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모래 주머니를 차고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내려놓은 지연은 곁눈질로 재민을 슬쩍 살폈다.
그런데ㅡ
차가운 눈빛의 재민 역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헛......!"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커피잔을 통째로 쏟을 뻔했다.
순간 얼어붙은 지연과 재민 사이에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재민의 입술이 낮게 움직였다.
"......너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를, 다른 한 손에는 태블릿을 든 채 뉴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연은 혼이 쏙 빠진 얼굴로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왔다.
뒷정리를 하면서도 조금 전 마주친 그의 차가운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고,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아침 식사를 마친 재민은 식탁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그러다 불쑥 지연의 이름을 불렀다.
“송지연이라고 했던가.”
“네, 네......?”
“출근할 때 입어야 하니까, 베르사체 정장 좀 찾아놔요.”
“네?...... 아, 저...... 아, 네! 이것만 다 끝내고......”
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지금 당장.”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에 지연은 하던 일을 이 여사님에게 급히 맡기다시피 한 뒤 거대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졌다. 드라마에서나 봤지,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마치 백화점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것만 같았다.
'베......베리? 배르? 뭐라고 했더라......'
지연은 베르사체가 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민에게 다시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일단 정장이 걸려 있는 옷장에서 찾아봐야겠다......'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된 옷장에는 칼같이 다려진 정장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지연은 그 앞에서 눈만 바쁘게 깜빡였다.
그때였다.
드르륵ㅡ
드레스룸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깜짝 놀란 지연이 고개를 돌리자, 재민이 팔짱을 낀 채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연의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공포로 더욱 커졌다. 긴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그늘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유독 서늘하게 느껴졌다.
재민은 이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 저...... 그게, 아직 못 찾아서........"
지연은 말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재민은 대답 대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뭘 찾으라고 했는데?"
"아...... 그, 베? 배, 르...... 리? 그거......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연은 기억을 박박 쥐어짜 보려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죄송할 짓을 참 자주도 하네?"
재민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멈춰 서서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가 베르사체를 모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지연은 바들바들 떨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어땠어, 내 거?"
순식간에 지연의 하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네......?! 그, 그게 무슨......"
"어제, 너 내 거 봤잖아. 나가라고 눈치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던데?"
뜨끔한 지연은 다급하게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그, 그건 오해가 있으신데요......!"
그때였다.
"딸꾹! 딸꾹!"
말을 잇기도 전에 난데없이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지연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줍어하더니, 응큼한 년이었네, 이거? 너 알면서 일부러 들어왔지?"
"아, 아닙......! 딸꾹!"
재민은 픽 웃으며 지연의 턱끝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지. 이번만 그냥 넘어가 주는 거야."
말을 마친 재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행거에서 정장 한 벌을 툭 집어 들고 그대로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몇 분 뒤, 겨우 진정한 지연이 드레스룸을 빠져나왔을 때는 재민이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뒤였다.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말끔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자신을 몰아붙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현관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 여사님은 재민에게 가방을 건네며 문 앞까지 배웅했다.
재민이 구두를 다 신을 때까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따라 지연도 얼른 허리를 숙였다.
재민은 별다른 말 없이 차가운 눈길만 한 번 던지고는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
오후 3시, 재민의 사무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재민은 가죽 의자에 피곤한 몸을 기댔다.
새롭게 시작한 AI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자 생각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결혼한 뒤에도 한동안은 간신히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완전히 연락을 끊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SNS는 물론 동창들까지 수소문해 봤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그녀의 행방을 들을 수 없었다.
재민은 무심하게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둔 요란한 명함 한 장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흥신소 명함이었다.
비서에게 찾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을 때 건네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곳에 터를 잡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사람을 굳이 찾아내는 게 오지랖인 것만 같아, 지금까지 망설이며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치만...... 너무 보고 싶어. 도저히 못 참겠어......'
쌓여 있던 결재 서류를 어느 정도 처리한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이내 기사를 호출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굳이 찾아 나서는 게 맞는지에 대한 망설임이 뒤엉켜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다한다 흥신소>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네.'
간판은 형광등이 깨져 불이 군데군데만 들어와있었고, 외관에 붙은 시트지는 빛이 바래 쭈글쭈글하게 벗겨져 있었다.
허름하고 협소한 사무실은 겉보기부터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재민은 일단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못해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른 체구의 남성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재민을 발견한 남성은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하더니 손짓으로 구석의 놓인 낡은 소파를 가리켰다.
남자는 한참 이어지던 통화를 대충 마무리하곤 벌떡 일어나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재민에게 불쑥 내밀었다.
대략 10분쯤 지났을까. 다른 의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의 통화가 마침내 끝났다.
남자는 재민의 말끔한 행색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선생님?"
재민은 잠시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가 좁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 하나를 찾고 싶습니다."
지연의 마음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평소와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굳이 그를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재민의 나른하게 풀린 눈매가 묘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처음 보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지연은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재민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지연의 뒤통수를 지그시 감싸며 멈춰 섰다.점점 가까워지는 그와의 거리에 지연은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진정해야 돼......'하지만 눈치 없는 심장이 쾅쾅 소리를 내며 뛰어대는 바람에 고요한 적막이 깨지고 말았다.깊게 가라앉아 있던 재민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부드럽고 짙은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지연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재민의 시선이 지연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리다 이내 한곳에 멈췄다.그의 입가에 희미하고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재민은 지연의 목을 빽빽하게 덮고 있던 목폴라 깃을 손끝으로 살며시 끌어 내렸다."내 흔적들로 가득하네."지연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고개를 돌렸다."......마음에 들어."재민은 그녀의 붉어진 목덜미에 입술을 살포시 맞춘 뒤, 정장 재킷을 집어 들고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지연은 목덜미에 남은 그의 뜨거운 감촉을 되새기며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그 시각, 현민은 세차게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더럽혀진 제 몸을 씻어내고 있었다.몇 번이고 몸을 문질러도 불쾌한 감각은 좀처럼 씻겨 나가지 않았다.어젯밤만큼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기에,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매번 이런 식이었다.부어라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난 다음 날 아침, 낯선 여자와 마주할 때면 견딜 수 없는 쓸쓸함과 후회가 밀려들었다.온몸 구석구석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그럴 때면 그는 욕실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피부가 아릴 때까지 몸을 닦아내곤 했다.사실 어머니도 현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연의 방.준비를 마친 지연은 거울 앞에 서서 난감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빨갛게 물든 자국들이 여기저기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지연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목덜미에서 쇄골선까지, 가느다란 깃털이 살갗을 간질이듯 스쳐 갔던 그의 뜨거운 입술.부끄러움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지연은 달아오른 두 볼을 양손으로 꾹 감싸 쥐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모기에 물렸다고 할까...... 아니면 아토피가 올라왔다고 둘러댈까......'이 여사님이 이 흔적을 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게 뻔했다.지연은 옷장을 뒤적거리더니 유니폼 안에 껴입을 목폴라를 꺼내 들었다. 아직 아침바람이 쌀쌀하다지만 목폴라를 입기에는 확실히 이른 시기였다. 그래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화장대 의자에 주저앉은 지연은 이내 고개를 숙인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일은 고됐지만 고액의 일자리였고, 함께 일하는 이 여사님도 친엄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꾹 참고 버티려 했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결국 사장님의 장난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앞으로 얼마나 더 그에게 농락당해야할까.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하지만 별다른 기술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는 지연에게 세상은 너무나 냉정했다.입주 도우미는 지연이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이면 딸린 식구들을 뒷바라지하기에 충분했고, 저축까지 할 수 있었다.지연은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낡은 상자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그 안에는 온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연은 그중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집을 떠나는 지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며 동생들이 건네준 편지였다.[언니, 항상 고마워.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호강시켜줄게. 우연이랑 아빠도 내가 잘 챙길게.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전화해, 내가 혼내줄 테니까! 언니 사랑해.]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지연은 고개를 쳐
술과 담배, 뒤엉킨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 노골적인 시선과 은밀한 접촉이 오가는 곳이었다.독한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신 탓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축 늘어지고 눈꺼풀마저 무거워졌다.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주변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옆에 앉은 여자는 어느새 현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상체를 밀착시켰다.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다.그 손을 떼어내려 해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었던 탓일까. 위장이 뒤틀리며 속이 울렁거렸다. 현민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메스꺼움을 참았다.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뛰쳐나왔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복도를 비틀거리며 지나 겨우 화장실에 도착했다. 변기를 부여잡고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낸 그는 한동안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얼마나 지났을까.겨우 정신을 차린 현민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던 여자에게 부축을 받았다. 그 뒤로 호텔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현민이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새하얀 리넨 이불이 깔린 넓은 침대 위,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누워 있었다.간신히 눈을 떴지만 머리를 쪼개는 듯한 지독한 숙취가 그를 덮쳤다."으......"극심한 두통과 함께 속이 쓰려왔다."물......"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현민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침대 옆자리에는 낯선 여자가 맨몸에 이불만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현민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갔다.그 순간,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누구였지......?'기억이 날 듯 말 듯 희미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잘 잤어요?"여자는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눈가에는 번진 마스카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술의 립스틱도 곳곳에 지워져 있었다. 지난밤 두 사람 사이에 무
"현민 씨를 아세요......?"탁.재민은 젓가락을 수저받침 위에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내가 할 소린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애초에 네가 그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텐데.""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요.""무슨 사이야?"지연은 잠시 멈칫했다. 낮에 현민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스쳤다."그게......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런데 연락처까지 교환하나?""그걸 어떻게......"재민은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화제를 돌렸다."한현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집안 배경이나 가족관계라든가.""아니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라는 것 말고는......""그래? 그렇단 말이지."재민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네. 그런데...... 두 분 아는 사이이신가요?""알 거 없어."재민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지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그날 밤 현민은 미처 마르지 않은 눈물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섰다.어느새 테이블 위 식기들은 말끔히 치워지고 정갈한 찻잔과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재민이 깨뜨렸던 유리 파편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음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울을 보며 매끄럽게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그 모습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현민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어머니는 들은 체도 않고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할 뿐이었다."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였잖아! 형도 정말 어렵게 고민해서 나온 건데...... 꼭 그렇게 상처를 줘야 했냐고!""향이 참 좋다. 현민아, 너도 와서 한 잔 마셔보렴.""엄마!"울분에 찬 현민의 고함이 넓은 룸 안에 울려 퍼졌다."한현민! 너 아버지 계시는 자리에서 어디서 언성을 높이니?""엄마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매려던 사람들, 제멋대로 세아를 입에 올리던 아버지,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혼자 끓어오르는 자신까지.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그렇다고 눈앞의 지연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재민도 그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상을 이어가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애써 꿰매 놓았던 상처들이 끝내 곪아 터져버렸다. 아물었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다시 검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가슴 깊숙이 눌러 담아 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들끓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가슴속을 파고들었지만, 오랫동안 감정을 억눌러 온 탓인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분노와 좌절이 뒤엉킨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마저 고개를 들었다.재민의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지연이 까만 눈동자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눈빛.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짓궂은 심술이 고개를 들었다. 괜히 건드리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이상하게 지연 앞에서는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했다. 특유의 비누 향이 은은하게 풍겨와 재민의 코끝을 간질였다.비즈니스를 하며 만난 부자들과 성공한 경영인들에게서 숱하게 맡았던 지독한 고급 향수들과는 전혀 다른 향이었다. 꾸며 낸 것도,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닌 소박하고 익숙한 냄새.재민은 문득 그 향에 이끌리듯 지연의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재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지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질일 때마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지연은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 재민을 살폈다. 그는 얼굴을 묻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시선
쾅!"하...... 씨발."운전대를 잡은 재민이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이렇게 될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자리에 나간 건 단란한 가족과의 식사를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더는 그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각인시키려는 목적이 컸다.그럼에도 오랜만에 마주한 만큼 분노를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룸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아버지의 당황한 표정과 어머니의 심술궂은 행동은 애써 다잡은 인내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거기다 염치도 없이 감히 세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재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두 사람의 가증스러운 태도에 헛웃음을 흘렸다.'고맙네요.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여서.'빵ㅡ! 빵ㅡ!평소의 재민답지 않게 차선을 거칠게 바꿔 가며 경적을 연달아 눌러 댔다. 주변 차량들이 놀라 속도를 줄이거나 차선을 양보한 덕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속 단속 카메라를 몇 개나 지나쳤을까. 어느덧 빌라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차를 세운 재민은 문을 쾅 닫았다. 구두 굽이 바닥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한껏 날이 선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그는 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띵동ㅡ.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가 지나자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지연의 얼굴이 나타났다."다, 다녀오셨어요?"재민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만으로도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아, 제가 인터폰 조작법을 잘 몰라서......"지연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지만 재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듯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이 여사님은?" "일찍 끝내시고 쉬고 계세요.""배고파. 밥 차려.""식사 약속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또 먹으면 안 돼?""아, 그게 아니라...... 이 여사님이 해 두신 음식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