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폭풍 속 침몰하는 요트에서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해난구조 전문가 윤해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걱정이 아닌 사고 책임을 뒤집어쓴 누명이었다. 복구된 영상과 감춰진 안전 비리를 손에 넣은 해원은 자신을 버린 약혼자와 그의 회사를 향해 냉정한 반격을 시작한다.
View More“파고가 2.5미터를 넘었습니다.”
윤해원이 태블릿 화면을 돌려 보였다. 붉은 경고선이 거제 외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태성해운의 VIP 요트 ‘마리나’는 출항한 지 40분 만에 예정 항로의 절반도 가지 못했다. 창밖으로는 잿빛 물결이 난간 높이까지 치솟았다. 샴페인 잔을 든 투자자들이 애써 웃고 있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흔들릴 때마다 대화가 짧게 끊겼다.
오민석 선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압이 예상보다 빨리 떨어집니다. 회항하는 게 맞습니다.”
차도혁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봤다. 태성해운 대표이자 해원의 약혼자. 오늘 행사는 그가 밀어붙인 신규 크루즈 사업의 첫 공개 무대였다.
“싱가포르 쪽 투자자가 이 일정 하나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섬 한 바퀴만 돌고 들어가죠.”
“대표님, 앞쪽 해역에 돌풍 예보가 있습니다.”
“예보잖아요.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도혁은 선장을 지나 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직업병이 너무 심해.”
세이프오션 해난안전본부 상무인 해원은 그의 웃음에 따라 웃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사고가 난 뒤에 판단하면 늦어.”
“우리 회사 배야. 선장도 있고, 장비도 다 갖췄어.”
“구명조끼 점검표는?”
“오늘도 일하러 왔어?”
해원이 오늘 요트에 오른 건 약혼자 자격만은 아니었다. 태성해운은 세이프오션과의 협업 가능성을 투자자에게 보여 주겠다며 행사 소개자료에 두 회사 로고를 나란히 넣었다. 정작 해원에게 안전 검토를 맡긴 적은 없었다. 도혁에게 필요한 건 세이프오션의 이름뿐이었다.
출항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해원은 선미의 비상집결 표지 앞을 꽃 장식과 홍보벽이 가로막은 것을 보고 치워 달라고 했다. 행사팀 직원은 대표실 지시라며 난감해했다.
“사진 찍고 바로 치우면 돼.”
도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고는 사진 다 찍고 나서만 나는 게 아니야.”
“또 시작이네.”
6년을 만나면서 도혁은 해원의 신중함을 믿는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대표 자리에 오른 뒤부터 자신을 멈춰 세우는 말은 모두 겁이나 간섭으로 치부했다.
그때 한서린이 도혁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태성해운의 외부 홍보 디렉터. 도혁과 대학 시절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해원은 약혼 후에야 알았다. 도혁은 오래전에 끝난 일이라고 했다.
“해원 언니 말대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아? 파도가 좀 무섭긴 하네.”
말과 달리 서린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혁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금방 잔잔해질 거야.”
해원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선장에게 다가갔다.
“회항 판단은 선장 권한입니다. 투자자 일정 때문에 미루지 마세요.”
오 선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타실로 돌아간 지 1분도 되지 않아 도혁의 비서가 뒤따라 들어갔다.
해원은 유리창 너머 항로표시기를 봤다. 회항점에 닿았는데도 선수는 외해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회항해. 선장 판단을 막지 마.]
읽음 표시는 떴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조타실 안에서 비서가 도혁의 지시를 선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요트가 크게 들썩였다.
벽면 장식장이 열리며 유리잔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비명이 터졌다. 해원은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노년의 투자자를 붙잡아 테이블 아래로 몸을 낮췄다.
“창가에서 떨어지세요! 모두 중앙으로!”
두 번째 파도는 첫 번째보다 컸다.
선체가 오른쪽으로 깊게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엔진음이 한 차례 끊겼고, 실내 조명이 깜빡였다.
해원은 곧장 조타실 쪽을 봤다.
“속도 줄였습니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금속이 갈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요트 밑바닥에서 길게 치솟았다.
쾅!
바닥이 위로 튀어 올랐다. 사람과 의자가 한꺼번에 밀려났다. 해원의 옆구리에 깨진 장식장 모서리가 깊게 부딪혔다.
숨이 막혔다.
몇 초 뒤, 비상등이 붉게 켜졌다. 조타실 문이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항해사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암초에 부딪혔습니다!”
태성 프런티어가 묶인 다음 날, 포털 첫 화면에 윤해원의 이름이 걸렸다.[파혼한 재벌 상속녀의 500억 복수][사랑이 끝나자 채권 회수…기업 사냥 논란][세이프오션, 태성해운 인수 노리나]기사에는 익명의 ‘금융권 관계자’가 등장했다. 윤해원이 약혼 기간에는 부실을 묵인하다 파혼 직후 돌변했고, 사적인 감정으로 독립 리스크위원회를 움직였다는 내용이었다.태성해운이 흘린 자료였다.홍보대행사는 같은 문장을 조금씩 바꾼 게시물을 여러 커뮤니티에 뿌렸다. ‘약혼녀의 질투’, ‘첫사랑 때문에 벌어진 삼각관계’, ‘500억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속녀’ 같은 자극적인 표현이 계약 조항과 안전보고서를 밀어냈다. 해원의 구조 경력까지 특혜로 포장됐고, 병원에서 찍힌 뒷모습 사진에는 ‘멀쩡히 걸어 다닌다’는 설명이 붙었다.사고 생존자 한 명이 해원을 두둔하는 글을 올리자 신원이 공개됐다. 태성해운과 돈을 받고 증언한다는 악성 댓글이 달렸고, 결국 그는 게시물을 삭제했다.해원은 그가 보낸 사과 문자를 읽었다.[상무님이 제 아내를 먼저 태워 주셨는데 끝까지 말하지 못해 죄송합니다.]해원은 바로 답했다.[가족부터 지키세요. 증언은 수사기관에서만 하셔도 충분합니다.]해원은 생존자의 신원을 더 노출하지 않기로 했다. 영상도 증언보다 봉인 기록과 감정 결과를 먼저 내놓을 생각이었다.과거 해원과 도혁이 주고받은 문자 일부도 공개됐다. 결혼식 일정과 가족 문제로 다툰 대화만 교묘하게 잘려 있었다.[내가 더는 당신 방식에 맞추지 않을 거야.]해원이 8개월 전 보낸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회사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증거처럼 사용됐다.세이프오션 고객센터에는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주가는 장중 6% 넘게 떨어졌고, 구조사업 입찰의 공정성까지 의심하는 기사도 나왔다.
상환 기한 14일 동안 태성해운은 가능한 모든 곳에 손을 벌렸다.주거래은행에는 만기 전 대출을 요청했고, 사모펀드에는 지분을 담보로 긴급자금을 제안했다. 차도혁은 해외 투자자에게 크루즈 사업 지분을 절반까지 넘기겠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사고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렵습니다.”태성해운이 안전위험을 숨긴 사실이 금융권에 퍼진 뒤였다. 세이프오션캐피탈의 500억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금융기관도 대출 약정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주거래은행은 허위자료 제출이 사실로 확정되면 220억 단기대출을 즉ㅁ시 회수할 수 있다고 통지했다. 선박리스 회사는 2척의 용선료를 선납하라고 요구했고, 신용평가사는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한 계약의 위반이 확인되자 다른 채권자들도 동시에 움직였다.도혁은 세이프오션만 설득하면 연쇄 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문제는 두 회사 사이를 벗어났다. 금융기관들은 태성해운의 돈보다 보고서를 믿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서린은 매일 전화를 걸어 자신이 기사에 노출되지 않게 해 달라고 재촉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겠다고 해원을 남겨 둔 남자는 회사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그 여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상환 기한 마지막 날 오후 4시.태성해운이 마련한 현금은 173억뿐이었다.차성호 회장은 본사 18층 집무실에서 재무담당 임원의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선박 하나 팔면 되잖아!”“정상 가격으로 매각하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립니다. 지금 급매로 내놓으면 채권단이 담보가치 하락으로 추가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그럼 세이프오션에 무릎을 꿇어!”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협상 요청을 3번 보냈습니다. 해원은 만나지도 않습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데 만나 주길 바라?”
차도혁은 조기상환 통보 다음 날 해원이 옮겨 온 재활병동까지 찾아왔다.이번에는 꽃도, 과일도 없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에는 밤샌 흔적이 선명했다.“사람들 내보내.”“안 됩니다.”김명준 실장이 먼저 막았지만 해원이 손을 들었다.“그대로 있어도 돼요. 이분들은 제 법률대리인과 회사 동료입니다.”도혁은 이를 악물었다.“우리 둘이 얘기할 문제야.”“500억이 우리 둘 문제였어?”그는 침대 앞까지 다가왔다.“회사와 우리는 별개잖아. 파혼은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왜 회사를 죽여?”그는 서류봉투를 침대 위로 던졌다. 안에는 양가 공동명의의 사과문 초안과 수정된 결혼 일정표가 들어 있었다.“공식적으로는 사고 충격 때문에 결혼을 잠시 미룬 걸로 하자. 네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 관계에 문제없다고 말하면 금융사들도 시간을 줄 거야. 500억 통보만 철회해.”해원은 문서를 한 장씩 넘겼다. 사과문에는 도혁이 자신의 손을 놓았다는 내용도, 안전보고서를 삭제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악화’와 ‘불행한 오해’라는 말만 반복됐다.“이게 당신이 말한 사과야?”“회사를 살리고 나면 제대로 사과할게.”“항상 나중이네.”“지금 결혼하자는 게 싫으면 약혼 상태만 유지해도 돼. 서로 사생활 간섭하지 말고, 대외적으로만.”도혁은 그것을 큰 양보처럼 말했다. 해원은 대외용 약혼만 유지하자는 문장을 다시 읽고 봉투를 닫았다.“당신이 말하는 ‘우리’에는 처음부터 내가 없었어.”그녀는 일정표를 반으로 접어 봉투에 돌려 넣었다.해원은 봉투를 침대 끝으로 밀어냈다.“당신 회사가 운항 금지 보고서를 없앴고.”“그건 실무진 실수야.”
세이프오션캐피탈 독립 리스크위원회는 오전 9시에 시작됐다.윤해원은 이해관계자로 분류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대신 첫 20분 동안 사고와 자료 위조 경위를 보고한 뒤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개인적인 파혼은 판단 요소에서 제외해 주십시오.”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태성해운이 계약을 지켰는지만 봐 주세요.”닫힌 문 너머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원본 보고서의 진위, 전자결재 기록, 보험사 제출본, 추가대출과의 인과관계. 외부 변호사와 해양안전 전문가가 각각 독립 의견을 냈다.해원은 복도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회의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 때 윤정호 회장에게 차성호 회장의 전화가 왔다. 차 회장은 두 집안이 예정대로 결혼을 추진하면 100억을 먼저 상환하고 나머지는 1년 안에 정리하겠다고 제안했다. 사고에 대한 공개 사과도 약속했다.“결국 결혼을 상환 유예 조건으로 내놓는군.”윤 회장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해원은 휴대전화를 넘겨받지 않았다.“위원회에 전달하지 마세요.”“네가 싫다고만 하면 끝날 일이다.”“싫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미 의결이 시작됐기 때문이에요. 지금 협상하면 저쪽이 나중에 개인 감정으로 조건을 바꿨다고 주장할 겁니다.”그녀는 아버지에게 통화기록만 보존해 달라고 했다. 차 회장의 제안은 태성해운이 혼담을 금융수단으로 여겼다는 사실만 확인해 줬다. 이미 시작된 심사와 맞바꿀 거래는 아니었다.회의실 안에서는 위원 한 명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왜 파혼 직후에야 위험 심사가 시작됐느냐는 것이었다. 외부 변호사는 사고 저장장치 복구와 원본 보고서 접수 시각을 제시했다. 심사의 출발점은 파혼 날짜가 아니라 새로운 증거가 확인된 날짜였다.강재욱이 따뜻한 물을 건넸다.“긴장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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