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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eur: 등불
신소은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정실인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하연우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지난번 절에서, 마마를 뵈었사옵니다.]

[참으로 가엾으십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내를 붙들고 계시다니.]

[저하께서 한때는 마마를 지극히 연모하셨을지 모르나, 지금 그분의 눈에는 저밖에 없사옵니다.]

[저하께서 저와 얼마나 많은 입맞춤을 나누셨는지, 또 얼마나 저를 품으셨는지 마마께서는 아시옵니까? 저하께서 한 번 다녀가시면 보름이 지나도 몸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고, 저는 사흘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하였사옵니다. 심지어 제가 다른 사내와 말 한마디 섞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저하께서는 질투를 참지 못하고 그 사내를 베어 죽이셨사옵니다. 저하께서 저를 얼마나 연모하시는지, 마마께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신소은은 아마도 이 편지를 읽은 하연우가 무너져 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성을 잃고 발악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연우는 그저 조용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을 뿐이었다.

이제는 무너져 내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혁을 향한 하연우의 사랑은 한때 모든 것을 태울 듯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여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 불꽃은 점점 작아져 이제는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하연우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신소은은 이후에도 몇 차례 몰래 편지를 보내 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자, 이혁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태의가 떠난 뒤, 이혁은 하연우를 꼭 안은 채 좀처럼 손을 놓지 않았다.

“그동안 나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소. 다 내 잘못이오. 부인에게 고생만 시켰소.”

이 말을 듣고 하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저하께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제가 감사드려야 마땅하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때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두 사람이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받는 모습은 왠지 낯설고 서글펐다.

이혁은 그녀의 낯선 태도를 눈치챈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감사라니?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소.”

하연우는 곧장 검지를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저하, 부디 건강히, 오래오래 살아야 하옵니다.”

나 없는 세상에서도, 부디 잘 살아가기를.

그리고 나서 죄책감과 후회, 자책 속에서 한 평생을 보내거라.

이혁은 마침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검지를 잡아 가볍게 입맞춤했다.

“지난번 생일 때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소. 해서 그동안 너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였소.”

하연우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끝내 눈가까지 닿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저하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혁은 그녀의 무심한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하연우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이혁은 진작부터 계획을 세워 둔 듯했다.

정월대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터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재주를 부리는 광대들과 소리꾼들의 공연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축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은 하연우를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정중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평안부를 하나씩 건네며 축복을 전했다.

“태자비 마마, 생신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렇게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전한 뒤, 갑자기 경성의 밤하늘 위로 수많은 공명등(孔明灯)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공명등마다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연우가 해마다 평안하고 안락하게, 근심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노라.]

그는 이토록 세심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연우는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연우는 이혁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만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연우야, 생일 축하한다. 혹 바라는 것이 있느냐?”

이혁은 미소를 지으며 하연우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하연우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했다.

“앞으로의 날들은 솔직하고 즐겁게,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의 하연우라면, 분명 소원을 빌 때 그와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함께하길 원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소원에는 오직 ‘나’만 있을 뿐, ‘우리’는 없었다.

이혁은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반드시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하겠노라.”

이번 생일, 그는 정말 정성을 다했다.

두 사람이 축하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그의 호위가 갑자기 다가왔다.

하연우는 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이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호위가 낮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하연우를 향해 돌아섰다.

“연우야, 처리해야 할 정무가 있소. 여인, 우선 궁으로 돌아가거라. 나 또한 곧 돌아가겠소.”

그 말을 남기고, 이혁은 서둘러 떠났다.

하연우는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궁으로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역시나 이혁은 정무 때문에 간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둘러 향한 곳은 궁 밖의 한 별채였다.

한편 신소은은 이미 별채 밖에 서 있었다.

이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멀찍이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하연우는 신소은을 바라보는 이혁의 다정한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은 자신을 향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생일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던 사람이, 돌아서자마자 한 걸음에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하연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등줄기까지 서늘해졌다.

그녀는 별채 안의 두 사람이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혁은 마치 신소은에게 깊이 빠져든 사람처럼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뜨거웠다.

누가 보아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저하... 읏... 조금만 살살해 주시옵소서. 호위들이 보고 있사옵니다.”

“넌 내 사람이니라. 헌데 누가 감히 볼 리가 있겠느냐. 혹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당장 그 두 눈을 뽑아 버리겠노라.”

“소은아, 너는 어찌 이리도 사람의 혼을 빼앗는 게냐. 너와 함께 있으면 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하연우는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혁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신소은을 품에 안고, 겉옷을 벗기며 서둘러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하연우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촛불이 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홀로 걷는 밤거리.

“우르릉! 쿵광!”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고, 곧 비가 내릴 기세였다.

예전에는 천둥소리만 들어도 몸을 떨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마치 들리지 않는 듯 느릿하게 걸었다.

지금의 하연우는 영혼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막막한 어둠 속을 홀로 걸었다.

이내 거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고,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하연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 보았던 광경, 그 기억을 씻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빗속을 묵묵히 걸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이혁은 거듭해서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밤새도록 빗속을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었다.

하연우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한때 별빛처럼 반짝이던 두 눈에도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궁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문을 들어서자, 하연우는 걱정으로 굳은 얼굴의 이혁을 마주했다.

“연우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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