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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믿었던 우리
서로를 믿었던 우리
Auteur: 등불

제1화

Auteur: 등불
“그대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 왔소.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지 보시오. 혹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 다시 사람을 보내 구해오라 하겠네.”

이윽고 칼을 찬 금군들이 밖에서 차례로 들어와 커다란 상자 여러 개를 내려놓았다.

상자 안에는 화려한 비녀와 장신구, 아름다운 치마저고리, 그리고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혁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낌없이 재물을 들여 궁 안을 채워 넣었다.

하연우는 조용히 이혁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십 년 가까이 사랑해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십 년 전, 하연우는 시스템에 의해 이 낯설기만 한 이 세계로 오게 되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현 세상의 태자인 이혁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혁은 누구보다 자유분방했고 구속을 싫어했다. 늘 빛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세계에서 온 하연우와 같은 외로움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궁궐도 위험한 곳이었지만, 동궁은 그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또한 황제 노릇도 쉽지 않았지만, 태자로 살아남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하연우는 그의 고독과 상처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래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머물면서 수많은 생사의 고비와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함께 지내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공략 임무를 완료했을 무렵, 이혁은 이미 그녀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하연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를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그녀는 세계 이탈을 포기하고 그의 곁에 남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떠날 생각이었다.

금군들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은 뒤에도 하나같이 이혁의 편을 들었다.

“마마, 저하께서 계실 때에도 늘 마마를 그리워하셨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저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마마 곁으로 돌아오시려고 며칠 밤을 새워 정무를 처리하셨습니다. 칠 일은 걸릴 일을 사흘 만에 끝내신 것도 모자라, 밤낮없이 말을 달리시다 준마 세 필을 잃으셨지요.”

“허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저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경성에 모르는 이가 없사옵니다.”

이혁은 하연우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을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렇다, 이혁이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사실은 경성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내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밤하늘 가득 불꽃을 터뜨리고, 수천 개의 풍등을 띄워 주었고, 내가 아플 때면 정무도 뒤로한 채 한숨도 자지 않고 곁을 지켜 주었고, 내게 줄 선물을 고르려고 세상 곳곳을 뒤져 온갖 진귀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내가 살짝 미간만 찌푸려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고, 더구나 내가 평생 단 한 사람만 사랑해 달라 한 그 말 한마디에, 금란전(金銮殿)에서 사흘 밤낮을 꿇어앉으면서도 나 외의 그 어떤 여자도 동궁에 들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그토록... 그토록 사랑했었다.

하지만 하연우는 그저 말없이 시선을 떨궜다.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빛을 잃어 갔다.

금군들이 물러난 뒤에도 이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랬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는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사람 같았다.

“연우야, 내가 잘못했소. 내년 생일에는 꼭 온종일 그대와 함께하겠소.”

하연우는 그런 이혁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가 토라질 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몇 번이고 다정하게 달래 주곤 했다.

세상 누구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녀 앞에서만은 한 번도 자존심을 세운 적이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하연우가 나직이 말했다.

“화난 거 아닙니다. 그저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혁은 하연우를 번쩍 안아 올렸다.

“허면 같이 쉬자.”

깊은 밤, 먼 길을 달려온 탓인지, 이혁은 하연우를 품에 꼭 안은 채 금세 잠이 들었다.

하지만 하연우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혁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혁이 벗어 둔 옷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매 속 깊은 곳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비녀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그 위에는 그가 선물할 사람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소은.

본명은 신소은이었다. 몇 년 전, 이혁이 전장에서 데려온 여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태자는 결단력 있고 냉혹한 성정의 인물이지만, 오직 태자비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하다고 했다.

그녀가 그의 유일한 예외라고들 했다.

그러나 이제, 그 특별함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이혁은 본디 자비를 베푸는 성정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소은을 마주한 순간, 그는 그녀를 데려왔다.

훗날 그는 하연우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부모를 모두 잃은 어린 계집아이가 전란 한복판에 홀로 남겨져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모습을 보고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하연우가 마음 상할까 염려하여 신소은을 궁으로 데려오지는 않았고, 대신 궁 밖에 집을 마련해 주고 정성껏 돌보았다.

그는 평소 신소은에 대해 거의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마치 그저 한순간의 선의로 거두어 준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하연우만은 알고 있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가 정무를 핑계로 궁을 나설 때마다, 사실은 신소은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시전 거리를 거닐었고,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사 주었으며, 온갖 정성을 들여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가 정무가 바쁘다며 자신에게는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한다고 했던 날들에도, 신소은에게는 어김없이 편지가 전해졌다.

매일 한 통씩,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궁 밖 별채였다. 그곳에서 신소은과 밤이 깊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래서 결국, 하연우의 생일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평생 그녀만을 사랑하겠다 약속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녀를 속인 채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

비녀를 바라보던 하연우의 눈빛은 담담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수없이 상처 입어 무뎌져 있었다.

하연우는 비녀를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다시 제자리에 넣어 두고 누웠다.

그때 갑자기 창밖에서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요란한 천둥소리가 떨어지자, 곁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이혁이 무의식중에 몸을 돌려 하연우를 끌어안았다.

잠결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연우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소...”

하연우는 천둥을 무서워했다. 그 사실을 이혁은 잠결에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 그가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의 거짓말을 수없이 마주했을 때도, 그 비녀를 발견했을 때도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혁이 잠결에 흘러나온 이 한마디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하연우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 그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숨겼을까.

다음 날 아침.

하연우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늦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혁이 조회에 나가지 않고 직접 그녀의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연우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동궁전에 들어온 뒤, 하연우는 어질고 현숙한 태자비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손수 음식을 배우려 했는데, 실수로 그만 손을 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이혁은 금세 눈가를 붉혔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 주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하연우가 부엌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수라는 숙수에게 맡기면 되오.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배워 만들겠네. 허니 너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시오. 알겠는가?”

그는 그녀를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녀가 납치당했을 때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흑풍채(黑風寨)를 통째로 쓸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을 고백하듯 다정한 말을 건넸다.

남자가 첩을 두는 일이 당연한 세상에서, 이토록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남자가 어디 흔했겠는가.

하물며 그는 태자였다. 그 시절, 다른 황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고 정에 죽고 정에 사는 사람이라며 놀려 대곤 했다.

이혁은 그런 놀림을 받아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자신은 오직 하연우만 연모한다고.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하연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이혁이 직접 아침상 들고 들어왔다.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번졌다.

“일어 났는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소. 이리 와서 수라부터 드시오.”

하연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생일이었는데, 아직 소원을 빌지 못했네요.”

이혁은 옅게 웃었다.

“괜찮소. 내년에 빌면 되지 않소. 연우야,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수많은 날이 남아 있지 않는가.”

앞으로...

하연우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혁, 우리에겐 이제 더 이상 앞으로가 없어.

아침상을 마친 뒤, 이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연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오늘은 휴일인데, 또 궁 밖으로 나가시려는 건가요?”

이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정하게 웃었다.

“처리해야 할 정무가 있소.”

하연우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문득 어젯밤 그의 옷에서 찾아낸 비녀가 떠올랐다.

정말 정무 때문일까, 아니면 그 비녀를 궁 밖의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어 서두르는 것일까.

하연우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이혁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 있느냐?”

하연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도 궁 밖 구경을 하고 싶어서요.”

그 말에 이혁의 웃음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궁 밖은 위험하오. 지난번 흑풍채 놈들에게 납치당했을 때를 벌써 잊었소? 그대를 잃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대는 모를 것이오. 궁 밖에 맛있는 것이나 재미난 것이 있으면 내가 모두 가져다주겠소. 허니 오늘은 궁에 있는 게 어떠한가?”

하연우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죄책감이나 당황한 기색이 비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눈빛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정말로 그녀를 걱정하고, 그녀의 안위를 위해 만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하연우의 가슴이 욱신거리듯 아파 왔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허나 오늘은 궁 밖에 나가 보고 싶습니다. 태자께서 곁에 계시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역시나 그 말에 이혁은 잠시 망설였다.

한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연우를 가장 먼저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난처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정무가 너무 많소. 다음에 꼭 시간을 내어 함께 가 주겠네. 어떠한가?”

말을 마치고, 이혁은 몇 마디 더 그녀를 달랜 뒤 급히 궁을 나섰다.

멀어져 가는 이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연우는 문득 얼굴이 축축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끝으로 훔쳐 보니,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연우는 텅 빈 동궁에 홀로 남겨졌다. 한참 뒤 눈물을 닦아 낸 그녀는 조용히 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스템은 하연우에게 이 세상과 작별하라며 한 달을 주었지만, 실은 떠나기 전 모든 흔적을 정리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먼저 하려는 일은, 바로 물건을 버리는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면 그녀의 육신과 영혼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연우는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흔적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더 이상 하연우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야 이혁도 다시는 그녀를 찾지 못할 테니까!

하연우는 시녀들과 금군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동궁 안에 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혁을 위해 직접 도안을 그려 만들어 준 옷, 손수 깎아 만든 기묘한 장식품들, 그리고 이혁의 모습을 정성껏 옮겨 담은 초상화까지...

그 시절의 그녀는 천진난만했다. 게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만큼, 늘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기발한 발상들을 내놓곤 했다.

새로운 것들을 만들 때마다 이혁은 어김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대체 어떤 선녀를 처로 맞이한 것인가? 사람들은 모두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오. 태자라는 사람이 오직 한 여인만을 위해 동궁을 비워 두고, 평생 그 여인 곁만 지키겠다 하니 말이오.”

“허나 그 누구도 모르오. 이 천하를 모두 잃는다 해도 괜찮지만, 연우만은 결코 잃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언제나 천하보다 그녀가 더 중요하다 말하던 사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한때 온전히 그녀만을 향하던 마음은 이제 둘로 갈라져 있었다.

절반은 그녀에게, 나머지 절반은 다른 여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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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를 믿었던 우리   제17화

    “난 곧 죽어.”이혁이 가볍게 웃었다.“알잖아. 난 성공할 수 없어.”그를 바라보는 김문수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후회해?”“네가 말하는 게 이 세계를 따라온 걸 후회하냐는 뜻이라면, 후회하지 않아.”이혁이 담담히 말했다.“하지만 바람피운 걸 말하는 거라면, 정말 후회하지.”그는 김문수 손에 들린 반지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나와 연우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이었어. 내가 잘못만 하지 않았더라면, 네 차례가 올 리 없었겠지.”“세상에 만약은 없어.”김문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연우는 지금 행복해?”결국 김문수는 비행기에 올랐고, 이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서둘러 하연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도착하자마자 그녀에게 발로 한 대 걷어차였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화가 난 새끼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고 성질을 부리는 것 같아 김문수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두 사람은 오로라를 보러 갔다.새하얀 설원에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하늘빛이 반사되고 있었다.차가운 바람에 하연우의 얼굴은 새빨갛게 얼었고, 속눈썹에는 눈송이가 가득 내려앉았는데, 그 모습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김문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네가 많이 두려워한다는 거 알아.”그가 진지하게 말했다.“그래서 너에게 어떤 약속도 요구하지 않을 거야. 하연우, 난 널 사랑해. 그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그는 오직 그의 손가락에만 꼭 맞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직접 자신의 손에 끼우며 말했다.“언젠가 네가 원한다면 커플링 준비할게. 하지만 지금 이 반지가 묶어 둘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하연우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가를 맴돌았다.김문수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부드럽게 물었다.“행복해?”“응.”이 질문은 결국 본인이 직접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이혁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었

  • 서로를 믿었던 우리   제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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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를 믿었던 우리   제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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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연우 씨. 저 말에 속지 마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문수만큼 연애사가 화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심태준은 입맛을 다시며 꼬치를 하나를 하연우에게 건넸다.“난 연애 딱 한 번 해봤으니까, 필요하면 나한테 와요.”곧바로 김문수의 손바닥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하연우는 두 사람이 워낙 친해서 장난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다가 슬쩍 김문수에게 물었다.“오늘은 왜 모였어? 엄청 재밌어 보이는데.”김문수는 인기가 많지만 이곳에서는 확실히 보기 드문 손님이었고, 하연우도 그가 이런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별똥별 때문이지.”김문수는 이곳에 온 뒤로 이상할 정도로 말수가 적어졌지만, 하연우가 말을 걸면 언제나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서 데리고 왔어.”그 말에 하연우는 눈빛이 멍해졌다.모닥불빛이 김문수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쳐 반짝였다.한참 뒤 그가 웃으며 말했다.“NASA 발표로는 그렇다는데, 꼭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어. 안 떨어지면 나 뭐라고 할 거야?”하연우는 고개를 저었고,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에선 말랑말랑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김문수는 꼭 어린아이 같았다.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사람.그 사실이 하연우에게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김문수는 돈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라 술집 매출 같은 이야기도 말이 되지 않았다.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답이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우는 지난 연애에서 얼마나 크게 상처받았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회사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녀는 마치 사랑의 도주라도 한 듯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별똥별을 보러 왔다.황당한 일이지만 재미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아마 이혁이나 회사 상사가 보낸 메시지

  • 서로를 믿었던 우리   제13화

    그는 굳이 업무 이야기를 핑계로 삼지도 않았다.마치 시냇가에 서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요정 같아, 하연우는 도저히 그 손을 외면할 수 없었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갈래.”하연우는 벌써부터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컴퓨터에 로그인된 사내 메일에서 '띵'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전체 메일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새 업무 지시일 수도 있고 공지일 수도 있었다.하연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열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그런데 옆자리 룸메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하연우의 어깨를 툭 치며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연우야, 이거 좀 봐...”하연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기울였다.그리고 곧 눈을 크게 떴다.메일에 첨부된 사진을 본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에게 온 메일을 직접 열어 보았다.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귀사 스폰서 받는 인턴 전격 해부! 어린 나이에 도심 아파트 매입, 술집에서 남성 접객원과 술자리, 새로 온 상사와도 수상한 관계?]사진 속 인물은 전부 하연우였다.김문수와 바짝 붙어 앉아 있는 모습, 이혁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 분양사무소를 드나드는 모습.사진들은 전부 흐릿했고,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지만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만으로도 충분했다.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느새 호기심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하연우의 인턴 기간이 짧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열심히 일한 결과였다.김문수와 술을 마신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자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었다. 그렇다면 호감 가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하연우는 차갑게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상황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다들 성인이다.대놓고 그녀를 추궁하는 사람은 없지만 수군거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룸메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우야...”“괜찮아.”하연

  • 서로를 믿었던 우리   제12화

    하연우는 점심을 먹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일어나 씻고는 최대한 빨리 외투를 걸친 뒤, 잔뜩 굳은 얼굴로 집을 나섰다.그 디자이너는 예약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개인이 워낙 강력하게 추천한 데다, 보여 준 디자인 초안도 하연우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집의 조건과도 잘 맞았다.그래서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하연우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인테리어 전에 간단히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으니, 지나치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직원의 안내를 받아 김문수 곁으로 걸어갔을 때, 하연우는 순간 멍해졌다.“자리 잘못 온 거 아닌가요?”그녀가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잘못 온 거 아니야.”김문수는 담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 하연우 씨. 김문수입니다. 오늘부터 연우 씨 집 인테리어를 맡게 된 디자이너예요.”어젯밤까지만 해도 함께 술을 마시고 주사위 게임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중개인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디자이너가 되다니.하연우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김문수를 바라보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그가 풋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었다.“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그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며, 하연우의 따뜻한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하연우.”하연우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김문수는 다정하게 메뉴판을 건넸다.“디저트 좀 먹어. 뭐 먹고 싶어?”주문을 마친 뒤에야 하연우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김문수가 평범한 바텐더나 마케터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두 신분이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정말 몰랐다.“미안해. 네가 내 고객일 줄은 몰랐어.”김문수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거짓말한 건 아니야. 그 클럽은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고, 나는 대신 가서 자리를 봐 주던 것뿐이야.”“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난 연우에게 있어 을인 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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