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끊긴 전화에 기분이 언짢아진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한서야.”강한서는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 보고는 휴대폰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대체 무슨 일로 왔어?”송민영은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쑥스럽게 말했다.“요 며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디저트 좀 만들어봤거든.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작 이것 때문에 왔어?”순간 마음이 경직된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그건 아니고... 일도 좀 물어보려고.”강한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페이스북은 매니저한테 맡겨. 며칠 후에 섬블 컴퍼니에서 계약건 때문에 올 거야. 그때 다시 홍보하면 돼.”송민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전에 한성우에게 “정상에서”의 더빙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이나 어필했었지만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해 그 일로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었다.사실 게임 더빙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셋 스타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얼마 전 “비밀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할 때 그녀는 더빙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더빙 덕에 그녀의 발연기가 살았다면서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인형극을 보는 것 같다고 그녀를 욕했다.동시에 선셋 스타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힘들게 촬영한 건 그녀지만 인기를 차지한 건 선셋 스타였다. 이런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자신의 오리지널 대사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또 다른 계정에 오리지널 대사 영상을 올렸다. 원래는 다들 그녀를 칭찬할 거라 예상했지만 되레 한바탕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다.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면서 다시 한번 선셋 스타를 칭찬했다.송민영은 너무도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이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마
유현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오늘 부탁할 일만 없었더라면 당장 이 자식을 발로 확 차버리는 건데! 멀쩡하게 생겨서 왜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참. 그냥 말 섞지 말아야지!’유현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얄미운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작성한 문자를 민경하에게 보내며 말했다.“경화로의 ‘화원 향료’라는 가게에서 사면 돼요. 그 집에 향료 종류가 많아서 한꺼번에 다 살 수 있을 거예요.”“고마워요, 사모님.”유현진이 자신을 무시한 뒤로 강한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분이 지나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유현진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강한서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 번째 손가락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면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타났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들의 결혼반지였는데 아름드리 펜션에서 나올 때 결혼반지도 함께 두고 나왔었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식 날 송민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강한서는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장을 떠났다. 결국 그녀는 결혼반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꼈다.“엄마가 보시고 괜히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그래. 별 뜻은 없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유현진은 생각에서 헤어나왔다. 그녀는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내 주제를 알아.”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뒤따라 내렸다.강한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강민서였다. 올해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두 달 전 친구와 함께 졸업 여행을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한주 강씨 가문의 가장 막내인 데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버지가 돌아간 바람에 집안 어른들은 특히 그녀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움찔하더니 문을 열 용기가 사라져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누구와 결혼하든 똑같다니. 그녀를 선택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 사람이 아닌 아무라도 괜찮았던 것이다.그녀는 밖에서 10분 남짓 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돌아갔다.문을 열자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신미정이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물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죄송해요, 방금 속이 좀 더부룩해서요.”신미정은 멈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확실히 안색이 창백해졌고 립스틱도 조금 벗겨진 모습에 물었다.“괜찮아? 병원 갈까?”“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신미정이 말했다.“그래도 병원에 가 봐. 임신이면 어떡해?”방금까지 신미정이 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의아했던 그녀는 이제야 신미정의 저의를 알았다. 그녀는 유현진이 임신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여 행여나 자신의 핏줄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알겠어요, 어머니.”신미정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유현진은 마치 외부인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그릇에 갈비가 놓이고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보았다. 강한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알아서 먹어.”아니, 그녀는 외부인이 아니다. 유현진은 가족 모임에 참석한 연기자로서 강한서와 각자 알아서 배역에 맞게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연기가 필요해? 좋아, 맞춰줄게.’이내 그녀는 아주 매운 닭고기 요리를 강한서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여보, 이거 먹어봐.”강한서는 움찔하더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은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강한서에게 그녀는 일부러 매운 닭고기 요리를 준 것이다.‘어떻게
신미정은 유현진의 임신 사실만을 집요하게 신경을 쓰면서 딸의 이상한 모습은 눈치채지 못하고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자궁이 찬 것까지 건강검진에 나오지는 않아. 이런 걸 치료하지 않으면 이제 임신하더라도 아이가 위험해.”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신미정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또 말했다.“둘째가 최근 시장님의 따님이랑 가깝게 지내잖아.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둘째가 너희보다 아이를 먼저 가질 거야. 그렇게 된다면 한서가 회사에서 입지가 어렵게 돼. 할머니께서 장손을 귀하게 여기는 건 잘 알잖니.”‘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강한서가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라고.’또한 그녀는 강한서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한서는 나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거야.’“네 엄마는 지금까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네 아빠도 5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 앞으로 재혼할 수도 있잖아. 그때가 되면 유씨 집안에 네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너의 것이다. 네가 의지할 사람이라고. 현진아, 너도 미래를 생각해야지.”유현진은 신미정이 그녀를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씨 일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했는데 그들에게 그녀는 바둑알에 불과할 뿐이다.“알겠어요, 어머니.”유현진은 시선을 떨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하게 답했다.신미정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유현진에게 어서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피할 곳이 없던 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이혼 한 번 쉽지 않네. 재산을 반드시 더 많이 가져갈 거야!’그녀가 약을 다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돌아왔다.목적을 이룬 신미정은 식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오후에 약속 있어서 이만 갈게. 너희는 식사 계속해.”강민서 역시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도 친구랑 쇼핑하기로 했어. 엄마, 나 좀 데려다줘요.”강한서와 유현진
솔직해지는 게 어때?강한서의 비즈니스는 모두 몇 조가 넘는 가격이었고 협력사에서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작년에도 누군가 오팔 귀걸이를 그에게 선물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강한서가 그녀에게 줬을 때 유현진은 아주 기뻤다.파티에서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강한서는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고 나무랐다.그가 몰랐던 건 그녀가 아까운 건 귀걸이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강한서에게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한 쓸모없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의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물건 말이다.유현진은 박스를 닫아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이혼할 때 자산 분할하잖아. 그때 다시 보자.”강한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현진! 너 정말 그만두지 못해? 네가 나한테 이혼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어? 네가 재산분할 운운할 자격이 있냐고! 네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든 게 내가 해준 거잖아. 이혼하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생존하기도 어려울 거야!”유현진은 손이 떨렸다. 매번 강한서의 독설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면 그는 촌철살인의 독설로 다시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한참을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강한서의 말투도 누그러졌다.“네가 잘못을 인정하면 예전의 일은 따지지 않을게. 안주인 자리는 여전히 네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퍽이나 관대하네.”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통곡하며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자비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그런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필요한 사람에게나 줘.”강한서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유현진!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줘야 돼! 호의를 베푸면 그냥 좀 받아!”“나는 그게 어려워서 말이야. 강한서, 우리 내기할래?”
유현진은 헤어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말리다 만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연기 전공하지 그랬어. 너한테 제격인 것 같은데.”차미주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만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오늘 얘랑 같이 잘 거야. 꿈에서 부자 돼야지!”“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기 전에 그것 좀 예쁘게 찍어줘.”차미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사진은 왜? 설마 인스타에 업로드하려고? 누구 샘나게 해서 죽일 일 일어?”“아냐.”유현진이 앉으며 답했다.“팔려고.”“뭐?”“내일 강한서랑 이혼하러 가. 이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남산 병원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인테리어도 마쳐서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엄마도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예전에 근처 집들 알아본 적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가격이 비싸더라고. 나한테 있는 돈으로는 집 마련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 ‘정상에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이혼하면 돈이 부족할 테니 그거라도 팔아서 보태야겠어.”“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차미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붙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 계약서만 준비하면 된다며. 왜 갑자기 탈락이래?”“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나랑 안 맞대. 투자자 한 명이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 봐. 음색이 너무 성숙하다나.”“흥! 분명 누군가 연줄로 따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정해진 결과를 번복할 수 있어? 누구랑 계약했는지 알아?”“됐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구두로 약속한 건 원래 효력이 없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차미주는 씩씩대며 “낙하산” 을 욕하다가 강한서를 욕했다.“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나였으면 바로 강한서가 바람난 증거를 모아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겠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상관없어.”유현진이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이젠 신경 쓰지 않아.”오늘 강한서가 내뱉은 말과 그녀를 거리에 버린 사건으로 인해 유현진은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이혼하여 관계를 청산하기만을
유현진은 얘기하려고 했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래, 강한서가 어떻게 내 버팀목이 되겠어.’“유현진?”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의 이상한 침묵에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몇 초 뒤,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일이 있어서 힘들겠어. 다음에 하면 안 될까?”강한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하자고? 유현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이혼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너야. 관건적인 순간에 사라진 사람도 너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창백한 안색의 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네가 편한 시간으로 정해. 무조건 갈게.”“네 장단에 맞춰 놀아줄 시간 없어!”쌀쌀맞게 답한 강한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폰을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매번 강한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는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면 기대도 없는 법이다.그녀는 홀로 쓸쓸하게 조용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한 시간이 흘렀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병동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하현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의사는 유현진에게 그녀의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유현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간병인더러 따뜻한 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그녀가 수건을 가지러 가는 모습에 간병인이 급히 말했다.“유현진 씨, 제가 할게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언니는 쉬세요. 필요하면 부를게요.”그녀의 말에 간병인 역시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수건을 적셔 하현주의 몸을 닦았다.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6년이 흘렀다. 하현주 역시 이런 상태로 6년 동안 누워있었다.그녀의 모든 근육은 수축되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몸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았는데 매일 수액으로 목숨을 유지할 뿐이었다. 몸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그녀는 언제라도 유현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인간은 이상하다. 유현진이 어릴 때 하현주
낮에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훈훈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옥상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휴대폰에는 페이스북 DM을 제외하고 차미주가 보낸 카톡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냐고 물었다.유현진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엄마 보러 왔어.”차미주는 재빨리 답장했다.“어머님은 괜찮아?”“그냥 그래.”“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찾아오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몰라.”그녀의 위로에 유현진은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고, 이내 답장했다.“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어. 저녁에 먼저 자,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알았어. 일 있으면 연락해.”유현진은 그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찰칵.”순간 주위가 번쩍 빛이 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는데, 마침 렌즈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만 쳐다보았다.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유현진은 입을 꾹 닫고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다가가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는 걸 몰라요? 비번이 뭐죠?”어리둥절한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숫자 몇 개를 말했다.“0712요.”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갤러리에는 방금 찍은 아래층 야경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휴대폰을 빼앗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상대방은 사진을 삭제할 틈이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애초에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대형 참사를 대체 어떻게 만회해야 한단 말인가.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무슨 수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죄송합니다. 단지 아래층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오해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유현진도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