뛰는 명원시에서 송해정은 민하윤에게 한 달에 10만 원만 쥐여 줬다. 그 돈으로 교통비, 통학비, 식당 밥값, 교과서까지 모든 걸 해결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89화

    주민혁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비웃었다. 손을 들어 재단부터 남다른 셔츠 소매로 입가의 피를 쓱 닦아냈다.“왜? 내가 고은율을 좋아한다고 형이 열받은 거야? 나 사람 잘못 안 봤네. 형은 고은율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아끼잖아.”백누리는 그들의 대화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건장한 남자들에게 가로막혀 있는 임형섭을 발견하자 곧바로 민하윤을 그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하도진의 얼굴은 끝까지 냉담했다. 임형섭이 휘청이는 민하윤을 손 뻗어 받쳐 드는 걸 똑똑히 보면서도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았다.“다들 네가 아내를 맞았다고는 하는데 나만 알지.”주민혁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잇새에 피가 가득 묻어 그 웃음이 섬뜩하기까지 했다.“형이 사랑하는 건 고은율이야. 내가 진작 알아야 했는데... 형은 고은율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잖아.”하도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그래서. 어쩌라고.”하도진은 정말 부정하지 않았다.민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는 바람에 임형섭의 정장 자락이 구겨졌다.주민혁은 몸을 비틀며 구질구질하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감각 없는 왼쪽 종아리를 질질 끌며 눈빛을 시퍼렇게 세운 채,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형이 고은율을 아낄수록... 난 더 부숴버리고 싶어지거든.”하도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 증오로 들끓는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기에게도 약점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더더욱 민하윤에게 단 한 치의 관심도 드러낼 수 없었다. 주민혁 같은 미친놈이 아주 작은 틈새도 놓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아직도 거기 서 있을 거예요?”하도진이 고개를 돌려 백누리를 보며 툭 말을 던졌다. 민하윤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백누리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민하윤의 손목을 잡아끌고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주민혁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다른 계산이 스쳤다.하도진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88화

    주민혁은 피를 한 번 토해냈다. 회색 실크 셔츠는 바닥에 쓸린 탓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너덜너덜했다. 그는 비웃듯 웃으며 퉁퉁 부은 얼굴로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여자를 힐끔 올려다봤다.“하도진, 이제 숨길 수가 없나 보네? 내가 네가 아끼는 사람을 건드렸어? 대체 누군데? 어느 여자야?”주민혁의 음산한 시선이 입은 열지 못하지만 방금까지 그의 욕망을 들끓게 했던 여자에게 곧게 박혔다.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이며 도발적인 시선으로 매혹적인 여자에게로 옮겼다.“얘? 아니면... 쟤야?”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원수 정도가 아니었다. 원한이 엉겨 붙은 사적인 복수에 가까웠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하도진은 말없이 손등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거칠게 숨을 골랐다. 검은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번뜩였지만 일부러 엉뚱하게 받아쳤다.“주민혁, 여자한테 손대는 게 사내가 할 짓이야?”‘여자?’주민혁은 눈을 굴렸다. 아까부터 날을 세우던 그 말재주가 센 여자를 위아래로 훑더니, 피섞인 침을 퉤 뱉으며 비웃었다.“뭐야, 고은율로도 만족이 안 돼서 밖에 다른 애인까지 둔 거야? 난 그냥 한 번 밀었을 뿐인데, 아직 뭘 어쩌지도 않았거든. 그런데도 형이 이렇게 미친 듯이 발작하네. 설마... 저게 내가 한 번도 못 본 형수님인가? 그럼 나야 제대로 인사해야지.”하도진은 일부러 해명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민하윤 옆에 선 여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친 데 없어요?”백누리는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하도진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몇 배는 더 거대해졌다.‘저 사람이 늘 여자에게 관심 없다는 그 차가운 대사가 맞아? 이렇게 다정할 수도 있어?’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뻔한 장면인데 이상하게 하나도 촌스럽지 않았다.백누리는 감격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하 대표님, 저는 괜찮아요.”그러다 백누리는 민하윤의 손을 꽉 잡고는 표정을 확 바꿨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287화

    주민혁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을 들어 백누리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말재주가 꽤 대단한데? 입이 아주 야무지네.”눈앞의 주민혁은 완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큰 병을 앓고 막 회복한 사람처럼 피부는 창백했고, 핏기 하나 없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독사 같은 시선이 백누리 뒤편의 민하윤을 집요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마치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했다.백누리는 얼굴을 홱 돌렸다. 더는 이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민하윤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대화가 안 통하네요. 그럼 신고해서 처리하죠.”그러자 주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한발 물러서며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두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오히려 기대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좋아. 어디 네가 어떤 경찰을 불러서 날 체포하게 만들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에게 하나둘씩 밖으로 안내되며 흩어졌다. 백누리는 눈앞의 오만한 주민혁을 보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주민혁은 백누리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고 곧바로 민하윤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느다란 뼈가 손바닥에 박힐 만큼 얇아 오히려 그의 손이 아플 정도였다. 주민혁은 일부러 민하윤의 목덜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차갑고도 달큼한 향이었다. 이름 모를 차가운 나무 향에, 은근히 따뜻한 오렌지 블로섬이 섞인 듯한 냄새였다. 주민혁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장난치듯 목가에 더 가까이 붙어, 다시 한번 길게 들이켰다.민하윤은 공포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필사적으로 뒤로 빠지려 했지만, 손목이 단단히 잡힌 탓에 꼼짝도 못 했다. 흰 셔츠 너머로 스치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에 숨이 턱 막혔다.“뭘 그렇게 무서워해? 내가 누군지 알면 날 따라온 걸 후회 못 할 텐데.”주민혁은 민하윤이 겁에 질린 모습을 즐기듯, 달래는 척 낮은 목소리로 귓가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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