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모두 한성우를 관여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서로의 유전자를 탓하며 비난하기에 바빴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삐그덕거렸고 양측 부모님들은 아이가 생기면 나아질 거라며 두 사람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권유한 덕에 그가 태어났다.어찌저찌하여 가정은 유지해 왔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혼인 관계에서 두 사람은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해 왔고 그 영향으로 인해 한성우는 결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차미주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사실 한성우는 일찌감치 부모님에게 자신의 태도 의사를 밝혔다.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고 부잣집 딸이 아니라 평범한 아가씨라고, 만나고 싶으면 인사시킬 수는 있으나 지적하거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럴 거면 인사시키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화내기 전에 가버렸다.그들의 성격상 만남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언제 인사시키겠냐고 연락이 왔고 한성우는 이를 차미주에게 알렸다.그리고 나서는 이내 또 후회가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미주가 자신의 가정 상황을 알고 나서 흔들릴까 봐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들이 말을 함부로 할까 봐 걱정됐다.하지만 차미주가 이번 만남을 신중히 생각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이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결혼 당사자는 본인이니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도 자신이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차미주가 손을 씻고 씻을 때,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귓속말했다.“다 씻었어?”차미주는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귓속말하지 마. 간지러워.”한성우는 더욱 가까이 붙으며 간지럽히듯 여보라고 불렀고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다.“뭐라고?”한성우는 웃으며 말했다.“나랑 결혼하면 여보 맞잖아. 여보 아니면 뭐라고 부를까? 애기? 자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졌다.“마음대로 해.”“그럼 난 여보. 카카오톡도 여보라고 저장
한성우가 멍때리고 있을 사이, 차미주는 그를 바닥에 제압해 버렸다.“아파 아파.”한성우는 크리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아프다고 외쳤다.그는 처음으로 차미주가 밥을 너무 잘 먹어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밥심을 모두 자신을 제압하는 데 썼다간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 고장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차미주는 이를 갈며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말했다.“줄게 줄게, 나를 먼저 놔줘.”강한서와 달리 한성우는 바로 투항하는 타입이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폰을 돌려주자 그제야 완전히 그를 풀어주었다.한성우는 바닥에 앉아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불평했다.“아가씨,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 넘어요.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질 나이라고요. 나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가는 큰일 난다고요.”“도둑놈 잡는 게 습관 대서 그래. 그러니까 돌려달라고 할 때 줬으면 됐잖아. 핸드폰을 가지고 튀니까 직업병이 도져서 그런 거지.”차미주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괜히 기침 한번 했다.“정의 구현이 아니라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한성우가 되묻자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며 부정했다.“찔리긴 뭐가 찔려, 괜한 트집 잡지 마.”한성우는 어깨를 문지르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찔리는 게 없는데 왜 안 보여줘? 혹시 조준한테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전번 날에도 두 사람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어, 재검진 시간 예약하던데.”“헛소리하지 마, 언제 시간 되냐고 묻길래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대답한 거거든. 그날은 자신의 외래 날이 아니라고 했어. 난 그걸 알고 일부러 그날에 가려고 한 거고. 네가 괜히 오해할까 봐. 넌 내 통화를 엿들은 것도 모자라 혼자 시나리오까지 쓰고 앉아 있네. 피해망상증이 있는 거 아니야?”차미주의 말을 들은 한성우는 기분이 좋아져 가까이 붙으며 물었다.“주치의 바꿨어?”차미주가 내일 당장 원래대로 바꾸겠다고 말하자 한성우는 그녀를 껴안으며 사과했다.“여보, 내가 미안해,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방에 물건 가지러
“아니면 뭐 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봐?”차미주는 물 한 모금 마시며 한성우의 눈길을 피했다.그런 그녀를 몇 초 동안 뚫어져라 보던 한성우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럼 나는 뭐라고 저장해줄까? 슈크림?”순간, 차미주는 입안에 있던 물을 푸하고 내뿜었다.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자 촉촉한 미간과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한 한성우는 관능미가 한층 더해져 매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턱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차미주의 손에 떨어져 차미주는 저절로 손이 움츠러들었다.“크리미가 이런 뜻이었어? 도대체 그 머릿속엔 무슨 야리꾸리한 생각이 들어있는 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뭐라는 거야?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생사람 잡지 마!”눈꼬리가 올라간 한성우의 눈매는 유달리 이뻤다.“오늘 어때?”“뭐라고?”차미주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서 한성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한성우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크리미의 저력을 알고 싶지 않아?”차미주가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한성우는 그녀를 잡아 소파에 눕혔다.차미주는 발버둥 치며 말했다.“이거 놔줘.”한성우는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며 말했다.“나쁜 생각은 네가 먼저 한 거잖아. 너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걸.”차미주는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 난 아무 생각하지 않았다고.”“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한성우는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조잘조잘 말하는 차미주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차미주는 해명하려고 했으나 한성우는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고 결국 차미주는 해명은 커녕 화를 낼 기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한성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한현진이 선물했던 팔찌가 손에 닿았다.그는 그녀의 팔을 들어 전등불에 비추자 미주는 아프다고 팔을 빼며 말했다.“망가뜨리면 안 돼. 함부로 다치지 마.”한성우는 팔찌를 만지작거
고개를 숙여 보니 산수패의 색감이 자신의 팔찌랑 매우 흡사했고 금장식 모양도 거의 똑같았다.한성우는 웃으면서 말했다.“원료는 내가 고르고 돈은 강한서가 지불한 거야. 이백만 원으로 몇 배나 많은 원료를 산 거지. 하마터면 거기에서 못 나올 뻔했는데 강운이 데리러 와서 나왔잖아. 그때 난 산수패 하나를 만들 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강한서가 다 가져갔어. 몇 년 사이 비취 가격이 많이 올라서 난 한서가 일찌감치 매도한 줄 알았더니 안 팔고 가지고 있었네. 너한테 이렇게 팔찌도 해주고 말이야.”한성우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차미주의 어깨에 살짝 입맞춤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전에 만났던 몇몇 여자 친구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주더니 너한테만 팔찌를 선물해 주는 것을 보아 강한서도 우리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이에 차미주는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퍽이나 그러시겠어요. 내가 현진이랑 절친이니까 이렇게 귀한 선물을 해준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만약 너랑 헤어지면 이 팔찌 돌려 달라고 하게? 전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을 안 해준 건 그냥 네가 바람둥이 기질이 있으니 자신의 투자가 헛되이 될 것이 뻔하니까 안 해준 거지. 지금 여자 친구는 나고 내가 설사 당신 아내가 되지 않더라도 자기 아이의 이모가 될 테니까 손해 볼 일이 없잖아. 안 그래?”한성우는 오목조목 말 잘하는 차미주에게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했다.“싫은데.”차미주는 자기 팔에 걸려있는 팔찌를 보며 말했다. 보면 볼수록 팔찌가 마음에 쏙 들었다.그녀는 한성우에게 물었다.“이 팔찌 얼마나 할까?”“삼사천 만 원은 할 걸.”차미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이 쩍 벌어졌다.“그렇게 비싸다고?”“당연한 걸 물어. 금을 값이 있어도 옥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하잖아. 아무렴 부자들이 값도 없는 돌멩이들을 가지고 노는 바보짓을 할까.”“그럼 현진은 왜 그렇게 금에 목을 매는 거야?”“걔가 금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이런 옥이나 비취를 하나만 해도 몇천만 원을 몸
현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잠이 안 와. 진정이 안 됐나 봐.”“그럼 태교를 좀 듣는 건 어때?”“괜찮아.”강한서가 아나운서 톤으로 그에게 논어를 읽어주자 한현진은 순간 고등학교 때 수능을 준비하던 생각이 떠올라 오히려 더 정신이 번쩍 들었다.강한서가 물었다.“주 기사님 일을 어떻게 생각해?”한현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복잡해. 처음에는 그저 그가 진짜 주혁이 아닌 것만 의심했었는데,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가 주혁이 아니라고 말하잖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혼란스러워.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명분이 없어. 가족들도 그를 의심하지 않잖아.”한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신고를 하다고 해도 뭘 신고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주혁이 아니라고? 지문도 파괴된 이 상황에 경찰들은 그저 그와 가족들의 dna로 신분 확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병이 바로 이 포인트에 있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를 아주 사랑하고 어쩌면 지금의 주혁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 상황이라 섣불리 신고했다가 가족들이 협조를 안 하면 일을 되려 망칠 수도 있었다.“친구한테 부탁해서 몽타주를 그릴 사람을 찾고 있어. 은서하의 묘사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그거라도 있으면 다른 단서들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그러는 수밖에 없지 뭐.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림도 잘 그리고 서예도 잘하는 사람이면 그 년대에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렇게 흉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야?”한현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다 본인의 선택이지 뭐.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과 명예보다도 훨씬 중요하다는 거겠지.”강한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회사에서 그 사람과 멀리하도록 해. 될수록 접촉하지 말고. 어딜 가나 꼭 원율이랑 같이 다니고.”
말 한마디에 모두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알아차렸다.검사실 안에는 나이정과 간민혜만 남아 있었고, 당직 의료진들은 일부러 방해하지 않았다.아무리 강인한 척해도 검사 과정에 또다시 그녀가 받았을 치욕이 떠오르기 마련이었고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고통만 커질 뿐이었다.나이정은 검사를 진행한 후 체내에 남겨진 생체 증거도 채취하여 경찰에 연락했다.그 후의 일은 알려진 바 없지만,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나이정이 죽기 전 간민혜가 병원을 두 번 찾아왔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울분 섞인 말다툼으로 끝났고, 두 번째는 아예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다.그날,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은 이들의 주장으로는 어찌 된 일인지 간민혜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됐고 이에 간민혜는 검사 과정에 문제가 있지 않았냐고 나이정에 따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하지만 진실은 나이정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나이정은 딸의 수술 준비로 정신이 없던 터라 간민혜의 집요한 추궁을 견디지 못해 결국 경찰에 신고했고 간민혜는 소란죄로 7일간 유치장에 갇혔다. 그리고 그사이 나이정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장례식장의 난동은 이렇게 시작된 비극의 연장선이었다.한현진은 서류를 한참이나 꼼꼼히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성폭행 사건 이후 주강운과 결별한 거야?”강한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임라인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이런 큰 사건을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한현진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고 강한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강한서가 모르면 주강운도 몰랐을 것이고 알았더라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간민혜는 왜 주강운한테 말을 안 했대? 자기 남자 친구인데.”간민혜는 홀로 상경하여 살고 있었고 그 당시 가까운 사이라곤 남자 친구인 주강운 뿐이였는데 그와 함께 범인 잡을 방법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현진아, 우리 결혼식 날 강현우가 너를 덮치려 했을 때, 넌 왜 나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한현진은 허를 찔린 듯 말문이
호화로운 파티는 비싼 옷을 입는다고 해서 녹아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출신부터 학벌, 교양 등 모든 방면을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는 정신적 학대의 장이었다.간민혜는 작은 시골에서 자신의 힘으로 서울의 명문대까지 입학한 자존심 강한 여자였고 그녀는 자신의 노력으로 창창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들에게는 하찮은 농담거리로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경제적인 차이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젊음과 명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있었고 앞으로의 수입도 나쁘지 않을 테니. 하지만 가치관의 차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파티는 간민혜가 이성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그녀는 주강운보다 훨씬 이성적이었고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는 바로 감정을 끊어낼 줄 아는, 사랑보다 자존심을 선택하는 여자였다.하지만 주강운은 달랐다. 평생 집안 어른들의 결정에 순종해 온 남자가 첫사랑에 빠지니 고집스럽게 매달릴 줄밖에 몰랐다.그런 모습을 본 강한서는 일찌감치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음을 직감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획으로 미래를 그려나가는 간민혜와 가문에 맞설 능력도 없이 억지로 사람을 붙잡으려는 주강운. 두 사람의 이별은 필연적인 듯하였으나 이런 식일 줄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그렇게도 명확한 목표를 갖고 나아가는 사람이 곧 수여받게 될 학위를 포기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강한서는 간민혜가 학위 수여를 앞두고 모든 걸 포기한 이유를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성폭행당한 사실을 남자 친구인 주강운에게 마저 숨긴 데에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평소엔 너무나도 예의 바른 그녀가 나이정의 장례식에서 영정사진을 깨부쉈으니 그 당시 그녀의 멘탈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일 줄 몰랐던 한현진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그 당시 간민혜가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로
한현진은 담담히 말했다.“사람은 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법이죠. 이상해할 것 없어요.”사인을 마친 서류를 이시연에게 건네주며 덧붙였다.“내일 예선이죠? 화이팅하세요.”이시연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감사합니다, 한 대표님. 덕분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네요.”이시연이 떠난 후 한현진은 책상 앞에 앉아 주혁과 송가람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고선 커다란 물음표를 그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원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한 대표님, 서 대표님께서 조향팀 전체 회의 소집을 지시하셨습니다.”“알겠어요. 바로 갈게요.”한현진은 이름 적힌 종이를 찢어 분쇄기에 넣은 뒤 재킷을 걸치고 회의실로 향했다.복도에는 이미 직원들로 붐비고 있었고 조향팀 직원뿐만 아니라 타 부서 관리자들까지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한현진은 의아해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때 옆에서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세은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고 그녀를 본 한현진은 미소를 지었다. 남다른 후각으로 서해금도 모르는 배합으로 S오일을 만들어 낸 후 주세은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처음에는 서해금 모녀의 지시도 있었지만 더우기는 뒤떨어지는 업무 능력 때문에 “낙하산”으로 많이 무시당했고 송가람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송가람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야근까지 하지만 사실 하는 일이라곤 딱히 없고 자신의 업무마저 동료한테 떠넘기기 일쑤인 사람이었다. 월급 루팡하는 그를 향한 동료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그들은 빽 있는 송가람을 따돌리지 못하고 만만한 주세은을 따돌렸지만 S오일로 주세은은 자신의 능력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다.그녀는 말수는 적었지만 업무 능력만큼은 프로였다. 동료가 그녀를 괴롭히려 몰아준 일도 그들이 못해내니까 자신한테 맡기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묵묵히 해결했다. 심지어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동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처음에 동료들은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점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