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후, 하현그룹 신년회.시아는 대기실에서 연설문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때 분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엄마!”조그마한 두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달려 들어와 시아의 다리를 왼쪽, 오른쪽에서 껴안았다.제우가 막대사탕을 치켜들며 말했다.“큰아버지가 준 거예요!”이에 제니는 귀여운 목소리로 고자질하듯 외쳤다.“아빠가 먹으면 안 된댔어!”이때 자유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며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었다.“괜찮아, 딱 한 입만. 아빠한테는 비밀이야.”2년간의 재활 치료 덕분에 자유의 기억과 지능은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비록 다리는 약간 불편한 감이 남아 있었지만, 의사 말로는 완쾌도 시간문제라고 했다.“아주버님, 애들 버릇 잘못 들이지 마세요. 지호 씨는요?”시아는 딸의 입가 묻은 설탕 자국을 닦아주며 물었다.“주시우가 복도에서 붙잡아놨어요. 은산이 돌아왔다더라고요.”그러자 시아의 손이 덜컥 떨리며 손톱이 하마터면 딸의 얼굴을 찌를 뻔했다.호텔 복도, 시우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지호를 구석에 몰아세웠다.“한 번 더 말할게요. 정은산 씨 자리 어디죠?”“주 대표님, 여자를 쫓아다니는 방법이 그거예요? 친구 남편 협박하는 건가요?”지호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안 가르쳐주면 어쩔래?’라는 태도로 맞섰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옆자리로 바꿔줘요.”“안 돼요. 그 자리는...”“이번 협력 건, 내가 3% 더 양보하죠.”“5%!”“오케이, 콜!”은산이 자리에 앉자마자 놀라 샴페인을 거의 쏟을 뻔했다.“주 대표님이 왜 여기에?”이에 시우는 잔을 받아내며 태연히 말했다.“인연이죠.”무대 위에서는 시야가 연설하고 있었다.조명이 스치듯 시우의 옆모습을 비추자, 은산은 남자의 양복 주머니에서 본 적 있는 팔찌를 발견했다.그건 바로 3년 전, 공항에서 시우가 은산에게 건넸던 팔찌였다.“주 대표님...”“3년 전 공항 쓰레기통에서 주운 거예요.”시우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자 은산은 곧장 폭발했다.“당신 날 따라다녔
퇴근 후, 시아는 정말로 저녁 자리에 나가지 못했다.왜냐하면 지호가 아예 시아를 납치하듯 집으로 데리고 와버렸기 때문이다.현관문을 닫자마자, 시아는 벽에 밀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키스를 받았다.지호의 입맞춤에는 짙은 독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마치 지난 며칠 못 한몫까지 전부 채우려는 듯 거칠고 깊었다.마침내 벽에 몰린 채 숨을 고르던 시아가 힘겹게 지호를 밀어냈다.“지호 씨, 나 선물 있어요.”“무슨 선물? 일단 중요한 일부터 마저 하고...”지호가 다시 달려들려 하자, 시아가 손바닥으로 가로막고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열어봐요.”상자를 펼친 지호의 눈동자가 커졌고 익숙한 침착한 목소리가 드물게 떨렸다.“쌍둥이?”시아는 지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초음파 사진 위의 흐릿한 두 개의 작은 점을 가리켰다.“의사 말로는 이제 8주래요. 아주 건강하대요.”지호의 손바닥이 조심스레 시아의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덮었다.“언제 알았어?”시아는 지호의 달아오른 귓불을 살짝 꼬집으며 속삭였다.“오늘 아침 검사기로 확인했어요. 원래는 석 달은 지나 안정되면 말하려 했는데 아까 당신이 너무 급해서...”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아의 몸이 불쑥 들어 올려졌다.지호가 시아를 번쩍 안아 소파에 눕히더니, 단 한쪽 무릎을 꿇고 이마를 여자의 뱃속에 붙였다.“지금부터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할게. 당신은 하루 네 시간 이상 일 못 해.”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지호 씨, 이건 명백한 직장 내 성차별이에요.”“아니, 가족 특권이지.”지호는 고개를 들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단호히 말했다.“만약 강 대표가 동의 안 한다면, 바로 어머니께 전화 걸 거야.”안영의 이름이 등장하자 시아는 바로 항복했다.임신 소식이 전해진 뒤, 안영은 그야말로 온 집안의 보약과 귀한 것들을 죄다 가져다 시아의 몸을 보살피려 했다.8개월 뒤.하민아는 방문 틈새에 바짝 붙어, 도우미 품에 안긴 두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제우
법원 정문 앞, 수십 대 카메라와 플래시가 번쩍였다.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어려웠다.시아는 인파 한쪽에 서서, 하원하가 경찰에게 이끌려 호송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죄수복 차림의 남자는 이미 예전의 기세와는 전혀 다른 초라한 몰골이었다.“피고 하원하는 악의적 살인, 허위 정보 유포, 사회적 공포 조성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선고문이 읽히는 동안 시아는 차분히 듣고 있었다.그동안 수없이 바랐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막상 이날이 오자 기쁨은 온데간데없었고 가슴속은 오히려 텅 비어버린 듯 허전했다.“끝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지호가 시아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이에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지호의 품에 기대었다.“그래요. 이번엔 정말 끝이죠.”지호는 시아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가자.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어.”공항 터미널에서 탑승권을 바라보던 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P시요?”지호는 시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그래. 당신이 예전에 경기했던 곳이잖아.”비행기가 구름 위를 뚫고 오르자, 시아는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물었다.“근데 당신이 내가 거기에서 시합한 걸 어떻게 알아요?”“나도 거기 있었으니까.”“뭐라고요?”지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P시뿐 아니라 당신이 갔던 모든 도시, 출전했던 모든 경기. 난 늘 뒤따라갔어.”지호는 휴대폰을 켜 지도 앱을 열자 수많은 붉은 점이 화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그 점들을 잇자 시아가 지나온 모든 궤적이 선명히 드러났다.이에 시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날 따라다닌 거예요?”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억울하듯 웃었다.“당신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땐 너무 어리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어. 직접 다가갔다가 거절당할까 두려워서, 그래서 멀리서만 지켜봤던 거지.”시아는 화가 났다가 또 웃음이 터질 듯 남자의 뺨을 꼬집었다.“당신! 그럼 내가 당신을 오해한 게 당연하죠! 좋아하면 그냥 찾아왔어야죠, 뭘 이렇게
안영은 멍하니 은산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고 오직 담담한 평온만이 있었다. 늘 철없고 고집스럽던 이 아이가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그러면 너 앞으로 어디로 갈 생각이니?”“아직은 모르겠어요. 아마 여행이라도 다녀올 것 같아요.”은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병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자유 씨는 어머니께 부탁드릴게요.”안영의 눈가가 붉어졌다.“걱정하지 말아. 내가 잘 지킬게.”은산은 마지막으로 병실 문을 바라본 뒤 천천히 몸을 돌려 떠났다.병원 대문 앞.시아는 이미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은산이 나오자 시아는 빠르게 다가갔고 이마의 상처를 본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많이 아파요?”은산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었다.“별거 아니에요. 작은 상처예요.”시아는 잠시 은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꽉 안아주었다.“괜찮은 척하지 마요.”은산의 몸이 순간 굳더니 이내 힘이 풀렸고 여자도 조용히 안아주며 중얼거렸다.“정말 괜찮아요.”목소리는 살짝 메어 있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은산은 곧 시아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가요. 공항까지 태워다 줘요.”“그래요.”시아는 말끝을 삼키고 고개만 끄덕였다.차 안에서 은산은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말을 꺼냈다.“동서는 사람은 결국 무엇을 위해 산다고 어떻게 생각해요?”시아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향했다.“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르죠. 그만큼 답도 다를 거고요.”은산이 씁쓸하게 웃었다.“난 한때 명품 가방이랑 한정판 보석, 수많은 사람 앞에서의 화려한 대접이 성공의 증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냥 무탈하게, 소박하게 사는 게 제일 큰 행복이더라고요.”시아는 룸미러 너머로 은산은 흘깃 보더니 불현듯 물었다.“주 대표한테 떠난다고 말했어요?”은산은 잠시 굳더니 무심한 듯 옷자락을 정리했다.“굳이 말할 필요 없잖아요. 우리 사이는 그 정도도 아니니까요.”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신호등 앞에 잠시 멈추
한 달 뒤, MG그룹 회의실.시아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한 장의 문서가 펼쳐져 있었다.“구승준 전 대표의 유언에 따라, MG그룹은 제가 임시로 관리할 거예요. 적합한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이의가 있으면 말씀하세요.”말이 끝나자 시아의 시선이 회의실을 한 바퀴 훑었는데 눈빛은 날카로웠다.이사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승준 사건 이후 MG그룹 사업은 곤두박질쳤고 파산 위기까지 몰렸다.하지만 시아가 책임자가 된다는 건 곧 하현그룹의 지원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예전의 전성기는 아니더라도 MG그룹이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좋아요.”시아는 문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늘부터 MG그룹은 하현그룹 산하 자회사가 될 거예요. 하현그룹과 전략적 협력을 체결하고, 신에너지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개발하고요.”회의가 끝난 뒤, 시아는 승준이 쓰던 사무실에 홀로 섰다.저녁 햇살이 창가로 흘러 들어와 책상 위 액자에 담긴 사진을 붉게 비추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시아는 액자를 살짝 엎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고는 조용히 돌아섰다.그 사람들과 얽혀 있던 모든 원한과 정은 지금에서야 마침표를 찍었다.구영병원, 복도의 긴 의자에 은산이 홀로 앉아 있었다.이마에 난 상처는 이미 치료받아 하얀 거즈로 감겨 있었지만, 은산의 눈빛은 멍했다.무심코 손가락이 머리의 거즈를 쓰다듬고 있자 간호사가 다가와 따뜻한 물 한 컵을 내밀었다.“보호자 분, 괜찮으세요? 다른 데는 불편한 곳 없으세요?”은산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작은 상처예요.”간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한숨만 쉬고 돌아갔다.그때, 복도 끝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고 누가 오는지 발소리만 들어도 조급한 마음이 느껴졌다.안영이 급히 다가와 은산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아가야!”은산은 고개를 들어 안영을 보자
지호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의를 내던지고 급히 달려왔다.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걸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단단히 끌어안았다.“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시아는 힘없이 지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 나를 지키려고...”지호는 팔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어떤 위로도 공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다음 날, 뉴스 헤드라인이 온통 뒤덮였다.[MG그룹 대표, 아내와 함께 투신, 원인은 감정 문제」[MG그룹 주가 폭락, 이사회 긴급 소집][전 연인 강시아, 뜻밖의 최대 수혜자?]쏟아지는 기사 속에서 시아는 무표정하게 승준이 남긴 서류들을 넘겼다.주식 양도 계약서, 위임장, 유언장 모두가 또렷하고 확실했다.승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걸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구씨 저택.집사는 손이 떨리는 채로 신정숙에게 비보를 전했다. 그때 신정숙은 한가롭게 꽃꽂이하고 있었다.“사모님, 대표님이...”가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신정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허튼소리!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어? 오늘 점심에 나랑 밥 먹기로 했는데!”신정숙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승준의 방문을 벌컥 열더니 텅 빈 방 안을 향해 울부짖듯 외쳤다.“승준아? 엄마랑 숨바꼭질하는 거지? 엄마가 못 찾겠어.”눈시울이 붉어진 집사가 뒤따라 들어갔을 때, 신정숙은 이미 어린 시절 승준의 사진첩을 껴안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우리 착한 아들은 엄마 말 잘 듣지. 엄마 두고 떠날 리 없어.”그날 오후, 신정숙은 결국 요양원으로 이송됐다. 바로 시아의 외할머니가 한때 지내던 곳이었다.요양원 뒤 정원, 시아는 작은 나무 그늘에 서서 신정숙을 지켜보았다.신정숙은 낡은 인형을 품에 안고, 자장가 같은 허밍을 반복하고 있었다.하룻밤 사이 눈처럼 하얗게 변한 머리칼이 햇빛에 비쳐 더욱 쓸쓸해 보였다.옆에서 작은 간호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사모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