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손을 보여준 도일준은 다시 장갑을 끼며 태연하게 말했다. “손을 좀 다쳐서요. 놀라실까 봐.”서해금이 곧바로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아뇨, 제가 무례를 범했어요.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서해금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직업이 의사시라고 들었는데, 너무 안타깝네요.”도일준이 태연하게 웃었다. “안타까울 것까지야. 비록 더는 수술대에 오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의료 분쟁을 피해 갈 수 있었어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니 그 정도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죠.”서해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세상의 많은 일들은 진작 운명이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요. 순리를 따라야죠.”말을 마친 서해금이 도일준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녀는 성급히 향수 제조에 관한 업무를 확정 짓는 대신 도일준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해금이 차를 건네며 말했다. “교포시라고 들었어요. M 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다고 하던데 국어가 꽤 유창하시네요. 심지어 국내 문화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계시고요. 정말 놀랍네요.”찻잔을 건네받은 도일준을 차 한 모금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국내에서 연수를 한 적이 있었어요. 5년 가까이 지내다 M 국으로 돌아가 한 대학교에서 의사로 있었죠. 당시 학교가 한인 타운 근처라 유학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어요. 게다가 제 아내도 교포예요. 아마 언어 환경 때문에 점점 더 국어에 적응한 것 같아요.”“그렇군요. 귀국하실 때 사모님은 함께 오지 않으신 건가요?”그 말에 도일준의 눈빛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멀리 떠났어요.”멈칫한 서해금이 다급히 말했다. “마음 아픈 얘기 꺼내서 죄송해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온몸으로 외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마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워진 도일준의 찻잔을 채운 서해금이 또다시 물었다. “도일준 씨
그 순간, 한현진의 눈이 놀라움에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재빨리 문을 닫는 핑계로 고개를 돌렸다. 충격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도일준 씨가 왜 회사까지 온 거야? 성 비서님이 말한 클라이언트가 바로 도일준 씨라는 거야? 대체 왜 서해금을 찾아온 거야? 무슨 생각인 거지?’서해금이 아무 이유 없이 중요한 고객을 한현진에게 소개해 줄 리가 없었다. 도일준이 한현진을 불러달라고 한 걸까, 아니면 뭔가를 떠보려는 서해금의 수단일까?그 짧은 시간 사이 한현진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의혹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복잡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몸을 돌린 한현진의 얼굴엔 이미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네요.”서해금이 한현진의 표정을 살폈다. 격식 차린 미소를 짓는 한현진은 관찰하는 눈빛으로 도일준을 훑었다. 별다른 반응은 없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우리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말하며 서해금이 한현진에게 손짓했다. “한 대표, 여기 와서 앉아요.”한현진이 다가가 서해금 곁에 앉았다. 도일준을 쳐다보던 한현진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도일준이 회사에 온 목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말을 걸었다가 만약 아는 사이라는 것을 서해금이 눈치챈다면 도일준의 뒷조사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도일준은 한현진과 진희연의 유도로 이미 남편의 죽음이 당시 신생아 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만났던 사람은 서해금이 아니라 또 다른 남자였다. 그러니 그 남자만 찾아낸다면 모든 증거들이 사슬처럼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야만 서해금을 법의 심판대로 올릴 수 있었다. 사건의 키 포인트는 그 남자에게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도일준이 서해금의 가시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해금은 포장된 예쁜 인형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의
그 말을 들은 후 도일준을 대하는 서해금의 태도가 더 친절해졌다. 한현진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시선을 내린 채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화를 나누며 서해금은 도일준이 제작할 향수의 스타일을 결정지었다. 한현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들러리처럼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 서해금은 비록 미팅 자리에 한현진을 불렀지만 그녀를 전혀 미팅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계약금을 지급한 도일준이 고개를 들어 서해금에게 물었다. “서 대표님,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제가 한주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요. 오늘 서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어쩐지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친절한 기분이 들어서요. 서 대표님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전 이미 도일준 씨를 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서해금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어떠세요? 내일은 제가 대접하죠.”도일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친히 도일준을 로비까지 배웅한 서해금은 그가 차에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너 전에 도일준 씨 만난 적 있어?”한현진이 의아한 듯 대답했다. “오늘 처음 봤어요. 왜요?”그 말을 내뱉은 동시에 한현진의 등에는 소름이 으스스 돋았다. 서해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어쩐지 이상해서 말이야. 도일준 씨는 네 엄마를 아는 것 같았는데 넌 미팅룸에서 도일준 씨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 네가 엄마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도일준 씨와 아는 사이라 이미 아람이에 관해 물어본 건지 싶어서 말이야.”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일준 씨와 제 엄마가 아는 사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두 분이 아는 사이라면 도일준 씨가 어떻게 절 못 알아보겠어요. 제가 엄마를 얼마나 많이 닮았는데요.”한현진이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서해금이 물었다. “어딜?”남자가 말했다. “해외 어디든. 송병천이 친딸을 찾았어. 그때 그 일을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여기 있지 말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 지금 우리 손엔 가람이가 남은 평생 아무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잖아. 우린 더 이상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듯 불안한 생활은 그만 해도 돼.”서해금이 남자의 손을 떼어놓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여전히 너무 단순해. 돈은 있지만 사회적 지위와 인맥은?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한 게 겨우 그깟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거야.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가람이가 스스로 그 돈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남자가 다시 서해금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가람이를 위해 신탁 기금을 만들어 지출을 제한하면 되잖아. 그럼 나중에 우리가 죽어도 가람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해금이 손을 빼며 차갑게 말했다. “난 절대 신탁 기금 따위로 우리 딸을 병 X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 깔린느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놨는데. 나더러 돈만 가지고 볼품없는 꼴로 여길 떠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가 내 피눈물로 만든 회사를 한아람의 딸에게 넘겨줘야 하는 거냐고.”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람이는 강한서 그 자식과 결혼할 생각밖에 없어. 걔 마음은 애초부터 일에 없었다고. 네가 깔린느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가람이를 위한 거야, 아니면 널 위한 거야.”“날 위한 거라고?”서해금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정말 날 위했다면 애초부터 왜 당신을 만났겠어!”남자는 말이 없었다. 평정심을 되찾고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느낀 서해금이 날카로웠던 말투를 바꾸며 나지막이 말했다. “안수 씨.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냐. 난 한 번도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한 적 없어.”남자의 눈빛이 삭막하게 변해갔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넌 포부가 있는 사람인 거 알아. 절대 쉽게 고개를 숙일
남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서해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야망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쉽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 왜 부른 거야.”상대방에게 의도를 들킨 서해금 역시 불쌍한 연기는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박안수에게 건넸다. “이 사람 국내에서의 행적을 좀 알아봐 줘.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최대한 자세하게.”박안수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도일준이라는 남자의 신상 자료였다. 자료를 넘기던 박안수는 사진 속 남자의 눈매가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좀처럼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서해금에게 물었다. “누구야?”“회사와 새로 계약한 클라이언트야. M 국의 교포래. M 국에서의 신분도 확인할 거야. 하지만 국내에서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알아야겠어. 만약 신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 깔린느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M 국과 연결해 줄 다리가 될 거야.”M 국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들의 의료 체계는 국내와 달라 실력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상류층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직접 도일준을 에스코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노린 것인 의사라는 신분 뒤에 따라올 수많은 도일준의 자원이었다. 택시에 앉아 시트에 기댄 도일준이 장갑을 벗었다. 온전하지 않은 손가락이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무명지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마치 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무명지는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끊어진 손가락이 남긴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차가 병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층 건물이 산을 이루고 인파가 물밀듯 몰리며 차가 물살처럼 쌩쌩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라곤 병원 맞은편 건물엔 여전히 깔린느의 광고가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와 똑같은 모습 그대
택시 기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민경하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도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시죠.”그런 도일준의 태도에 민경하는 화조차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 대표님께서 26년 전 한주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조예단이라는 분에 관해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어요. 조예단이라는 분을 아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도일준이 홱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민경하는 여전히 단정하고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도일준이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대답했다. “만나면 아실 겁니다.”도일준은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함께 멈춰 선 차들이 하나둘 클랙슨을 울리는 탓에 도일준의 마음도 따라 복잡해졌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택시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이거 지금 업무 방해예요.”숨을 깊게 들이쉰 도일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경하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를 건네며 재킷 안쪽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기사는 그중 한 장을 뽑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내 담뱃값 대준 거로 해요. 앞으로 운전 조심해요. 초보 운전자가 겁도 없이 험하게 운전을 해.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한 방 털렸을 거예요. 이건 인생 수업 들은 수강료라고 생각해요. 조심 좀 하고.”민경하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택시 번호를 한 번 확인한 민경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일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오른 도일준이 다시 한번 민경하에게 물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구예요.”민경하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거예요.”그러자 도일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30분 후, 민경하가 운전한 차가 구시가 근처에
“그러는 강 대표님은 제가 탄 차를 멈춰 세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죠?”도일준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제가 도일준 씨를 여기에 모신 건 도일준 씨께 어떤 분에 관해 여쭤볼게 있어서예요.”도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주 사람도 아닌데요. 저를 통해 누군가를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강한서가 반문했다. “제가 여쭤보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도일준 씨는 어떻게 본인이 모르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강한서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울컥 화가 치민 도일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굴 알아볼 생각이든 전 몰라요.”“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강한서는 도일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던 한현진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도일준 씨를 모신 건 제 아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미간을 찌푸린 도일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후원하시던 고아원이 있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도일준 씨도 여러 차례 그 고아원에 후원하셨더라고요. 절대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요.”“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줄곧 얘기했었어요.”도일준은 고아원에 후원한 것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당시의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고 꼬리가 밟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굳은 얼굴의 도일준이 대답했다. “그 돈은 제가 친구 대신 후원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말하며 도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도일준이 민경하를 따라나선 건 그가 서해금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현진 쪽 사람이었다니, 도일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송씨 가문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예준이 룸을 나서며 문을 꼭 닫았다. 조예준을 향한 도일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조 셰프님은 진미가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셰프님이세요. 다른 셰프님들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하시다가 셰프로 전향하신 케이스예요. 아마 이쪽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지금은 진미가에서 제일 예약하기 어려운 셰프님이세요.”강한서는 말하며 계란술국 한 그릇을 떠 천천히 도일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계란술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일준 씨, 드셔보세요.”계란술국을 바라보는 도일준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집, 돈 새는 구멍이라며 학교도 못 가게 하더니 고기 한 점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모.그리고 계란술국을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와 앞으로 술국은 전부 누나에게 줄 테니 울지 말라며 달래던 어린 남자 아이...이젠 전부 잊혀 전생의 기억 같던 그 모든 일들이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일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화재가 기억을 덮쳤고 눈을 뜨자 보이던 상처투성이의 자신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들이 또다시 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끊어진 약지에서 다시금 통증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절단된 손가락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오장육부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칼로 다져지듯이 아팠다. 도일준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강한서가 나지막이 도일준을 불렀다. “도일준 씨, 도일준 씨. 괜찮으세요?”도일준이 고개를 들자 빨개진 그의 눈이 보였다. 얼굴은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강한서는 오히려 차분한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