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열의 몸매는 카메라에 완벽에 가깝게 비춰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팬들이 눈호강하겠네.’그런 생각을 하던 신하리는 가져온 담요를 펼쳐 한열에게 덮어주었다. 신하리가 담요를 한열의 어깨로 끌어올려주던 그때, 한열이 번뜩 눈을 떴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신하리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저도 모르게 신하리를 밀어내며 쑥스럽게 말했다. “새벽에 안 자고 왜 나와서 사람을 놀래켜요?”한열이 허둥지둥 담요로 몸을 감쌌다. 그는 신하리를 선을 안 지키는 미친 여자라며 혼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신하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신하리가 보였다. 한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늦은 새벽, 강한서는 한열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팍에서 한현진의 손을 떼어내고 이불을 덮어준 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쥐고 방을 나섰다. 강한서가 한열의 부탁으로 신하리를 남산 병원에 입원시켰을 땐 이미 아침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다친데다 감기까지 걸렸고 심지어 신하리는 요즘 촬영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한꺼번에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열이 난 사람을 본 한열은 놀란 가슴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의사는 신하리가 쓰러진 원인이 고열 때문은 아니라 피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저 잠이 든 것뿐이라며 충분히 휴식하면 자연스레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해열 주사를 맞았으니 깨어날 쯤이면 열도 내릴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실에서 나온 한열은 그와 함께 병원에 와준 강한서를 보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매형, 고마워요.”매형이라는 호칭에 강한서의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처남들이 귀엽네. 형님에게 인정받는 건 너무 어려워.’강한서는 한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끼리,
지금 한열의 눈에 강한서는 이미 친형 같은 필터가 쓰인 상태였다. 강한서는 프로에게 부탁해 한열 게임 회사의 버그를 해결해주었고 한밤중에 그를 도와 신하리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늦은 저녁엔 퀵을 불러 그에게 어탕을 보내주기도 했다. 동생에게 사기 치는 송민준보다 백만 배는 더 나았다. 그러니 강한서의 질문에 한열은 아는 것 전부를 털어놓았다. “누나가 아니라 친척 분들이요. 매형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나에게 남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저희 부모님을 찾아왔었어요. 전부 고담시 사람들이었어요.”한열의 고모인 한아람은 고담시의 유명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재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수한 유전자로 인해 한씨 가문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구 끝까지 줄을 섰다고 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당시, 이미 수많은 오작교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강한서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땐 아예 대놓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들의 자료를 한준웅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히 말을 못 꺼내던 한준웅과 하연희도 3개월간의 기다림에도 강한서의 기억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완벽에 가까운 맞선 대상의 조건에 티 나지 않게 한현진에게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준웅을 통해 한태진과 공영선에게 루나를 선물로 보낸게 고작 지난주의 일이었다. 앞에선 마음 써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뒤에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강한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한열 씨 부모님이 현진 씨에게 사람을 소개해주신게 언제부터였어요?”잠시 생각하던 한열이 말했다. “최소 두 주일은 된 것 같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일주일 전이었거든요. 엄마는 연락처를 누나에게 보내주면서 두 사람이 알아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강한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 주일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자 [꽃 피는 봄날]은 곧바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년, 나한테 사진이랑 이력서 보내봐. 한현진 씨가 조건이 좋아. 결혼이라는 게 자고로 서로 조건이 맞아야하는 거잖아. 조건이 너무 떨어지면 아줌마가 청년을 추천할 수가 없어. 내가 추천해준다고 해도 그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청년 자존심만 상하잖아.]강한서가 답장했다. [알겠어요.]그리곤 강한서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주머니, 한현진 씨에게 몇 명이나 소개해주셨어요?][꽃 피는 봄날]이 대답했다. [6, 7명 정도 소개한 것 같은데. 나도 잘 기억은 안 나.]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많이 소개해주셨는데 한현진 씨 마음에 든 분이 한 명도 없었어요?]꽃 피는 봄날: [그냥 얘기해 본다고만 했어. 마음에 든다, 아니다 얘기한 적은 없었지. 하지만 소개해 준 청년들은 한현진 씨를 좋게 본 것 같아. 다들 한현진 씨가 호감이라고 하던데.]강한서가 쯧, 혀를 찼다. 그는 조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에 든 사람인데, 호감형이 아닐 리가 없잖아.’[청년, 빨리 자료 보내. 오후엔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끌다간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래.][알겠어요, 아주머니.]강한서는 신우가 개발한 앱을 열어 한현진이 좋아할만한 스타일을 골라 AI 이미지를 생성했다. 그리곤 대충 이력서를 작성해 [꽃 피는 봄날]에게 전송했다. 물론 한현진이 그 몰래 맞선을 봤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한준웅와 하연희의 맞선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강한서가 기억을 회복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많은 남자의 연락처를 받고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남길 수 있는 건 대체 어떤 능력인 걸까?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던 강한서는 직접 테스트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기 고구마]가 한열의 성희롱을 폭로한 사건은 다음날 큰 반전을 맞이했다. 한
한현진이 생각했다. ‘당연히 너무 괜찮죠!’눈, 코, 입. 모든 곳이 전부 한현진 마음에 쏙 들었다. 사진 속의 자태는 20대 시절의 강한서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굳이 부족한 점을 찾자면 외모가 너무 완벽한 탓에 왠지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혀 진정성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강한서를 처음 만났을 때 한현진은 그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할 정도였다. 특히 강한서의 생기로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진 속 사람의 눈빛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한현진은 상대방의 이력서를 대충 훑었다. 이름은 허연석, 28세, 고향은 한주, 대학원생 학력에 지금은 연현 테크에서 칩 설계를 맡고 있었다. ‘여기 강한서네 회사잖아?’한현진이 답장했다. [아주머니, 연락처 보내주세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꽃 피는 봄날]이 곧바로 허연석의 연락처를 한현진에게 보내주었다. 몇 분 후, 강한서는 카톡 친구 추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었다. 임신을 하고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의 아내, 한현진이었다. 강한서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고 한현진의 맞선 대상의 일원으로 되었다. 한현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허연석 씨. 기혜인 아주머니께서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어요.]강한서는 태연하게 아내에게 연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현진 씨.]한현진: [혜인 아주머니 말로는 연현 테크에 출근하신다고요?]강한서: [네.]한현진이 또 물었다. [연현 테크에 입사하려면 스펙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허연석 씨 능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강한서: [대단하긴요. 그리 힘들지도 않았어요.]자신감은 꽤 있네, 라고 생각한 한현진이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타자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 친구도 그쪽 일을 하고 있는데 올해 모집한 신입사원은 최소한 인 서울 대학의 대학원생이라고 하던데요.]상대방은 마치 떠보는 한현진의 말을 알아채지 못하기라도 한 듯 되물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
강한서는 저돌적인 여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한현진을 화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너 몰래 선을 본다고 생각해서 부계정으로 날 추가해 불륜의 증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야?”강한서가 곧바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 믿지 않을 수 있겠어?”“그럼 왜 부계정으로 날 속인 거야?!”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께서 네가 7, 8명의 연락처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한현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연락처를 왜 교환했겠어? 너도 봤잖아! 널 바꿔버릴까, 고민하고 있었어.”본인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던 강한서는 나지막이 반성했다. “현진아, 정말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게 아니야. 난 그냥 질투가 조금 나서 그랬어. 외삼촌과 숙모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많은 맞선 상대를 소개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야 난 어른들이 날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시는 건지 알게 돼서 속상했어.”그 말 한 마디는 한현진의 화를 삭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렇게까지 날 안 좋아한다는 말에 한현진은 심지어 마음이 아려왔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과 숙모는 아직 네가 기억을 회복한 걸 모르시잖아. 두 분은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다들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냐. 게다가 그 사람들은 외삼촌과 숙모가 먼저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게 아니야. 내가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야.”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한현진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잠시 후,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강한서는 그 영상으로 한현진의 카톡에는 조금 전과 같은 [친목 모임] 그룹 채팅방이 7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그룹 채팅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전 채팅방에 있던 멤버들
“난 없어도 민 실장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형님 소개팅도 민 실장이 주선해준 거였어. 교사, 의사, 공무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직종은 민 실장이 다 꾀고 있다고.”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민 실장님께 부탁 좀 해 봐. 나이는 25살에서 35살 사이, 초혼에 직업은 안정적이고 반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 소개해 달라고 해. 미남계로 혼을 쏙 빼서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민 실장님 보너스 두둑이 챙겨줘야지.”강한서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따 민 실장한테 얘기할게.”강민서의 보고서를 수정해주며 멘탈이 붕괴된 민경하는 연이어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민경하는 순간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을 확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물었다. “나 생일 파티 해주러 가는 거야?”에이, 감탄사를 내뱉은 한현진이 화난 척 말했다. “사람이 무드 없긴. 알아도 모른 척 해야지. 눈치가 없어. 기대감이 완전 사라졌잖아.”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할게.”한현진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어딜? 완전 좋아. 너무 기대된다.”한현진: ...“그냥 닥쳐.”강한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뭘 할지 알아도 기대가 되는 건 똑같아.”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생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다음은 둘이 아니라 넷일 테니까. 마지막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야지.”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내년에도 아이들은 집에 두고 우리 둘이 보내면 돼.”한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젠 가서 일 봐. 좀 이따 만나, 여보.”전화를 끊은 한현진
사실 그건 조금은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특히 한현진의 등에 칼을 꽂은 이 타이밍엔 더 그랬다. 한현진은 자신이 은서하의 편을 들어주었음에도 그녀가 더 이상 송가람의 죄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집엔 아픈 노모까지 있는 여자 아이에게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해금이 주는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그건 은서하가 처사를 제대로 못하는 일이 되었고 어쩌면 회사에서도 점점 더 어려운 처지에 내몰릴 수 있었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고충을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은서하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는 눈빛을 마주한 한현진은 저도 모르게 외할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화장실에 몰래 숨죽여 울던 은서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현진 역시 그런 무력한 순간은 경험했었기에 같은 처지에 놓인 은서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은서하를 용서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냉담한 말투로 “네.”라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은서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에게 말을 더 붙이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연과 다른 동료들이 들어오자 은서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주현이 한현진에게 인사를 건네곤 고개를 돌려 은서하를 보며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서하 씨, 월급을 추가 지급 받으셨다면서요. 대표님께서도 따로 위로금까지 챙겨주셨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전화위복 아닌가?”멈칫, 몸을 떤 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현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이어갔다. “송 팀장님은 그저 서하 씨에게 농담을 좀 한 것뿐인데 하필이면 한 대표님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을 만나서 상황이 이상하게 됐네요. 그대로 한 대표님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덕에 서하 씨는 위로금까지 받았잖아요. 서하 씨는 한 대표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