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군가 샤워 커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풀린 채 욕조에 기대어 있던 재민은 고개만 돌려 커튼 밖을 응시했다. 스윽ㅡ 기어코 샤워 커튼이 젖혀지기 시작했다. 재민은 급히 손으로 몸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얀 얼굴에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앳된 여자. 그녀는 손에 샴푸 리필 용기를 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재민 역시 당황했지만, 이내 애써 표정을 굳히며 낮게 읊조렸다. “......다 구경했으면 그만 나가지?” 여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샴푸 리필 용기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사과를 내뱉은 그녀는 부리나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떨려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제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그제야 온몸에 힘이 풀린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장님이란 분이신가? 첫날부터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 나 어쩌지? 오자마자 짤리는 걸까?’ 똑, 똑, 똑. 곧이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나와 봐요. 사장님께 소개해 드려야 하니까.” ‘헙......’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드리지...... 짤리는 건 둘째치고 엄청나게 화를 내시겠지......‘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는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옆에 서 있는 이 여사님이 보였다. ‘너무 놀라서 얼굴을 자세히 못 봤는데, 저렇게 젊은 남자가 이 집 주인이라고......?’ 놀랄 새도 없이 쭈뼛쭈뼛 걸어 나오자 순식간에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얼른 이리 와요.” 이 여사님이 다급하게 손짓하며 불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 곁에 섰다. “앞으로 부르면 바로바로 와요. 사장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이 여사님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이쪽은 하 여사 후임으로 오신 분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사장님이십니다. 인사드려요.” ‘후......’ 너무 긴장한 탓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송지연이라고 합니다.” 지연은 저도 모르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재민은 관심도 없다는 듯 지연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류만 무심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 여사님이 슬쩍 입을 열었다. “스물한 살이고, 경기도 외곽에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위스키 온더락을 한 모금을 마셨다. 몇 초간 숨이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내 재민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이 여사님, 내일은 좀 늦게 나가도 되니까 식사는 아홉 시에 할게요.”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유유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아예 관심도 없는 건가......’ 지연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이 여사님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다음 날 아침. 지연은 어제의 일 때문에 제대로 잠을 설쳤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그녀는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이 넓은 집에는 욕실만 세 개가 넘었다. 사장님이 사용하는 이층 대형 욕실을 제외하면 각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일찍 깨어난 탓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지연은 샤워를 마치고 여유롭게 준비를 끝냈다. 주방으로 나가 보니 이 여사님이 벌써 나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연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 곁에 섰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 여사님? 일찍 나오셨네요.” “잘 잤어요? 불편한 건 없었고?” ‘아니요...... 너무 불편했어요......’ “네?...... 아, 네! 너무 좋아요.” 이 여사님은 어제 있었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사실 집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무엇보다도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자신만의 방이 생긴 것이 가장 좋았다.폭신한 침대와 보들보들한 이불, 거기에 개인 욕실까지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잠시뿐일 거라 생각하니 금세 슬픈 마음이 밀려왔다. 그때, 이층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재민이었다.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온 그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살짝 젖은 머리칼 사이로 짙은 스킨 향이 풍겨왔다.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 여사님이 아침 일찍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손질해 만든 건강 주스를 재민 앞에 놓으며 인사를 건넸다. 재민은 대답 대신 가벼운 눈인사로 갈음한 뒤, 건네받은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빈 컵을 받아 들고 돌아오던 이 여사님이 지연에게 눈짓하며 낮게 속삭였다.
“지연씨 에스프레소 내린 거 사장님께 가져다드려요.” 지연은 급격하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드디어 올게 왔다. 침착하자, 침착해......’지연의 마음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평소와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굳이 그를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재민의 나른하게 풀린 눈매가 묘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처음 보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지연은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재민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지연의 뒤통수를 지그시 감싸며 멈춰 섰다.점점 가까워지는 그와의 거리에 지연은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진정해야 돼......'하지만 눈치 없는 심장이 쾅쾅 소리를 내며 뛰어대는 바람에 고요한 적막이 깨지고 말았다.깊게 가라앉아 있던 재민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부드럽고 짙은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지연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재민의 시선이 지연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리다 이내 한곳에 멈췄다.그의 입가에 희미하고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재민은 지연의 목을 빽빽하게 덮고 있던 목폴라 깃을 손끝으로 살며시 끌어 내렸다."내 흔적들로 가득하네."지연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고개를 돌렸다."......마음에 들어."재민은 그녀의 붉어진 목덜미에 입술을 살포시 맞춘 뒤, 정장 재킷을 집어 들고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지연은 목덜미에 남은 그의 뜨거운 감촉을 되새기며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그 시각, 현민은 세차게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서 더럽혀진 제 몸을 씻어내고 있었다.몇 번이고 몸을 문질러도 불쾌한 감각은 좀처럼 씻겨 나가지 않았다.어젯밤만큼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기에,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매번 이런 식이었다.부어라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난 다음 날 아침, 낯선 여자와 마주할 때면 견딜 수 없는 쓸쓸함과 후회가 밀려들었다.온몸 구석구석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그럴 때면 그는 욕실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피부가 아릴 때까지 몸을 닦아내곤 했다.사실 어머니도 현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연의 방.준비를 마친 지연은 거울 앞에 서서 난감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빨갛게 물든 자국들이 여기저기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지연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목덜미에서 쇄골선까지, 가느다란 깃털이 살갗을 간질이듯 스쳐 갔던 그의 뜨거운 입술.부끄러움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지연은 달아오른 두 볼을 양손으로 꾹 감싸 쥐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모기에 물렸다고 할까...... 아니면 아토피가 올라왔다고 둘러댈까......'이 여사님이 이 흔적을 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게 뻔했다.지연은 옷장을 뒤적거리더니 유니폼 안에 껴입을 목폴라를 꺼내 들었다. 아직 아침바람이 쌀쌀하다지만 목폴라를 입기에는 확실히 이른 시기였다. 그래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화장대 의자에 주저앉은 지연은 이내 고개를 숙인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일은 고됐지만 고액의 일자리였고, 함께 일하는 이 여사님도 친엄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꾹 참고 버티려 했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결국 사장님의 장난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앞으로 얼마나 더 그에게 농락당해야할까.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하지만 별다른 기술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는 지연에게 세상은 너무나 냉정했다.입주 도우미는 지연이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이면 딸린 식구들을 뒷바라지하기에 충분했고, 저축까지 할 수 있었다.지연은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낡은 상자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그 안에는 온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연은 그중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집을 떠나는 지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며 동생들이 건네준 편지였다.[언니, 항상 고마워.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호강시켜줄게. 우연이랑 아빠도 내가 잘 챙길게.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전화해, 내가 혼내줄 테니까! 언니 사랑해.]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지연은 고개를 쳐
술과 담배, 뒤엉킨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 노골적인 시선과 은밀한 접촉이 오가는 곳이었다.독한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신 탓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축 늘어지고 눈꺼풀마저 무거워졌다.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주변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옆에 앉은 여자는 어느새 현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상체를 밀착시켰다.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다.그 손을 떼어내려 해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었던 탓일까. 위장이 뒤틀리며 속이 울렁거렸다. 현민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메스꺼움을 참았다.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뛰쳐나왔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복도를 비틀거리며 지나 겨우 화장실에 도착했다. 변기를 부여잡고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낸 그는 한동안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얼마나 지났을까.겨우 정신을 차린 현민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던 여자에게 부축을 받았다. 그 뒤로 호텔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현민이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새하얀 리넨 이불이 깔린 넓은 침대 위,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누워 있었다.간신히 눈을 떴지만 머리를 쪼개는 듯한 지독한 숙취가 그를 덮쳤다."으......"극심한 두통과 함께 속이 쓰려왔다."물......"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현민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침대 옆자리에는 낯선 여자가 맨몸에 이불만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현민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갔다.그 순간,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누구였지......?'기억이 날 듯 말 듯 희미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잘 잤어요?"여자는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눈가에는 번진 마스카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술의 립스틱도 곳곳에 지워져 있었다. 지난밤 두 사람 사이에 무
"현민 씨를 아세요......?"탁.재민은 젓가락을 수저받침 위에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내가 할 소린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애초에 네가 그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텐데.""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요.""무슨 사이야?"지연은 잠시 멈칫했다. 낮에 현민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스쳤다."그게......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런데 연락처까지 교환하나?""그걸 어떻게......"재민은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화제를 돌렸다."한현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집안 배경이나 가족관계라든가.""아니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라는 것 말고는......""그래? 그렇단 말이지."재민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네. 그런데...... 두 분 아는 사이이신가요?""알 거 없어."재민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지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그날 밤 현민은 미처 마르지 않은 눈물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섰다.어느새 테이블 위 식기들은 말끔히 치워지고 정갈한 찻잔과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재민이 깨뜨렸던 유리 파편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음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울을 보며 매끄럽게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그 모습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현민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어머니는 들은 체도 않고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할 뿐이었다."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였잖아! 형도 정말 어렵게 고민해서 나온 건데...... 꼭 그렇게 상처를 줘야 했냐고!""향이 참 좋다. 현민아, 너도 와서 한 잔 마셔보렴.""엄마!"울분에 찬 현민의 고함이 넓은 룸 안에 울려 퍼졌다."한현민! 너 아버지 계시는 자리에서 어디서 언성을 높이니?""엄마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매려던 사람들, 제멋대로 세아를 입에 올리던 아버지,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혼자 끓어오르는 자신까지.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그렇다고 눈앞의 지연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재민도 그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상을 이어가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다.애써 꿰매 놓았던 상처들이 끝내 곪아 터져버렸다. 아물었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다시 검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가슴 깊숙이 눌러 담아 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들끓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가슴속을 파고들었지만, 오랫동안 감정을 억눌러 온 탓인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분노와 좌절이 뒤엉킨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마저 고개를 들었다.재민의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지연이 까만 눈동자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눈빛.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짓궂은 심술이 고개를 들었다. 괜히 건드리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이상하게 지연 앞에서는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했다. 특유의 비누 향이 은은하게 풍겨와 재민의 코끝을 간질였다.비즈니스를 하며 만난 부자들과 성공한 경영인들에게서 숱하게 맡았던 지독한 고급 향수들과는 전혀 다른 향이었다. 꾸며 낸 것도,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닌 소박하고 익숙한 냄새.재민은 문득 그 향에 이끌리듯 지연의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재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지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질일 때마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지연은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 재민을 살폈다. 그는 얼굴을 묻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지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시선
쾅!"하...... 씨발."운전대를 잡은 재민이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이렇게 될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자리에 나간 건 단란한 가족과의 식사를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더는 그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각인시키려는 목적이 컸다.그럼에도 오랜만에 마주한 만큼 분노를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룸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아버지의 당황한 표정과 어머니의 심술궂은 행동은 애써 다잡은 인내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거기다 염치도 없이 감히 세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재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두 사람의 가증스러운 태도에 헛웃음을 흘렸다.'고맙네요.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여서.'빵ㅡ! 빵ㅡ!평소의 재민답지 않게 차선을 거칠게 바꿔 가며 경적을 연달아 눌러 댔다. 주변 차량들이 놀라 속도를 줄이거나 차선을 양보한 덕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속 단속 카메라를 몇 개나 지나쳤을까. 어느덧 빌라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차를 세운 재민은 문을 쾅 닫았다. 구두 굽이 바닥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한껏 날이 선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그는 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띵동ㅡ.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가 지나자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지연의 얼굴이 나타났다."다, 다녀오셨어요?"재민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만으로도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아, 제가 인터폰 조작법을 잘 몰라서......"지연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지만 재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듯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이 여사님은?" "일찍 끝내시고 쉬고 계세요.""배고파. 밥 차려.""식사 약속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또 먹으면 안 돼?""아, 그게 아니라...... 이 여사님이 해 두신 음식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