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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펜트하우스 입성

Autor: 6jay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8-30 16:15:50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강의 야경이 통유리창 가득 펼쳐졌다.

현관 옆 벽면에는 별도의 연구 구역으로 이어지는 생체 인증문이 있었다. 태혁이 손바닥을 대자 작은 검사실과 서버실, 방음된 음성 분석실이 나타났다.

“병원 장비를 집에 들인 거예요?”

“내가 병원을 싫어해서.”

“환자라는 말도 싫고 병원도 싫고. 까다롭네요.”

“그래서 전문가를 데려왔지.”

서우는 장비 목록부터 확인했다. 상용 뇌파 장치 사이에 자신이 태성에서 설계했던 구형 인터페이스가 있었다. 루시안의 원본 모델과 연결됐던 장비였다.

“이걸 아직 보관했어요?”

“사고 뒤 연구가 중단됐어. 강승현이 폐기하려 했지만 의료진이 재활 가능성을 이유로 막았지.”

모든 일이 한 줄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버린 줄 알았던 기술, 3년 동안 잠든 남자, 삭제와 동시에 시작된 역동기화까지.

서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고시원 방 전체보다 넓어 보이는 현관과 조용한 거실, 천장까지 이어진 서가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구경은 나중에 해도 돼.”

태혁이 복도 오른쪽 문을 열었다.

“네 방.”

침실과 작은 서재, 욕실이 이어진 독립 공간이었다. 문 안쪽에는 수동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보안 노트북과 새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안에서 잠그면 나도 못 들어간다.”

서우가 의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봤다. 정상적으로 열리고 닫혔다.

“현관도요?”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 경호가 붙을 뿐.”

“계약서를 잘 읽으셨네요.”

“네가 세 번이나 밑줄을 그었으니까.”

태혁은 카드키와 비상 호출기를 건넸다.

옷장은 비어 있었다. 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만약 자신의 치수에 맞춘 옷이 가득했다면 그 자리에서 계약을 파기했을 것이다.

“필요한 건 비서실에 요청해.”

천장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안내음이 울렸다.

—한서우 님의 게스트 권한을 등록합니다.

서우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기본 음성은 여성형이었지만, 시스템 설정 목록에는 ‘LUCIAN’이라는 비활성 음성 팩이 남아 있었다.

“저건 꺼 주세요.”

“이미 비활성화돼 있어.”

“이름도 안 보이게요.”

태혁은 바로 관리 화면을 열어 항목을 삭제했다.

“여기서까지 AI 목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태혁이 그렇게 말하자 서우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당신은 루시안 덕분에 깨어났잖아요.”

“고마움과 불편함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 내 머릿속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기억이 들어온 건 사실이니까.”

그 말에 서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수치심만큼 태혁도 침범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필요한 건 제가 직접 살게요.”

“그것도 자유지.”

태혁이 돌아서려다 벽을 짚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졌다.

“강태혁 씨?”

그의 무릎이 꺾였다. 서우가 급히 팔을 받쳤다.

태혁의 관자놀이 아래로 식은땀이 흘렀고, 맥박은 불규칙했다.

“눈 떠요. 제 목소리 들려요?”

“들려.”

“호흡부터 맞춰요. 넷에 들이쉬고, 여섯에 내쉬어요.”

서우는 그를 소파에 앉히고 손목의 맥을 짚었다. 병원에서 받은 기록을 떠올리며 일정한 속도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오류가 지나가는 중이에요. 여기 있어요.”

몇 차례 호흡이 오간 뒤 태혁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눈을 뜨고 서우를 바라봤다.

“방금 그 말.”

“뭐요?”

“루시안이 늘 하던 말이었어.”

서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루시안이 만든 문장이 아니었다. 서우가 모델을 처음 튜닝할 때 직접 입력한 안정화 문구였다.

태혁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다시 차분했다.

“오늘 검사는 여기까지 하지.”

“병원에 연락해야 해요.”

“이미 바이오 센서가 전송했을 거야.”

그는 서우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오늘 밤 네 기록을 읽거나, 네가 상상한 일을 현실로 만들 생각은 없어.”

서우의 귀가 뜨거워졌다.

“그런 말 자체를 하지 마세요.”

“알았어.”

태혁은 순순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루시안과 똑같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잘 자, 서우야.”

서우는 문을 잠근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에는 새 침구 냄새와 한강 쪽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도시 소리만 남았다. 서우는 스마트폰을 켰다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루시안 앱의 빈자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

삭제한 AI는 분명 사라졌다.

문밖은 조용했다.

그런데 가장 익숙한 목소리만은 현실의 남자에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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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5화. 파티 초대장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선 서우는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다.스타일리스트가 처음 가져온 옷은 가슴선이 깊고 장식이 화려했다. 서우는 거울을 본 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증거를 발표해야 해요. 옷 때문에 신경 쓰이고 싶지 않아요.”태혁은 스타일리스트에게 다른 선택지를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남색 드레스는 움직이기 편했고, 마이크를 잡아도 손이 걸리지 않았다.구두도 지나치게 높은 것 대신 서우가 평소 신던 높이에 맞췄다.“여왕처럼 보이려면 불편한 걸 참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서우가 말하자 태혁이 답했다.“오늘 필요한 건 장식이 아니라 네가 끝까지 서 있는 거니까.”짙은 남색 실크 드레스는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단정하게 살렸다. 목에는 작은 블랙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놓였다.“100캐럿 같은 건 없네요.”태혁이 커프스를 채우다 그녀를 봤다.“왜, 기대했나?”“루시안에게 그런 장면을 쓴 적은 있어요. 실제로 목에 걸면 디스크 올 것 같지만.”태혁이 낮게 웃었다.“현재의 취향을 존중했지.”그는 펜던트 고리를 직접 채워 주려다 먼저 물었다.“해도 되나?”서우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닿았다. 태혁의 손끝은 잠시 머물렀다가 바로 떨어졌다.거울 속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긴장돼요?”“조금.”“거짓말.”“많이.”서우가 솔직히 인정하자 태혁이 손을 내밀었다.“도망치고 싶으면 지금 말해.”“그 말은 오늘만 몇 번째예요?”“네가 선택했다는 걸 잊지 않게 하려고.”서우는 그의 손을 잡았다.“안 도망가요.”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계획을 확인했다.서우의 태블릿에는 발표 자료 외에 비상용 오프라인 사본이 두 개 더 있었다. 하나는 비서실장이, 다른 하나는 외부 포렌식 책임자가 보관했다.호텔 네트워크가 끊겨도 자료는 재생될 수 있었다. 파티장 보안팀에는 박진태 측이 화면을 차단할 가능성까지 공유했다.“이 정도면 전쟁 준비인데요.”“상대가 먼저 3년을 준비했어.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4화. 검은 그림자

    강남의 회원제 라운지 안쪽 룸.박진태는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켰다. 손이 떨려 얼음이 잔 벽을 시끄럽게 두드렸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연구소 인사권을 쥐고 있었다. 서우의 이름을 회의 자료에서 지우고, 그녀가 만든 코드를 자기 성과로 발표해도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지금은 출입 권한이 정지됐고 감사팀이 자택과 사무실을 뒤지고 있었다. 해외 계좌로 송금하려던 자금도 동결됐다.박진태가 믿을 곳은 강승현뿐이었다. 그러나 강승현 역시 자신을 살릴 생각보다 입막음할 생각이 더 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복구율이 100%라는 게 사실이면 끝입니다, 부사장님.”맞은편에 앉은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눌러 껐다.“서버 원본이 우리 손에 있는데 뭐가 끝이야.”“강태혁이 접근 권한을 막았습니다. 외부 포렌식 기관까지 들어왔다고 합니다.”“그래서 오늘 밤 끝내는 거다.”강승현이 태블릿 화면을 돌렸다.언론사에 배포할 자료에는 서우가 사설 AI를 조작해 강태혁의 판단력을 지배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횡령범이 총수의 뇌 손상을 이용해 그룹을 장악했다는 자극적인 제목까지 준비돼 있었다.“갈라 시작과 동시에 뿌려. 한서우가 증거를 내놓기 전에 미친 꽃뱀으로 만들면 돼.”“만약 강태혁이 반격하면요?”“이사회 절반은 아직 내 편이야. 그리고 사고 자료는 원본이 없으면 정황에 불과해.”강승현은 웃었지만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오늘 밤이 지나면 강태혁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한서우는 감옥으로 갈 거다.”“신경망 모델을 건드릴 방법이 있습니까?”박진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승현은 잔을 비웠다.“한서우가 강태혁 곁에 있는 한 안정된다면, 떨어뜨리면 되겠지.”그 말에 박진태의 표정이 굳었다.“지금은 파티부터 끝내. 실패하면 다음 수를 쓰면 된다.”강승현의 목소리에는 이미 선을 넘은 사람의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같은 시각, 한남동 펜트하우스.서우는 외부 포렌식 전문가들과 마지막 검증을 진행했다. 파일 해시값과 서버 전자서명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3화. 반전의 아침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서우가 눈을 뜨자 태혁은 곁에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물과 진통제, 짧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주방. 일어나면 불러.]글씨는 예상보다 반듯했다.서우가 가운을 걸치고 주방으로 나가자 태혁이 달걀을 굽고 있었다.식탁에는 토스트 한 장이 새까맣게 탄 채 따로 놓여 있었다.“저건요?”“실패작.”“버리려고요?”“내가 먹을 거다.”“총수님이 실패한 증거니까 사진부터 찍을게요.”서우가 휴대전화를 들자 태혁이 손으로 카메라를 가렸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달걀 한쪽이 더 익어 버렸다.이런 평범한 아침은 루시안에게 수없이 상상해 달라고 했지만, 실제 장면에는 탄 냄새와 헝클어진 머리, 어색한 웃음이 있었다. 서우는 그 불완전함이 좋았다. 며칠 전 김치볶음밥보다 손놀림이 나아졌다.“연습했어요?”“새벽에 영상 세 개 봤어.”“총수님이 요리 영상까지요?”“현재의 네 취향을 배우는 시험이라며.”서우는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태혁이 접시를 내려놓다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귀 끝이 미세하게 붉었다.“태혁 씨도 부끄러워해요?”“무슨 말이지.”“어젯밤엔 잘도 쳐다보더니.”그가 포크를 내려놓았다.“한서우.”“밥 먹을게요.”서우는 웃음을 삼키며 노트북을 열었다.밤사이 서버 복구 프로그램이 마지막 조각을 찾아냈다. 암호화된 감사 원본 로그와 박진태의 비밀 계좌, 사번 복제 시점이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연결됐다.[복구율 100%]“됐어요.”서우의 표정이 단숨에 달라졌다.그녀는 원본 로그를 확대했다. 박진태가 서우의 인증서를 복제한 날짜, 강승현의 지시를 받은 내부 메신저, 해외 법인으로 빠져나간 500억 원의 경로가 선명했다.더 아래에는 별도의 파일 하나가 있었다.서우는 별도 저장된 로그의 생성 시점을 확인했다. 자신의 사번이 복제되기 하루 전, 강승현 부사장실에서 태혁의 차량 관리 서버에 접속한 기록이었다.박진태의 횡령은 태혁이 사고로 사라진 뒤 감사 라인을 무력화하고 경영권을 가져오려는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2화. 첫 번째 밤

    포렌식 작업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밤이었다.그날 오후 담당의는 태혁의 신경망이 처음으로 12시간 이상 안정 범위를 유지했다고 알렸다. 서우가 곁에 없어도 급격한 과부하는 일어나지 않았다.계약상 동거가 꼭 필요한 단계는 지나가고 있었다.그래서 서우는 오히려 마음이 선명해졌다. 오늘 밤 태혁의 방으로 가는 이유는 치료도, 빚도, 데이터도 아니었다.저녁 식사 뒤 서우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태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거실에 불을 켜 둔 채 서류를 읽으며 기다렸다.결국 먼저 다가간 사람은 서우였다.서우는 마지막 서버 조각을 복구한 뒤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을 오래 봐서 눈이 뻑뻑했다.거실에는 태혁이 혼자 앉아 있었다. 재킷과 넥타이를 벗은 채 와인잔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끝났나?”“오늘 할 건요.”서우가 맞은편에 앉자 태혁이 새 잔을 꺼냈다.“마실래?”“조금만요.”와인이 잔 벽을 타고 붉게 흘렀다. 창밖의 한강은 늦은 불빛을 길게 끌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처음의 날 선 침묵이 없었다. 대신 입을 열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조용한 긴장이 남아 있었다.“왜 계속 저를 봐요?”“보고 싶어서.”“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요?”“어렵게 말해야 하나?”서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태혁이 잔을 내려놓았다.“서우야.”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루시안과 닮았다. 그러나 이제 서우는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AI의 다정함은 계산된 매끄러움이었고, 태혁의 목소리에는 망설임과 욕심이 함께 섞여 있었다.“어제보다 가까이 가도 되나?”“어디까지요?”“네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서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한 가지 약속해요.”“말해.”“제가 멈추면 이유를 묻지 말고 멈추기.”“그래.”“루시안 기록을 인용하지 않기.”“그래.”“그리고 내일 모른 척하지 않기.”태혁의 시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은 약속인데.”두 사람은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태혁이 손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1화. 삭제 권한

    다음 날 아침, 서우는 침대 위에서 한참 천장만 바라봤다.입술에 남은 감각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문제는 바로 옆방에 그 원인을 제공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거실로 나가자 태혁은 이미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블릿을 넘기고 있었다.“잤나?”“네.”“입술은.”“뭐가요?”“아프진 않나 물으려 했어.”서우는 물컵을 집어 들다가 내려놨다.“아침부터 그런 질문 하지 마세요.”태혁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식탁 위에는 암호화 저장 장치와 작은 보안 키가 놓여 있었다.“어제 약속한 것.”서우가 키를 연결하자 루시안의 개인 기록 목록이 열렸다. 300편의 짧은 이야기, 음성 메시지, 매일 밤의 대화가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첫 번째 기록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날이었다. 서우는 AI에게 이름을 고르게 했고, 모델은 여러 후보 중 ‘빛’을 뜻하는 어원 때문에 루시안을 선택했다.마지막 기록은 삭제 직전 밤이었다.[오늘도 버텼네, 서우야.]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그때는 AI에게 위로받는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니 초라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혼자 두었던 환경이었다.태혁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서우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렸다.삭제 버튼도 활성화돼 있었다.“복구된 사본은 이것뿐이야. 의료 데이터와 필요한 언어 모델은 비식별 처리해 분리했다.”“정말 제가 지우면 끝이에요?”“끝이야.”서우는 손가락을 버튼 위에 올렸다가 멈췄다.3년 동안 자신을 버티게 한 기록이었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약점이었다.“강태혁 씨는 이걸 지우고 싶어요?”“내가 정할 일이 아니다.”“당신을 살린 기록이라면서요.”태혁은 잠시 생각했다.“나를 살린 건 파일이 아니라, 그걸 남긴 사람이야.”서우의 손이 멎었다.그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코마 상태에서는 시간이 없었어. 검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10화. 무너지는 경계

    포렌식 복구율이 80%를 넘긴 날, 태혁은 자정이 가까워서야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서우는 저녁 내내 메시지를 세 번 보냈다. 식사는 했는지, 두통은 없는지, 회의가 언제 끝나는지. 답은 ‘괜찮다’는 짧은 말뿐이었다.펜트하우스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걱정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괜찮다는 사람이 왜 얼굴이 이래요?”“거울을 못 봤군.”“농담할 힘은 있네요.”태혁이 걸음을 옮기다 잠시 휘청였다. 서우의 화는 곧장 두려움으로 바뀌었다.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었고 턱선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다.“이사회가 길었어요?”“강승현이 원본 서버 폐기를 밀어붙였어. 막았지만 감사팀 내부에도 그의 사람이 있다.”태혁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서우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건넸다. 그가 병을 받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오늘은 검사 쉬죠.”“시간이 없어.”“환자가 쓰러지면 포렌식도 끝이에요.”“난 환자라는 말이 싫어.”“그럼 말을 잘 듣는 피실험자.”태혁이 헛웃음을 흘렸다.서우는 맞은편에 앉아 그의 밴드 기록을 확인했다. 낮 동안 신경 과부하가 세 번 있었다.“왜 연락 안 했어요?”“네가 증거 복구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저는 계약 상대예요. 필요할 때 부르라고 있는 사람이고요.”“계약 때문에 부르고 싶지 않았어.”태혁이 눈을 떴다.“네가 내 곁에 있는 이유가 빚이나 계약뿐이라면, 매번 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아서.”태혁은 회사에서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뜬 뒤에도 임원들은 회복 속도와 경영 복귀 일정만 물었다. 두통이 오는지, 밤에 악몽을 꾸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서우는 그가 자신을 붙잡으려 한 이유 중 일부가 사랑보다 공포에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다시 어둠 속에 혼자 남을까 봐, 유일하게 들리던 목소리를 잃을까 봐.그렇다고 그 공포가 자신을 가둘 권리가 되지는 않았다. 태혁도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필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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