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꾹 참고 방이진에게 메이크업을 해줬다. 유현진에게 당한 화풀이를, 방이진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시비를 걸며 쏟아냈다. 메이크업을 끝냈지만, 방이진은 눈화장이 대칭되지 않았다며 굳이 지우고 다시 하라고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눈화장을 다시 완성하자 그녀는 또 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얼굴이 커 보인다고 했다…지우고 다시 화장하고, 다섯 번이 넘게 반복했다. 제작진이 와 재촉을 해서야 방이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현진을 노려보며 겉옷을 입고 뚜벅뚜벅 대기실을 벗어났다. 화가 잔뜩 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얼굴이 어두웠다. 자신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을 유현진은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말 없이 열심히 유현진을 위해 메이크업을 해줬다. 유현진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한나 언니, 평소 화장할 때 어느 브랜드의 아이섀도 쓰세요?”장한나는 유현진의 말에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Mac이나 다른 국산 브랜드요.”“언니는 화장품 브랜드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장한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유현진의 말은 셰프에게 웍에 대해 잘 아는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헛소리였다!장한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뭐, 대충요.”“그러면 herseor이라는 브랜드 화장품에 대해 하세요? 좋은 브랜드인가요?”장한나는 유현진이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줬다. “herseor은 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 CC가 런칭한 메이크업 브랜드예요. 발매하지 않고 주문 제작만 받죠. 예전에 메이크업을 배울 때, 탑급 배우가 쓰는 걸 본 적 있어요. 메이크업 효과가 엄청 좋더라고요. 제가 본 화장품 중 발색이 제일 좋았어요.”“그러면 제일 좋은 거겠네요?”“좋기만 하겠어요, 레전드급이죠.”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그녀의 얼굴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특별히 실력을 발휘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이 장면은 무용학원에서 공중파프로그램에서 무대를 서는 것이었다. 전부 18, 19살의 학생들이었고, 감독의 요구에 따라 학생 특유의 순수하고 청초한 이미지를 표현해야 했기에 배우들은 전부 가볍게 기초화장만 했다. 장한나는 유현진에게 가벼운 베이스에 아이라인과 눈썹만 그려줬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고. 그녀는 심지어 유현진에게 섀도도 해주지 않았다. 연예계의 웬만한 예쁜 배우들을 다 봐 온 안창수였지만, 그도 유현진을 보는 순간은 눈을 반짝였다. 그는 곧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꼈다. 유현진은 정말이지 고귀하고 도도하며 안하무인인 이사라 역할에 찰떡이었다. 모든 배우 중, 그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유현진의 캐스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기도 마련이었다. 송민영과 방이진처럼. 방이진은 단순히 조금 전 일 때문에 유현진을 미워했다. 하지만 송민영은 질투와 불만 때문이었다. 송민영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유현진이 나대는 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유현진의 미모에 빠져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얼굴 깡패가 나타났다. 유현진이 아직 그 사람을 보기도 전에 촬영장 밖에서 팬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한열이 90년대에 유행하던 수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키가 컸고 어깨도 넓은 데다 얼굴도 작았다. 잘생긴 얼굴에 수트를 입으니 다부진 몸매가 강조되어 더욱 멋있어 보였다. 유현진은 하현주의 대학 시절 사진에서 한열과 비슷한 스타일의 남자 학생들을 봤었다. 당시 그녀는 사진들을 보며 옷이 너무 촌스럽다고 웃었었다. 인제 보니 옷이 촌스러운지 여부는 어떤 사람이 입느냐에 관계되는 듯했다. 같은 옷을 한열이 입으니 촌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지적인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러고 보니, 극 중 한열은 우등생 설정이었다. 캐릭터의 이름은 진상현이었고 역사학과에 진학 중인 학생이었다. 이사라와는
유현진은 당연히 괜찮았다. 송민영도 안창수의 제안에 이의가 없었고, 이미 유현진에게 불만이 있었던 방이진은 안 그래도 화풀이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차라지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연예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어떻게 배우의 기를 눌러놓아야 하는지, 방이진은 잘 알고 있었다. 유현진은 방이진이 눈을 내리깔며 눈빛을 반짝이는 것을 보더니 소품팀을 지나치면서 소품 통을 슬쩍 만졌다. 한열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안창수의 “액션” 소리와 함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화장실. 무용복을 입은 두 여자가 쑥덕거렸다. “얘, 이사라 씨가 왜 리드 댄서에서 교체됐는지 알아?”상대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왜?”“나도 들은 얘기인데, 누가 학교에 편지를 썼대. 편지에는 이사라 가족의 족보가 적혀있었고, 지난번 시합에 흑막이 있다고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대. 굉장히 논리정연하게 그 시합에서 이사라가 실수했던 부분을 짚으면서 당시 심사위원들을 의심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사라가 학교에서 무용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도 아닌데, 왜 이사라에게 팀 리더를 맡겼냐면서 학교에 의문을 던졌대.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그리고 편지는 학교뿐만 아니라 교육청에도 보냈나 봐. 학교에서는 학교의 명성에 흠이 될까 봐 이사라의 리드 댄서 자리를 박탈했고.”“의심을 받으니까 바로 교체했다는 건, 인정하는 꼴이잖아.”“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사라가 안무 실수를 했어. 그 상을 받을 때부터 이미 문제가 있었는데, 제대로 조사할 수나 있었겠어?”“누가 제보한 걸까?”그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리 반 애일 것 같아. 생각해 봐. 실수한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는 건, 무용을 배운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아니면 그렇게 디테일하게 알 수가 없지. 그리고 이사라가 리드 댄서 자리에서 내려오면, 누군가는 당연히 그 자리에 올라갈 테니까.”“네 말은 윤여령—”“난 그런 얘기한 적 없
안창수는 얼른 다가와 유현진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고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유현진이 일어나 앉아 창백해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말했다. “감독님, 괜찮아요. 이진 언니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너무 몰입해서 그런 거예요. 제가 너무 늦게 피한 탓이에요. 제가 제대로 서 있었으면 한 번에 오케이 되는 거였는데, 저 때문에 다시 해야겠네요.”그녀의 말에 방이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명 현진 씨 스스로 넘어진 거잖아요, 왜 나한테 그래요? 내 주먹이 돌이라도 돼요? 따귀 한 대에 피까지 토하게?”방이진의 말을 들은 안창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뺨을 때리는 장면은 안 그래도 두 배우의 합이 중요해요. 이 바닥에서 몇 년인데, 아직도 힘 조절 하나 제대로 못하는 거죠? 그리고 아까 그 표정, 유설희는 친구를 대신해 때리는 거예요. 하지만 이진 씨 표정을 봐요! 누가 보면 이사라가 이진 씨네 무덤이라도 판 줄 알겠어요!” 방이진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창수는 유현진을 쳐다보며 위로했다. “잠깐 쉬었다가 의사가 오면 현진 씨 상태 확인해보라고 할게요.”유현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혀를 씹어서 그래요. 가글만 하면 괜찮아요.”무언가를 떠올린 방이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며 말했다. “너 애초에 다치지도 않았지? 일부러 날 모함하는 거 맞지?”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진 언니, 그만 해요. 촬영에 지장 주지 마시고요.”방이진이 냉소를 지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지금 찔리는 거잖아. 감독님, 의사를 불러서 진찰해 보라고 하세요. 제가 장담하는데, 쟤 입에 상처 같은 건 없어요!”안창수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고, 표정은 어두웠다.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황을 본 송민영이 말했다. “감독님, 아무래도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심하게 다친 거면, 바로 치료를 받아야 촬영에 지장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
진희연은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록 경험이 적었지만, 두뇌 회전이 아주 빨랐고 먼저 나서서 손을 쓰기 좋아했다. 그녀에게 어떠한 이익을 바라고 접근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강한서가 그녀에게 지시한 일은... 아무래도 기우인 것 같았다. 그녀가 현장에 있는 한 누구든 괴롭힐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방이진은 중도에 나가버렸고 안창수는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그녀의 촬영을 그만두고 먼저 유현진과 한열의 신부터 찍으려고 했다.대본에서 이사라와 진상현은 죽마고우이자 커플이었다. 이사라는 다른 사람에겐 도도하고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유독 진상현에게만 평범한 소녀의 모습을 보였고 애교도 부렸다.진상현과 윤여령은 애매모호한 사이였고 극 중에서도 윤여령이 무대 위에서 쓰러진 모습을 정장을 입은 남자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적혀있었다.극 중에선 정장을 입은 남자가 누구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유현진은 그 남자가 진상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랬기에 두 사람의 감정신은 전체 스토리를 밀고 나가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이번 신은 이사라가 진상현의 아파트로 놀러 가는 신이었다. 그녀는 진상현의 집에서 샤워하다가 욕조에서 우연히 못 보던 머리핀을 발견하고 진상현을 불렀다. 그러자 진상현은 그녀에게 줄 선물이라며 이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침대 위로 올라와 함께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면이었다.촬영 내용을 들은 한열은 그만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야릇한 장면을 촬영 시작하자마자 찍으려는 것이었다.‘안 감독 미친 거 아니야?!'그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아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받고 있었고 계속 손에 든 대본만 물끄러미 보면서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한열의 시선을 느낀 유현진은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이따가 최대한 한열 씨 몸에 손대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만약 정말 손을 댔다가
“뭐 하는 거야!”이사라는 상대를 주먹으로 콩콩 치면서 발버둥을 쳤다.“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진상현은 그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그가 입을 맞추려고 하자 이사라는 그를 밀어내면서 머리핀에 관해 물었다.“너 이거 아직 나한테 대답 안 했어. 이거 뭐야? 이거 어디서 난 거야?”진상현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머리핀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에 꽂아주었다.“담배 사러 갔을 때 사장님이 잔돈이 없다고 하셔서 내가 대충 아무거나 집은 거야.”말을 마친 그는 이사라의 턱을 잡아 올리더니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잘 어울리네.”이사라는 머리핀을 빼고 한참이나 보았다. 그녀는 이내 입술을 한자리에 모은 채로 삐죽거리며 옆으로 휙 던졌다.“촌스럽고 하나도 안 예뻐.”그녀는 이내 진상현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비자가 곧 발급될 거야. 너한테 가려면 아마 반년쯤 걸리게 될 거야. 반년만 지나면 내가 바로 비행기 타고 너한테 갈게.”“반년이라고...”진상현은 시선을 떨구고 그녀를 보았다.“너무 길지 않아?”“한 학기잖아. 금방 지나갈 거야.”이사라는 뜸을 들이며 느릿하게 말했다.“보니까 그 나라 여자애들은 예쁘고,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크다던데.”“그래?”진상현은 그녀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그럼 그때 가서 자세히 구경해 봐야겠네.”이사라는 그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그를 째려보았다.“보기만 해봐!”진상현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안 그럴게.”그리고 그는 그녀의 턱을 잡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반사판이 침대 위로 떨어졌고 하마터면 한열의 손을 다치게 할 뻔했다.순조롭게 촬영을 이어가던 도중에 갑자기 흐름이 끊기게 되었으니 안창수는 바로 화를 냈다.“어떻게 된 거야? 반사판 하나도 제대로 못 들어?”반사판을 들고 있던 스태프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의
한성우는 그럴듯한 말을 했지만, 안창수가 믿을지 아닐지는 몰랐다. 어차피 그는 안창수에게 묻지도 않았으니까.한열은 아직도 감정이 잡혀있던 상태였다. 그는 유현진만 보면 귀가 빨갛게 물들었고 이내 나직하게 말했다.“혹시 아까 제가 너무 세게 내려놓은 건 아니죠?”한열은 그녀를 침대 위로 휙 내려놓은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침대 위로 유현진을 내려놓을 때 그녀는 침대맡에 머리를 살짝 부딪친 것 같았고 그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열은 부딪치는 소리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다만 유현진은 아프다고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그는 계속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아, 괜찮아요. 별로 안 아파요.”유현진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정말로 아팠으면 아까 제가 소리를 냈을 거예요.”한열은 연극배우 출신이 아니었지만 마치 배우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그와 진상현이라는 캐릭터는 아주 찰떡이었고 방금 촬영에서도 그에게서 전혀 아이돌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를 내리고 뿔테안경을 쓴 그는 마치 지적인 대학생 같아 보였고 성격도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그의 대사와 신경은 온통 진상현이라는 캐릭터에 몰두해 있었기에 그녀의 연기를 받아칠 수 있었다.유현진은 비록 천생 배우감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봐온 재능있는 배우들은 기본 연기에 대한 이론적인 수업을 받지 않고 감정 표현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이내 빨리 극 중의 캐릭터의 특징을 캐치하고 바로 연기에 몰입하였다. 물론 살짝 어색한 부분도 있긴 했지만, 만약 정말로 좋은 연기 선생님과 감독님을 만나 지적과 배움을 얻게 된다면 아주 훌륭한 배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었다.유현진은 항상 스스로 노력을 95%까지 끌어올리는 사람이었고 부족한 나머지 5%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타고난 재능이었다.그러나 한열은 바로 그녀의 95%의 노력을 5%의 타고난 재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솔직히 말해 아주 살짝 부러웠다.한열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에든 키위주스를 유현진에게 건넸다.
유현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얼른 입을 열었다.“안 감독님, 그래도 전문적인 스태프가 들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안창수가 말을 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끼어들었다.“반사판 하나 들고 있는데 어떤 전문적인 행동이 필요해요? 그냥 힘만 세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제 운전기사도 다른 재주는 없고 힘만 세거든요.”원래 반사판을 책임지던 스태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자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안창수가 입을 열었다.“그럼 일단 그렇게 하세요. 이 작가, 얼른 저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알려주고 촬영 시작하지.”“...”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들 각자가 맡은 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유현진만은 표정이 굳어있었다.애매한 침대 위치 때문에 반사판은 무조건 사람이 들고 있어야 했고 마침 그녀가 침대에 누우면 바로 반사판을 들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속으로 강한서를 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그리고 강한서를 무시한 채 한열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연기에 집중했다.“거기 여자들이 다들 예쁘고,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크다던데.”한열은 유현진을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그래? 그럼 이제 잘 관찰해야겠네.”유현진은 그를 째려보았다.“하기만 해봐!”한열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안 해.”대사를 마친 유현진은 원래 연기에 몰입한 상태였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강한서가 들어왔다.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있어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상처 입은 눈빛만 봐도 유현진은 순간 무언가가 켕기는 것 같았다.그래서 한열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한열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유현진은 황급히 사과를 했다.“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감독님, 한 번만 다시 찍어도 될까요? 제가 방금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제대로 못 했네요.”안창수는 아주 의외라는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