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평은 피투성이가 된 입으로 왁왁 소리를 질렀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0년을 전태평과 부부로 살아온 양시은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양시은에게 그가 불륜을 저지른 증거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불륜 이슈는 기껏해야 강등이나 정직이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여전히 다시 정치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불륜이라는 오점이 생겼으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긴 힘들 것이다. 양시은은 뻔한 전태평의 꿍꿍이에 피식 냉소를 흘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고작 바람을 피운 영상 하나만 재생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전태평의 머리를 끄집은 채로 그의 얼굴을 스크린 가까이 가져갔다. “똑바로 봐. 넌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을 꾼 거야. 이젠 네 과거와 인사할 시간이야.”전태평은 그제야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살빛으로 물들었던 영상과 사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 재생되고 있는 것은 양시은이 몇 개월의 시간을 이용해 모은 그동안 전태평이 받은 뇌물과 프로젝트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였다. 이 정도 증거면 파직은 물론 교도소에서 남은 삶을 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쉽게 보지 못할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댔다. 역시 가족이 터뜨린 것만큼 흥미진진한 스캔들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전태평은 드디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눈빛을 한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경호원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을 것이다. 콩깍지가 벗겨진 양시은의 눈에 전태평은 그저 멍청하고 추악할 뿐만 아니라 겁도 많은 못난 인간에 불과했다. 신미정은 양시은이 딸 결혼식에 불륜 스캔들을 터뜨리며 미친 짓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태평을 망치면 자기는 뭐가 좋다고. 정말 멍청하긴.’하지만 신미정은 이제
“그 여자는 돈을 받고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계속 제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았더라고요. 제가 준 200억은 두 사람이 집을 사고 그 혼외 자식을 기르는 밑거름이 되었던 거예요. 더 어이없는 건 제 남편과 그 불륜녀가 자기 아들 생일 파티를 해줄 때마다 신미정 씨는 매년 선물을 보냈다는 거예요.”“제 남편은 멍청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그 인간 머리로는 제 돈을 뜯어내려고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건 전부 신미정 씨 그 똑똑한 머리를 잘 굴려 그 인간들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주신 덕분이었죠. 그래서 저 같은 멍청이가 그 인간 혼외 자식을 기를 자금을 마련해 준 거고요.”“전 신미정을 씨를 제일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신미정 씨도 절 너무 아끼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제 남편이 바람피운 증거를 감춰 제가 그 멍청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며 헌신하게 했죠.”“그런 건 다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인맥을 쌓기 위해 내 딸은 불구덩이에 집어넣진 말어야 했어요.”양시은은 말하며 신미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당신도 딸이 있잖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굴 수 있어!”말을 잇던 양시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깜빡했네. 당신 딸도 당신 눈엔 그다지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지. 본인이 며느리를 다치게 하고는 그걸 딸에게 누명을 씌웠잖아. 신미정 씨, 정말 비상계단에 CCTV가 없다고 생각해?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 계속 사모님 행세를 하고 싶었어. 꿈 깨는 게 좋을 거야.”양시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영상은 CCTV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비상계단에서 신미정은 기름통을 들고 계단 하나하나 기름을 바르고 있었다.또 다른 화면 역시 비상계단이었다. 강민서는 그녀가 말한 대로 봉투를 들고 비상계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를 받은 강민서는 그제야 비상계단을 나섰다. 그 영상에 현장에 있던 하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잔뜩 흥분한 차미주가 말했다. “양시은 씨 완전 나이스 샷. 어쩐지 이런 5성급 호텔
멈칫한 강민서가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강민서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전부 어머니 자업자득이야. 누구도 도울 수 없어.”누가 뭐라고 하든 강민서는 신미정 손에서 자란 아이였다. 한때는 신미정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딸이었다. 비록 오늘 신미정이 한현진을 해친 죄를 강민서에게 뒤집어씌웠지만 강민서는 그럼에도 신미정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강민서는 강한서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해 보고 싶었다. 죗값을 치를 땐 치르더라도 사적으로 해결할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민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성우가 말했다. “민서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 생각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일어나서 아주머니를 도우면 너희 집안도 이 일에 연루되는 거야. 설사 나중에 너희 집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도 그사이 겪게 될 여론의 풍파는 절대 가볍지 않을 거야.”한성우의 말에 강민서가 망설였다. 차미주도 옆에서 거들었다. “인간이 왜 그래요? 왜 따뜻하게 굴어야 할 땐 모질게 굴고, 독해져야 할 땐 성모 마리아라도 되는 듯 구는 거예요? 아까 저 여자가 죄를 뒤집어씌운 거로는 부족했어요? 정말 감옥에라도 처넣었어야 정신 차릴 거예요?”너무 직설적인 차미주의 말에 강민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위를 둘러본 강민서는 누구도 나서서 신미정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미정은 사모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인기와 명성은 별개였다. 다들 신미정을 떠받드는 건 그녀가 일 처리가 빠르고 인지상정이 바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가 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신미정과 티타임을 즐기던 사람 중 다만 어떤 한 가지라도 신미정보다 나은 부분이 있는 사람은 그녀에게 은근히 눈치를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줄곧 안하무인에 콧대 높게 지내온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신미정이 불효자식이라며 강민서를 욕하려는데 양시은이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전태평 개 같은 자식! 내가 몇 년 동안 뒷바라지하며 길을 닦아주지 않았다면 그 멍청한 머리로 오늘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 같아?”“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야.”양시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수십 년을 데리고 있은 당신보다 손주며느리인 한현진 씨를 더 신뢰하시는 건 그분은 진작 당신이 돈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아무짝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걸 아셨기 때문이야. 그런 당신이 강씨 가문을 손에 넣고 안주인이 되고 싶다고? 꿈 깨!”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강민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빠, 나 화장실 다녀올게.”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도착했겠지?’바로 그때,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단상에서 벌어지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드디어 일단락되었다. 경찰은 다가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경찰을 본 신미정은 구세주라도 본 듯 양시은에게서 떨어지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경찰에게 양시은의 행위는 고의 상해라며 고소할 것이니 당장 잡아가라며 소리 질렀다. “고의 상해?”양시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린 분명 쌍방 폭행이야.”말하며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려 방금 신미정에 의해 긁힌 팔뚝의 상처를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형사님, 철저하게 조사해 주세요.”신미정이 버럭 화를 냈다. “이 미친 X이. 네가 먼저 때렸잖아.”양시은이 또 손을 올리려 하자 순간 놀란 신미정이 얼른 경찰 뒤로 몸을 숨겼다. 평소의 재벌 사모님다운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이 두 사람을 막으며 말했다. “저희 앞에서 손을 싸우려고 하시다니, 간도 크시네요.”제일 앞에 서 있던 경찰이 현장을 쓱 살피더니 생각했다. ‘어쩐지 신고자가 몇 명 데리고 출동하라고 하더라니. 현장이 이 지경이니 평소처럼 출동했다면 두 명으로는 어림도 없었겠네.’두 명의 젊은 경찰은 현장 질서를 유지하며 사건과 무관
신미정을 제압해 연행하려는데 검사가 걸어들어왔다. 현장으로 들어오는 검사를 보며 경찰들도 순간 멍해졌다. ‘새해부터 사건을 뺏으려는 거야?’검사와 얘기를 나눈 형사는 그제야 그들은 전태평의 일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틀 전, 양시은은 이미 전태평의 뇌물수수와 관련한 범죄 증거를 검찰에 제출했었다. 이틀 사이 검찰에서는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전태평의 사건에 매달렸다. 양시은이 제출한 증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검찰은 바로 전태평을 체포했다. 검사를 본 전태평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이 두려움에 떨었다. 겁에 질려 꼬리를 바싹 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멍청이는 다리가 떨려 제대로 걷지도 못해 검사와 그의 동료 두 명이 그를 둘러업고 조사실로 향했다. 양시은 곁을 지나치던 전태평은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시은아, 여보. 여보 살려줘. 나 감옥 못 가. 어머니 연세도 있으시고 고은이도 이제 막 대학 들어갔잖아. 내가 감옥에 가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 전부 그 여자가 날 유혹한 탓이야. 그 여자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은아, 시은아 나 좀 도와줘. 내가 앞으론 뭐든 네 말만 들을게. 시은아, 제발 부탁이야...”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 비서 실장으로 승진해 의기양양하던 사람이 이젠 양시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말의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시은은 그 누구보다 평온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진면모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양시은은 콩깍지를 벗고 현실을 직시했다. 전태평이 불륜을 저지르고도 양시은과 이혼하지 않은 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당시 그의 처지에 양시은은 최선책이었을 뿐이었다. 내조를 잘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외조에도 애썼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질 땐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양시은을 버릴 생각이었다. 장씨 가문에서 정
멈칫, 행동을 멈췄던 차미주가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주 변호사님, 오셨어요?”한현진은 한입 베어 물던 사과를 한성우에게 던져 버리고는 얼른 다시 침대에 누워 허약한 척 연기했다. 그 모습에 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연기력은 정말 흠잡을 데 없네.’그는 사과는 접시 위에 올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강운아, 안 갔어?”주강운이 걸어들어오며 침대에 누워 병약한 모습의 한현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 씨 좀 보려고 왔어. 너희는 왜 현진 씨를 병원으로 모시지 않는 거야?”?“우리가 안 데려가는 게 아니라 여정 씨가 큰 문제는 없다고 해서 일단 지켜보는 중이야.”주강운은 말없이 침대맡으로 걸어가 나지막이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 씨, 다친 덴 좀 어때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여정 씨가 그저 찰과상이라고 했어요. 집에서 쉬면서 상처에 물 안 들어가게 조심하면 된대요. 너무 걱정되면 내일 가서 감사받으면 돼요.”잠시 말을 멈춘 한현진이 더 그럴듯하게 거짓말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마침 내일 한서가 재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라 같이 가면 돼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안 가려고요.”주강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머리와 다리에 감긴 붕대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한현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 변호사님, 여정 씨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주강운이 입술을 짓이겼다. 한 번 구겨진 그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걸까요? 현진 씨를 다치게 한 거로도 부족해 민서까지. 대체 동기가 뭐였을까요?”“그거야 당연히—”격분한 차미주가 막 입을 열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주었고 곧 그녀의 입에서는 돼지 멱 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미주는 빨개진 얼굴로 한성우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개자식, 이게 무슨 변태 같은 짓이야!”한성우가 무심하게 바지의 먼지를
한현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하네.’뚜벅뚜벅 걸어온 강한서는 주강운과 한현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는 시선을 내려 주강운 손에 들린 부적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부적을 가져갔다. 강한서는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영험한 부적이면 나중에 너도 인연을 만나게 해주는 부적 좀 써.”멈칫한 주강운이 고개를 들어 강한서와 시선을 맞췄다. 차미주는 한성우 품에 기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뭐 아주 아수라장이네. 이러다 싸우진 않겠지?’그녀는 강한서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은 싸우는 건 젊은 친구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강한서는 초등학생처럼 싸우는 것보다 더 유치한 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역시나 강한서는 손이 미끄러졌다. 그의 손에 있었던 부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테이블에 놓였던 컵으로 떨어져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깜짝 놀라던 강한서는 얼른 손을 넣어 부적을 주우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부적을 물속에 더 깊이 담가버렸다. 그가 컵에서 꺼냈을 때 부적은 진작 물에 잔뜩 젖어 있었고 종이에 그려진 문양도 전부 번져버렸다.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부적이 물에 젖었는데 계속 평안을 지켜줄 수 있는 거야?”주먹을 꽉 움켜쥔 주강운이 부적을 몇 초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신사에서는 일 년에 한 번만 치성드릴 수 있어. 많은 것을 빌면 효험이 없거든. 현진 씨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루어졌잖아. 그리고 난 현진 씨의 평안을 바라는 부적을 가져왔으니 올해는 다른 부적은 받을 수 없어.”강한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흥분한 차미주가 한성우의 옷깃을 꽉 잡았다. ‘강한서를 앞에 두고 현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다니. 세상에. 너무 자극적인 스토리잖아.’한현진은 강한서 손에 들린 부적을 가져오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이 부적도 미리
‘그걸 깜빡했네.’보아하니 불 난 집에 부채질하러 가긴 그른 것 같았다. 아쉬워하던 한현진은 곧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혹시 무죄로 석방되는 거야?”강한서는 한현진을 쳐다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 “호텔에서 방금 그 기름을 청소하던 직원분이 넘어져서 다치셨대요.”한현진이 멈칫했다. “직원이... 넘어져서 다쳤다고?”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CCTV라도 보여줘요?”한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그냥 해본 얘기야.”강한서는 한현진이 손에 꼭 쥐고 있는 부적을 슬쩍 보더니 입술을 짓이겼다. “제 목에 물이 묻었어요.”그 말을 들은 한현진이 얼른 그의 목을 안고 있던 손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강한서가 또 입을 열었다. “손을 바꿔서 다른 쪽에도 똑같이 물을 묻히려고 그러는 거예요?”“...”“제 주머니에 넣어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네 주머니도 젖잖아.”강한서가 말했다. “두꺼운 거 입어서 괜찮아요.”지극히 평온한 말투였다. 마치 그저 하는 말인 듯,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순히 불편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유치하게 굴었으니 또 질투하진 않겠지.’그렇게 생각한 한현진은 강한서의 말대로 부적을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차에 올라탄 강한서는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하자 한현진이 물었다. “네 동생도 데리고 갈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민 실장이 데려다줄 거예요.”“그럼 민 실장님께 우리도 데려가라고 하지, 왜 기사님까지 따로 불렀어?”강한서가 말했다. “불편해서요.”“불편할 게 뭐가 있어. 민 실장님이 우리를 처음 데리러 오는 것도 아니고.”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말했다. “민 실장은 아마 본인이 연애하는 모습을 자기 대표가 옆에 앉아 지켜보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거예요.”한현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격적인 소식에 눈을 끔뻑거리던 한현진이 입술을 달싹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