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홧김에 말했다."안되면 성우 씨나 강운 씨를 찾아가서 빌릴거야. 그 두 사람한테 이자를 20퍼센트를 주면 되지뭐. 적어도 당신같은 흡혈귀한테 빨리는 것보다는 나아."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실눈을 위협적으로 뜨면서 말했다."그러기만 해봐!""왜? 난 그럴 건데!"유현진은 말하면서 휴대폰을 들고 번호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강한서가 어두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뺏기 시작했다.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유현진이 침대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강한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강한서도 균형을 잃으면서 두 사람은 함께 침대 위에 넘어졌다.이때 마침 신미정이 정인월을 부축하여 방으로 돌아와 얼굴을 붉히고 침대에 누워있는 유현진과, 눈을 붉히고 유현진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강한서를 보았다.정인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신미정이 큰소리로 두 사람을 혼냈다."너희 두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이 소리에 깜짝 놀란 유현진은 바로 강한서를 밀치고 옷차림을 정리하면서 일어나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정인월을 불렀다."할머니."강한서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넥타이를 바로잡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팔순잔치를 준비하는 일이 물건너가고 나서 유현진에게 원한이 가득 맺힌 신미정은 눈앞의 장면이 눈꼴사나웠다."현진아, 시집 온 지 이젠 여러 해가 됐는데 여태 이리 철없으면 어떡하니. 이게 어디라고 함부로 이렇게 노닥거리는 거야? 남들 입방아에 오르면 어쩔려고? 너희 부모님께서 이렇게 가르쳤어?"안색이 어두워진 유현진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한서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엄마가 남한테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어떻게 알아?"신미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화난 어투로 말했다."한서야 그 말은 또 무슨 뜻이야? 내가 이젠 현진이한테 말도 못해?"강한서가 대꾸하기 전에 정인월이 입을 열었다."한서 말도 일리가 있다. 이 자리에 우리밖에 없는데 남들이 어떻게 알아?"그러고는 두 사람한
강민서는 깜짝 놀랐다.그는 신미정이 이렇게 화내는 걸 처음 봤다. 그래서 한참이나 아무말도 못하고 멍해있다가 더듬거렸다."난, 난 그저 둘째 삼촌이 우리한테 잘해준다고 생각해서."신미정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반응한 것을 깨닫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너한테 잘해줄 사람은 없어. 머리를 좀 써."강민서는 여전히 둘째 삼촌이 자신한테서 잘해줘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늘 삼촌네 가정을 적수 대하듯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둘째 삼촌 내외에 대한 신미정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민서는 둘째 삼촌네 가정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삼촌은 출장 다녀올 때마다 그와 그의 오빠 강한서에게 강현우와 똑같은 선물을 해줬다.어려서 아빠를 여읜 강민서에게 있어서 강단해는 아빠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강단해와 사이가 가까웠다. 하지만 신미정은 이에 대해 큰 반감을 표했다.강민서는 감히 신미정에게 대꾸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응했다."알겠어요."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완화되자 신미정이 말했다."나중에 오빠한테 다녀와. 저 약들을 유현진한테 갖다줘."그러자 강민서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거절했다."싫어요. 안 갈래요. 할머니가 지금도 유현진을 예뻐하는데 거기에 오빠 애까지 가지면 아주 난리가 날 텐데, 그 꼴을 내가 어떻게 봐요. 평생 임신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다녀오라고 하면 다녀와. 강운이와의 혼사를 할머니께 말씀드리게 하겠으면 말이야."그러자 강민서의 눈에서 빛이 반짝거렸다."할머니께 말씀드렸어요?""잠깐 말씀드렸는데, 주씨 가족이 원하면 할머니는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셨어.""강운 오빠 어머니는 절 좋아하실 게 분명해요. 어렸을 때부터 저를 엄청 예뻐하셨어요."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자신 있었다. 주강운을 좋아한 지 오래됐기에 주강운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
"형님이랑 친한 사이가 아니면 나 진 여사랑 약속도 잡지 않았어."송민희가 차에서 내리자 차 안은 많이 조용해졌다.강단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누구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강단해가 입을 열었다."너 유 부시장 따님과는 어떻게 됐어?"강단해의 목소리는 워낙에 톤이 높고 울림이 강해서 자연스레 위엄이 느껴지는 데다가 표정도 사뭇 엄숙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강열한 눈빛에서 젊은 시절의 풍채를 느낄 수 있었다.그런 강단해 앞에서 강현우는 자연스레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그런 여자는 도전할 멋도 없어요. 그저 몇 마디만 하면 바로 넘어와요. 그런데 더이상 만나지 않으려고요. 유 부시장이 옛 사건에 연류되어 올해 안으로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난대요."더이상 진급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 더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혼사는 당연히 없던 일로 하는 것이 맞다.강단해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그 정보 믿을 만해?""유 부시장 딸이 말한 거예요. 틀림 없어요. 반년 동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어요."강단해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성그룹에서 강한서의 입지는 만만치가 않았다. 강단해 스스로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라 그는 강현우의 혼사에 신경을 썼다.실력이 막강한 사돈이 있다면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만약 유 부시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그 혼사는 치를 필요가 없다.그런데 다시 사돈을 맺을 상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주에 돈 많은 부자는 많지만, 자금력을 탄탄한 세가는 적다. "아빠, 송병천이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자선 이브닝 파티에서 그 집 작은 딸이 병이 발작하여 요즘 집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다고 해요. 엄마가 송병천과는 먼 친척 관계잖아요. 그럼 우리도 문병을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강단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송가람은 송병천의 친딸이 아니야."그러자 강현우가 가볍게 웃
증조할아버지는 왠지 강민서가 낯익었다. 좀 생각해보자 며칠 전에 사진첩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왠지 낯익다 했더니 아가씨 그 놈 여동생이지? 다 한식구네. 마침 잘왔어. 오늘 내가 야채를 많이 캤는데, 점심에 야채전을 만들어 줄게."증조할아버지는 워낙 시골 사람이라 소박하고 마음이 너그럽다. 구십이 다 되는 나이에 젊은이 따지고 싶지 않았고, 강한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자 상대방이 바로 친근하게 느껴졌다.강민서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누가 당신이랑 한식구래? 유현진은 우리 집에서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아나? 평소에 쥐새끼 마냥 친정집에 돈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사람을 집안에 들여? 당신들은 염치라는 게 없어?"이 말에 증조할아버지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그는 손에 쥐었던 호미를 버리고 강민서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젊은이가 무슨 말을 그렇게 고약하게 해.""유씨 집안에서 하는 건 괜찮고 말하는 건 안되나? 늙은이가 아직도 도둑놈 심보를 버리지 못하고 말이야. 이렇게 고급 저택에 살아보니까 시골 그 낡아빠진 집과는 비교할 수 없지? 버러지들 같으니라고."증조할아버지는 화가 치밀어서 손이 막 떨리고 목소리도 떨렸다."너 말을 똑바로 해. 시골 사람들이 어때서? 뭐 버러지? 우리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경작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왜 버러지야. 그리고 너희들 먹는 거, 입는 거 어느 하나 농삿일을 거치지 않은 거 있어?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야박해!""내가 틀린 말 했어? 당신 스스로 봐봐. 유씨네 가족들 다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이야.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약을 가져다 주라고 한 거야? 유현진이 임신하지 말아야지. 임신해서 뱃속의 아이가 당신들 같이 버러지 같으면 어떡할라고."강민서는 말하면서 박스를 들고 집 안으로 걸어갔다.증조할아버지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강민서의 손목을 잡더니 소리쳤다."나가! 당장 나가! 그 물건 가지고 당장 여기서 나가!"증조할아버지가 힘써 강민서의 손목을 잡아당
강한서가 멍해지다가 눈길이 어두워지더니 한마디 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어떻게?"유현진은 사뭇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만약 증조할아버지가 수술실에서 무사히 나오지 못하면 당신 강민서를 감옥에 보낼 수 있어?"강한서는 눈썹을 찌프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유현진이 맥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못하겠지! 그럼 당신은 뭘 어떻게 처리해서 누구한테 보여줄 건데?"강한서지 지금 막 입을 열려는데 수술실 등이 꺼졌다.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환자는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어요. 환자가 뇌전증 병력이 있는 데다가 연세도 이렇게 많은데 옆에 사람이 없으면 어떡해요? 제때에 병원으로 이송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엄청 위험했을 거예요."유현진은 비로소 한시름을 놓았다. 의사의 잔소리가 끝나자 유현진이 인사를 했다. "제가 너무 방심을 했어요.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의사는 손짓하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길 테니 그때 가보면 될 거예요." 의사가 떠나고 나서 유현지은 강한서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유상수에게 알리려고 전화를 했다. 유현진의 힘이 빠진 뒷모습을 보자 강한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바로 휴대폰을 들고 강민서의 번호를 눌렀다.예상대로 강민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했다. 이번에는 도우미 아줌마가 받았다."도련님, 사모님은 친구 만나러 나갔어요."강한서가 차갑게 한마디 했다."강민서를 바꿔요."강한서는 화가 엄청 났을 때에만 성을 붙여서 강민서를 불렀다.도우미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강민서를 쳐다봤다. 강민서는 애써 손짓했다."그, 아가씨는 지금 집에 없어요. 아침 일찍 친구랑 나갔어요."눈을 치켜뜨던 강한서는 다시 한번 말했다."전화 받으라고 하세요."도우미 아줌마가 답했다."아가씨는 지금 진짜 집에 없어요......"강한서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마직막으로 말할게요. 당장 전화 받으라고 하세요."상대방쪽에서 소음이 들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점점 더 굳어지는 강한서의 얼굴에 신미정이 다급히 호통치며 말했다. "너 그 입 닥치지 못해!"그러고는 머리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 "한서야. 나도 얘기 들었어. 이번에 민서가 심했어. 아까 돌아오는 길에 사돈한테 연락했더니 병원에서 뇌전증이라고 연락이 왔었대. 이미 좋아졌고 이 일은 사고야. 민서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민서도 많이 놀랐어."뇌전증이라는 말에 강민서는 또다시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 별로 힘도 안 썼거든. 그리고 날 잡지 않았다면 내가 밀었겠어? 마침 뇌전증이 발작한 거 가지고, 재수 없게! 죽지 않았으니 말이지 죽기라도 해봐. 누가 내 말 믿어줬겠어!"강한서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강민서, 너 혹시 목격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강민서는 흠칫하면서도 계속 뻔뻔스럽게 말했다. "내가 뭐 어쨌는데. 난 그냥 약 가져다주려고 한 것뿐이야. 못 들어가게 하니까 내가 살짝 민 거 가지고."사고 당시 강한서와 유현진은 다 집에 없었고 도우미도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나왔으니 강민서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강민서가 여전히 뻔뻔하게 굴자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휴대폰으로 사건 당시 영상을 켜라고 했다. 민경하는 음량을 제일 높게 조절했다."한 집안사람이라… 그쪽 집안은 원래 이렇게 뻔뻔스러워요?""큰 집에서 지내는 게 시골의 개집 같은 곳보다는 편하죠?""다행히 임신 안 해서 그렇지. 만약 임신이라도 했어봐, 유씨 집안 사람들처럼 못나고 역겨울걸요."강민서의 한마디 한마디에 강한서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강민서는 자기가 한 말이 전부 감시카메라에 그대로 찍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한서는 쌀쌀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선택해.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던가, 아니면 영상 경찰에 넘겨서 고의 상해죄로 감방 가던가. 우리 집안에서 아무도 널 상관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넘기는 수밖에!"강민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오
"이 연세에 이렇게 다치시면 얼마나 위험한데요.""그런데 강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네요. 그 집에서 사고가 났는데 왜 코빼기도 안 보인대요?"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마디 하며 유현진이 어르신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머리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끄러워 죽겠어!"어르신은 그들이 가증스러운 관심에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다들 썩 나가!"모두 순식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이내 하나둘 병실을 나가기 시작했다.유현진도 병실을 나가려는 순간, 어르신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현진아, 나 물 한 잔 다오."유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친척들은 그 모습에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병실 문을 닫았다.유현진은 물에 빨대를 꽂아 어르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어르신은 힘겹게 물 두 모금을 마시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그러고는 이불을 툭툭 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로 와서 앉아."유현진은 컵을 내려놓고 어르신 옆에 앉았다."강한서 이놈은?"어르신이 살며시 물었다.유현진은 머리를 푹 숙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만 해도 있었는데 급한 일 있는지 자리 비웠어요."어르신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왜 미안해. 네 잘못도 아닌데."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아니야. 내가 욱해서 그래. 다 늙어서 어린애랑 싸워 보겠다고. 말하게 내버려 뒀으면 됐을걸."어르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사돈들과 한번 만났으면 싶었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야.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만났네." 어르신은 유현진의 손등을 토닥이며 계속 말했다. "내가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유현진은 의아했다. 이내 어르신은 자주 입는 옷 주머니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유현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몇
어르신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과 같이 뭐든 다 보아낼 수 있었다.어르신은 곧 아흔 살의 장수 노인이다. 하지만 근 몇 년동안 어르신의 자식들은 다 이 세상을 떠났으며 마지막 남은 자식도 반신불수로 병상에 누워있다.자식들을 먼저 보내고 나니 손주들과의 감정도 점점 멀어지면서 어르신은 고향 집에서 외롭게 지냈다. 하지만 고향 집의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효자"들이 나타나 효자 노릇을 하려고 했다.그러니 어르신은 그들의 생각을 다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르신의 철거 보상금을 노리고 있다.어르신은 이미 돈을 중요시하는 나이가 아니다.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나누어주고 나면 정작 아프다고 해도 보러와 줄 이는 없을 것이다.나이를 먹어가니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짐만 되었다.이 돈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니 한주시에 오겠다고 했을 때 그나마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고 어르신의 뜻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은 전부 그 돈에 있었다.병실에서 환우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전부 프로그램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지만 어르신은 스크린에 비친 유현진을 보며 문득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증손녀가 보고 싶어졌다.유현진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녀는 어르신이 달콤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으며 담배와 술도 공제했다. 게다가 한밤중에 감기라도 걸릴까 봐 에어컨의 따뜻한 바람도 틀어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탕을 입에 넣고서도 어르신이 속상해할까 봐 맛있다고 말해주던 아이였다.그녀는 누구보다 착했다.유현진은 눈물을 참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꼭 강씨 가문 사람들이 사과하게 할게요."어르신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교양 없는 어린애랑 뭔 말을 한다고."어르신은 유현진의 손을 잡더니 통장을 쥐여주며 말했다. "어서 숨겨. 아무도 못 보게."병실 밖에서 둘째 작은어머니가 뒤꿈치를 들고 병실을 염탐했다.하지만 칸막이 커튼 때문에 두 사람의 행동을 볼 수 없어 속이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