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
성격하고 매너는 몰라도 얼굴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남편감인것 같은데?"
정하의 시선은 마치 이미 걸려든 사냥감을 감상하는 포식자처럼 여유롭고 집요했다.
"세 번."
"말씀하신대로, 세 번 만나보죠. 그쪽이 성격하고 매너가 좋은지는 지금 본 바로는.. 잘모르겠어서."
그렇게 그의 제안은 다영의 수락으로 극적타결됐다.
그녀의 인생에 다시 한 번 큰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세 번.'
다영이 내밀었던 조건을 곱씹으며, 정하는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후 6시.
다영이 출강하는 평생교육원 앞은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수강생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강생들 사이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첫 만남 때의 충격적인 분장 대신, 화장기 옅은 수수한 얼굴에 움직이기 편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고된 강의 탓인지 그녀는 뒷목을 주무르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
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가늘한 목선과 자그마한 체구.
투명한 피부와 동그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딱 내 취향이네.'
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문 앞과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뒤,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결국, 그가 차에서 내렸다.
정하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모델 뺨치는 훤칠한 키에 살짝만 봐도 운동한 티가 나는 탄탄한 체격, 화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그 뒤로 주차된 최고급 블랙 세단까지.
평범한 일상과는 지독하게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허다영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고 선명한 목소리에, 땅만 보고 걷던 다영의 고개가 그대로 멈추었다.
'설마.'
서서히 고개를 들자 눈 앞에 거짓말처럼 우뚝 서 있는 정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졌다.
"왜 여길.."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쳐메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연락도 안받길래, 또 퇴짜 놓은건가 싶어서 잡으러 왔어요."
홍당무처럼 얼굴 색이 달아오른 다영이 서둘러 차에 그를 밀어넣은뒤, 조수석에 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모습으로 여기를 오면 어떻게 해요!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제가 어떤 모습인데요?"
사실 그의 복장은 그저 퇴근한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는 없었다.
그가 입어서 태가 달라보일 뿐이었다.
남자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채, 고개를 돌리고서는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저희 어디가는건데요?"
정하는 그런 모습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은채, 답했다.
"맞춰봐요. 어디 가고 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여자의 시니컬한 태도에 그가 힌트를 주겠다는 듯 뒷자석을 흘겨보았다.
다영이 시선이 그를 따라 자연스레 뒷자석으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 위에는 금박이 박힌 검은색 편지봉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봉투 틈 사이로 보이는 영문 필기체.
편지봉투를 연 순간, 그녀가 놀라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제이슨 특별전 티켓 맞죠..?"
일반인들 조차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알정도로 이미 전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화가였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거장의 전시회였기에, 미술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표를 구하지 못해 안달난 바로 그 전시였다.
다영도 구하기 위해 노력 해봤지만, 이미 끊어진 썩은 동아줄 신세인 다영에게 티켓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 전시회의 vip 티켓이라니.
새삼스레 그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실감이 났다.
그녀가 좋아하는 얼굴을 확인한 정하가 나른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아주 나이스한 성격이라고."
"이걸 어떻게 구하셨어요? 아니, 그보다 저한테 왜 이걸..."
" 남들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본인 안목도 그대로 썩히기에는 아깝잖아요."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관심사를 정확히 파악하고 준비한 다정한 배려가 깔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 놀랐던 가슴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게다가 밥만 덜렁 먹고 헤어지기엔, 세 번이라는 기회가 나한텐 너무 짧아서요."
정하가 신호 대기 중 브레이크를 밟으며 다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론 자신이 없다는건 아니고."
짙은 눈썹 아래, 다영을 옭아매듯 빤히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
"이 정도면, 합격점 줄 만합니까?"
평소 같았으면 그의 오만한 태도에 코웃음을 쳤겠지만, 저 귀한 티켓을 보고도 튕기는 건 미술학도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남자가 자신을 위해 들인 시간과 수고가 빤히 보여서 다영은 차마 다시 한 번 까칠게 굴 수는 없었다.
"...뭐, 나쁘진 않네요."
다영이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는 곧 도심 한복판, 프라이빗 갤러리 지하주차장에 멈춰 섰다.
일반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로비와 달리, 정하가 안내한 VIP 전용 입구는 한산하고 고즈넉했다.
큐레이터가 건네준 팜플렛을 받은 뒤, 그녀가 함께 따라나서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문가가 이미 여기 있어서."
다영이 그런 남자를 설마, 나? 라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설명해줄 수 있잖아요. 서양화가 전공이라면서."
남자가 그녀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자극했다.
"당연히 해줄 수 있죠. 그런데 제 설명 들으시면 이제 전시회 가실때마다 부르실 것 같아서 그런거지."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엄청난 자신감을 보였다.
웰컴 샴페인 잔을 건네며 정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저 그림은 옆에 있는 그림하고 표현방식이 다른 것 같은데."
"이 작가는 빛을 쓰는 방식이..."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작품에 푹 빠져 반짝이는 다영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기대한 작품.
<사랑의 단죄>
들뜬 목소리로 한참 설명을 이어가던 다영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고대하던 작품이 눈 앞에 있다는 경외감때문이었으면 좋았으려만.
뒤편에서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환청이길 바랐건만, 고개를 돌린 곳에는 기어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허다영...?"
정하의 병실을 나온 다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 현 남자친구 '하정하'. 전남친과 이름도 같고, 늘 다영의 곁에서 묵묵히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남자. 다영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할 말이 있어.]약속 장소는 두 사람이 자주 찾던 조용한 공원 산책로 근처의 카페였다. 다영이 도착했을 때, 정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장 화장실 근처에서 다영의 엉망이 된 모습을 목격하고, 신랑의 턱시도에 묻은 눈물자국을 발견했던 그날 이후로 그 역시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는지 얼굴이 다소 야위어 있었다.정하는 다영이 다가오자 늘 그랬듯 다정하게 의자를 빼주려 일어섰다. 하지만 다영은 그 손길을 마다하고 맞은편 자리에 딱딱하게 앉았다."다영아.""……우리 헤어지자."인사도 없이 튀어나온 다영의 단호한 한마디에 정하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카페 안의 소음이 순간 둔탁하게 꺾여 나갔다. 정하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다영의 여윈 얼굴을 깊게 훑었다."……왜."단 한 단어, 낮게 깔린 그의 물음에는 억눌린 감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다영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과거의 통곡과 상처, 그리고 비틀린 집착의 기억을 마저 털어놓은 차지연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카페 안의 정적은 한층 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연은 멍한 눈으로 다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다 알겠어?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그 사람을 짝사랑했는지.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너한테 질투를 느끼고, 그 사람이 만든 가짜 무대 위에서 악역을 자처했는지."차지연의 눈빛에는 더 이상 예전의 날 선 독기도, 오만한 위엄도 없었다. 그저 사랑받지 못한 자의 깊은 상처와 허탈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정하가 너한테 청첩장 보낸 것도, 나랑 가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전부 네가 자기를 미워하게 만들어서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 위한 거였어. 그 사람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오직 너 하나만 생각했으니까."지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글라스를 다시 써서 붉게 짓무른 눈가를 가린 그녀는 트렌치코트 깃을 여몄다."나도 이제 지쳤어. 그 사람 옆에서 가짜 아내 노릇 해주는 것도 오늘로 끝이야. 허다영…… 너한테 사과 같은 건 안 해. 하지만 그 사람한테 가봐. 길어야 몇 달 안 남았으니까."차지연은 다영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딸랑거리는 문가 종소리와 함께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졌다.홀로 남겨진 다영은 식어버린 아메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정하의 묵직한 대답에 지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늦은 시각, 그 단정한 하정하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다니. 설마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을 뿐, 그 역시 자신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감이 찰나의 순간 지연의 뇌리를 스쳤다. 차지연은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그러나 이어진 정하의 한마디는 지연의 실낱같은 기대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박살 냈다."……뒤에서 다영이 이상한 소문 퍼뜨리는 거 그만해."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지연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오빠…….""이건 마지막 경고야."정하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묵직하고 서늘한 분노만이 차갑게 깔려 있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려 했던 이유,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넨 단 하나의 이유는 차지연이라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아닌, 오직 허다영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였다.기대와 달라도 너무 다른 현실, 또다시 자신이 아닌 허다영만을 두둔하고 감싸고도는 정하의 태도를 확인한 순간, 차지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참아왔던 억울함과 서러움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오빠, 왜 나는 안 봐주는데……! 내가 몇 년이나 오빠 옆에 있었는데! 샵에 들러서 예쁘게 꾸미고, 오빠 수강 신청 따라 하고, 오빠 동선 따라다닌 거 다 알면서…… 왜 또 허다영이
하지만 콧대 높은 차지연의 자존심은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고백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하정하라는 궤도 주변을 서성이는 방식을 택했다. 정하가 수강 신청을 한 교양 과목과 전공 수업의 목록을 몰래 빼내어 그대로 따라 신청했고, 그와 수업이 겹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청담동 샵에 들러 전문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까지 받고 강의실에 들어섰다.친구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소문은 지연의 확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용하고 과묵해 보이던 정하가 사실은 국내 굴지의 재벌가인 하명그룹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집안 배경과 재력, 외모, 품격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 차지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내가 찍은 남자는 달라. 내 남자친구 자리에 앉기에 부족함이 없어.'그녀는 정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특권층이며, 조만간 자연스럽게 연인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정하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관계를 공식화하려 마음먹었던 어느 청명한 봄날, 지연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캠퍼스 중앙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정하를 발견한 지연이 반갑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정하의 곁에는 낯선 여자애 하나가 바짝 붙어 있었다. 아담한 체구에 수려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차림새를 한 여자애는 정하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차지연과의 미묘했던 만남 이후, 다영은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정하가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거짓말을 던지고 떠난 이유, 그리고 그 비극의 가장자리에 서서 악역을 자처하던 차지연의 떨리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켜 끊임없이 다영을 괴롭혔기 때문이다.결국 다영은 다음 날 아침, 차지연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잠시 만나서 얘기 좀 해.]약속 장소는 대학가 구석에 위치한 조용한 카페였다. 주말 오전이라 카페 안은 적막에 가까울 정도로 고요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식어가는 아메리카노를 멍하니 바라보던 다영의 시야에, 선글라스를 깊게 눌러쓰고 들어오는 차지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날의 화려했던 신부 드레스는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톤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초파리처럼 핼쑥해져 있었다.차지연은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빼서 앉으며 선글라스를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동자에는 피로와 함께 거친 경계심이 가득했다."나한테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차지연이 입술을 짓씹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제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워두려 했던 자존심의 껍데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다영은 그녀의 날 선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제 비상계단에서 정하의 오열을 들은 이후, 차지연을 향했던 분노는 모두 휘발되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의문뿐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주변의 공기는 기이할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다. 다영의 엉망이 된 옷가지와 거칠어진 숨소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정하의 차가운 눈빛은 지나치던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다영에게는 그 소리조차 아득한 먼 곳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예식장 로비의 화려한 조명과 하객들의 소란스러움은 이미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이 다영의 귓전을 맹렬하게 때리고 있었다.전남친 하정하의 시한부 판정과 그 그늘 뒤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덮기 위해 악역을 자처했던 차지연. 폭풍처럼 덮쳐온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다영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듯한 일탈이었다.그러나 가슴속을 가득 채운 공허와 죄책감은 그 어떤 충격이나 자극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무력감이 온몸의 피를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정하는 다영의 어깨에 자신의 두터운 코트를 걸쳐주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이끌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복도를 지나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앞만 보며 걸었고, 다영 역시 멍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계절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화려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