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남자

선 넘는 남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6
By:  크리스탈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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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매몰차게 자신을 버린 전남친과 동명이인인 남자, '하정하'. 자신을 짓밟은 이에 대한 복수심과 현실의 벼랑 끝에서, 다영은 전남친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재벌 3세 정하의 손을 잡고 위험한 관계를 시작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복수극 뒤편, 전남친이 남긴 처절하고 비극적인 진실이 뒤늦게 수면 위로 드러나며 모든 것이 뒤흔들리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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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이별

며칠 전부터 명치끝에 차가운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속이 꽉 막히고 더부룩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어김없이 밀려오는 메스꺼움과 현기증에, 다영은 그저 최근 연달아 터진 악재들로 극심한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진 것이라 여겼다.

연쇄 부도로 평생을 일군 아버지의 공장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집안 곳곳에 붉은 압류 딱지가 붙던 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떨어진 아버지의 위암 말기 판정은 다영이 쥐고 있던 삶의 가느다란 의지마저 꺾어버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던 캄캄한 나날들이었다.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든 이 증상을 버거운 현실이 만들어낸 신경성 질환이라 치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달력을 넘기던 다영은 자신의 생리 주기가 두 달 가까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등줄기를 타고 낯선 예감이 스쳤다. 떨리는 손을 감추며 약국에서 사 온 임신 테스트기.

차가운 화장실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결과를 기다리던 3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이내 하얀 막대 위로 붉은색 선명한 두 줄이 떠올랐을 때, 다영은 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것은 지독한 절망의 늪에서 잿빛 세계에 기적처럼 내려앉은 구원의 빛이었다.

이 작은 생명은 지난 6년 동안 묵묵히 곁을 지켜준 유일한 안식처, 이정하와의 숭고한 결실이었다.

이정하. 그 이름만으로도 다영의 가슴은 아릿해졌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사나운 빚쟁이들이 문을 부술 듯 두드릴 때도, 병원의 매캐한 소독약 냄새 속에서 아버지가 신음을 토해낼 때도 정하는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갈 때 그는 기꺼이 방패가 되어주었고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아주었다.

자신의 청춘과 시간, 적지 않은 금전적 희생까지 감수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친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정하에게 우리 두 사람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이처럼 웃으며 다영을 품에 안고 빙글빙글 돌지도 몰랐다.

마침 오늘은 두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지 정확히 6주년이 되는 뜻깊은 기념일이었다.

다영의 낡은 핸드백 속에는 정성스럽게 리본으로 포장된 임신 테스트기와 콩알만 한 아기집이 찍힌 초음파 사진이 소중하게 담겨 있었다.

사실 다영은 오늘 밤 자신이 비밀을 고백하기 전에 그에게서 먼저 평생을 약속하는 눈부신 고백을 듣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며칠 전 정하가 운전석을 비운 사이 조수석에 놓인 그의 핸드폰 화면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프러포즈 반지’와 ‘제주도 웨딩 스냅’이라는 확신에 찬 기록들.

그가 영원한 미래를 남몰래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영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많은 감격의 눈물을 훔쳤던가.

지독한 가난과 병든 아버지라는 짐 때문에 감히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못하고 앓아왔던 지난날이었다.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닐까 뼈아픈 이별을 수백 번 고민했지만, 정하는 그 비극적인 굴레마저 온전히 짊어지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 레스토랑에서 그가 수줍게 반지를 내밀면, 다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이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를 선물처럼 안겨줄 참이었다.

모든 불행이 끝나고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운명 같은 하루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다영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비싼 식당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하가 예약해 둔 창가 자리였다.

은은한 촛불이 일렁이는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정하의 얼굴은 어딘가 심하게 굳어 있고 창백했지만, 다영은 일생일대의 프러포즈를 앞두고 몹시 긴장한 탓이려니 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윽고 메인 요리가 올려졌다. 고급스럽게 플레이팅된 양고기 스테이크였다.

순간 다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특유의 누린내 때문에 양고기를 입에도 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난 6년을 만난 정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특별한 기념일에 이 메뉴를 시켰다는 것은, 저 두툼한 고기 덩어리 아래나 곁들여진 매쉬드 포테이토 속에 영롱한 반지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을 거라는 엉뚱하고도 확신에 찬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로맨틱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엉성한 모습을 상상하며 다영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야무지게 쥐고 숨겨진 반지에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레 스테이크를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어 아무리 고기를 썰어내고 접시 바닥을 뒤적여도 애타게 기다리던 반짝이는 반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빙 타이밍을 놓친 걸까.

아니면 디저트에 숨겨두려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며 애꿎은 물잔만 비워내고 테이블 바닥으로 시선을 깐 채 마른침만 삼키는 정하를 보던 다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나이프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지으며 승부수를 던졌다.

“나 다 알아. 그니까 치사하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해, 프러포즈.”

사랑과 굳건한 믿음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다영은 지금쯤이면 정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허둥지둥 안주머니를 뒤져 벨벳 케이스를 꺼낼 것이라 상상했다.

그러면 그녀 역시 가방 지퍼를 열고 감동의 눈물과 함께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완벽한 서사의 마침표를 찍으리라.

그러나 테이블 너머, 무거운 침묵을 깨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의 두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다영의 미소는 차디찬 서릿바람을 맞은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를 응시하는 정하의 텅 빈 눈빛에는 설렘도, 애틋한 사랑의 온도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낸 듯한 지독한 피로감과 잿빛 체념, 그리고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짙은 권태만이 탁하게 고여 있었다.

핏기 없는 마른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그리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서늘한 활자들이 그녀의 고막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여기까지 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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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잊을 수 없는 상처
결혼하자, 우리 평생 함께 하자 같이 뻔한 멘트를 기대했던 탓일까.뜻밖의 말에 그녀의 머리속은 가장 희망찬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그래, 이제 연애는 여기까지하고 결혼하자는거구나?자신이 생각하는게 틀림없을것이라 확신한 여자가 다시 되 물었다.“응? 뭐라고?”“헤어지자고.” 여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무슨 소리야, 장난치는거지 지금?”“장난 아니야. 그만하자, 정말로.”여자의 얼굴에서 더 이상의 말간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왜..?”“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남자의 물기없이 건조한 말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에 박혔지만, 이 한마디 따위에 매여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그냥..권태기 그런거겠지. 조금만 더 만나보다가..!”그가 먹던 나이프를 내려놓은채,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다영은 그 순간 알았다.이미 그는 이 관계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는 걸.“이정하, 너 나랑 6년 만났어. 내가 너를 모를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해. 뭐가 문제야, 응?”내 6년이 고작 이 호화로운 라운지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과 함께 말 한마디로 끝낼 수는 없었다."..정말 듣고싶어?"그러나 평온한 표정의 남자는 누구보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6년이나 만났으니까 현실을 보는거야, 다영아.”“나 너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온정가득한 과거형의 문장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그런데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우리 좋았잖아. 아빠 병원비부터 간병인까지 네가 다 도와줬고, 나 이제 진짜 네 옆에서 평생 갚으면서 살려고...”“그래서야.”남자가 여자의 말을 차갑게 잘라냈다.“너네 집안 사정이 안좋아졌을 때 빚 다 갚아준거, 네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수술비 내주고 간병인 붙여준것도 나한텐 아무것도 아닌거 너도 알고 있잖아. ”"처음에는 오히려 네가 날 그만큼 더 사랑하니까 ..좋았어."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떨리는 손끝과, 예전의 여유를 잃고 초조함이 배어버린 미간을 천천히 훑었다.“그런데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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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라리 꿈이기를
"대체 언제부터..."당장이라도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달려가 저 파렴치한 여자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바닥에 짓겨버리고 싶었다.10년을 피보다 진하게 나누었던 우정, 가난에 짓눌려 신음할 때마다 제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던 그 선량했던 얼굴이 저렇게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삼류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자신의 남자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제발 꿈이기를, 내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환각을 보는 것이기를 애원하며 다영은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눈을 거칠게 비벼 문질렀다.그러나 몇 번을 다시 뜨고 바라봐도 희미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 얽혀 있는 두 남녀의 실루엣은 선명하기만 했다.오판이 아니었다.잔혹한 현실은 조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다영의 목덜미를 죄어왔다.숨이 턱 막히고 허파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피가 역류하는 소리가 귓가를 맹렬하게 때리며 시야가 아득해졌다.“정... 정하 오빠...”차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입술을 달싹이며 떨리는 발걸음을 떼려던 다영의 시선이, 정하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어깨너머를 바라보는 지연의 눈동자와 정확히 공중에서 마주쳤다.지연의 눈에 스쳐 지나간 것은 당황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다영의 삶을 관조하며 숨겨왔던 기이하고도 기만적인 승리감, 그리고 서늘한 조소였다.다영의 존재를 똑똑히 확인한 지연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얇은 입술 끝에 띄우더니, 주저 없이 정하의 턱을 끌어당겨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들이밀었다.“하아...”밀폐된 모텔 입구의 공기를 찢고 축축하고 은밀한 음성이 샐러나왔다.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 다영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혀를 깊숙이 집어넣으며 타액을 섞고 짙은 입맞춤을 이어갔다.6년 동안 자신만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이던 남자의 입술이, 자신의 가난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던 친구의 입 속을 탐욕스럽게 헤집고 있었다.그 지독하도록 노골적인 탐닉의 장면은 다영의 영혼을 통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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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라진 아이
응급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그녀의 코 끝을 간질였다.희미하게 떠진 눈꺼풀 사이로 천장의 하얀 불빛이 그녀를 일으켜 새웠다.고개를 돌리자 초췌한 기색의 남자의사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정신이 좀 드십니까?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의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지만, 내 온신경은 곧바로 내 몸 내부의 깊은 정적을 향해 곤두섰다.아랫배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느껴지던, 내 안에서 차오르던 그 작고 경이로운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의사는 차트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그게…… 환자분,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스트레스는 신체에 큰 무리를 줄 수 있습니다. 혈압도 많이 낮아지셨고, 당분간은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그는 자꾸만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으며 알맹이 없는 위로를 이어갔다.본론을 피하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피를 말렸다.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겨우 물었다.“아이…… 아이는요? 태동이 안 느껴져요.”의사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마침내 나지막하게 내뱉은 단어는 내 세계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렸다.“죄송합니다.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유산 상태였습니다.”그 말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귓속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유산. 내 몸속에서 한 생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절망이었다.“아아...아아...”병원 복도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내 목구멍을 터뜨리고 흘러나왔다.그것은 이성을 잃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링거 바늘을 쥐어뜯고 침대 위에서 뛰쳐나가려고 하자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들어 나를 눌렀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거대한 허망함과 슬픔은 그 어떤 힘으로도 누를 수 없었다.얼마나 울었을까.차가운 병원 바닥에서 슬픔을 토해낸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처럼 제정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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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갈게, 그 선자리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진짜일리 없었다.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그렇게 잔인한 인간이 아니었다.어젯밤 그 꼴을 보고도, 아직까지 정하를 믿고 있는 제 자신의 꼴이 멍청하고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시선을 돌리니 보이는 거울 속 수척해진 자신의 얼굴을 보자 눈앞이 하얗게 바래가더니 한없이 깊은 헛구역질이 올라왔다.입 안 가득 고이는 침을 삼키지도 못한 채, 게워내고 말았다.속이 텅 빈 배를 쥐어짜며 토해내도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억울함과 분통함에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당장이라도 그에게 전화해 어떻게 지연이를 만나냐고, 그냥 마음이 뜬거면서 내 탓을 하고 싶었냐고.어젯밤에 네가 차지연이랑 키스하는거 다 봤다고.네 때문에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 다 토해내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변명 한마디 없이 그저 귀찮다는 듯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걸 정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그녀의 손가락을 멈춰세웠다.눈을 감으면 그와 함게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생생했다.정하와 함께 웃고 설렜던 순간들마저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날까봐 두려웠다.다영의 한 번 찢어진 가슴의 상처는 나을 기미는 커녕, 점점 벌어져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그렇게 그녀가 사흘동안 방 밖을 나오지 않자, 결국 엄마가 방을 쳐들어왔다."일어나, 이제...!"그녀는 다영이 뒤집어 쓰고 있는 이불을 억지로 빼앗았다.방 안으로 들이친 거실 불빛에 눈이 시려왔다."..진짜로 쫑난거야?""...."다영의 침묵에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그녀의 가슴팍에 사진 한 장을 툭 던졌다.나이가 족히 아빠뻘은 되어보이는 남성의 사진이었다.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니, 주소 보낼테니까 다음주 토요일에 선 좀 보고 와. 그 남자가 이번에 병원 물려받는다더라.그럼 그렇지.입버릇처럼 아들로 삼고 싶다고 엉덩이까지 두들기던 엄마의 입에 바른 말들은 결국 그가 가진 재력을 위한 발돋음일 뿐이었다.그런 엄마가 부끄러웠다.사랑이 돈보다 우선인게 당연하다고 말하던 그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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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남친과 이름이 같은 남자
"지난번에 말했던 선 자리로 잡아줘.”엄마는 느닷없는 내 선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너…… 정말이야?"“어느 자리든 상관없어. 조건 제일 좋은 사람으로 잡아줘.”엄마는 내 기괴할 정도로 무덤덤한 태도에 낯설어하면서도, 내심 그와 헤어진 후 더 번듯한 집안으로 시집보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내가 선을 보기로 결심한 것은 결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어서도, 과거를 잊기 위해서도 아니었다.그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이자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그가 나를 버리고 선택한 지연은 집이 망해 남들이 나를 업신여길때조차 나를 감싸줬던 여자였다.그 호의마저 이제는 내가 아니라 정하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음이 틀림없었고.그들이 서로 알고지낸지는 벌써 3년.언제부터 나 몰래 그들이 그런 깊은 관계였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오래된 친구에게 배신받아 페인이 되어 사는 비굴한 여자가 아니라, 보란듯 나 역시 그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완벽하고 압도적인 배경을 가진 남자의 곁에 서는것.그게 아버지를 살리며 집안을 일으키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방법이었다.사랑 같은 부질없는 감정 따위는 이미 아이와 함께 죽어 없어졌다.***있는 돈 없는 돈 영끌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세팅하고 나갔던 첫 선자리. 밤하늘을 떠다니는 반딧불이처럼 기대에 차 있던 다영의 눈동자는 남자를 마주한 순간 곧바로 빛을 잃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마흔네 살의 의사는 동네 슈퍼에 나온 것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축이 다 닳은 슬리퍼를 끌고 나온 꼴이었다. 무례하게 다영의 집안 부도를 들먹이더니, 급기야 거친 손으로 다영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며 귓가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대고 소리쳤다. “선섹후결, 몰라요?” 천박한 모욕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만, 이후 이어진 수십 번의 선자리 역시 다름없었다. 가슴 크기가 얼마냐느니, 속궁합이 부부생활의 전부라느니 하는 음흉한 인간들의 희롱이 줄을 이었다. 바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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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적당히 잘생기고, 적당히 매너 있고, 적당히 성격 좋은.
남자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컥.."마시던 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아직 저희, 제대로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은데요.""제가 저 싫어하는 사람은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보는 편이라서요. 지금 아니면 못 볼 것 같던데. 아니에요?"기가 막힌 그의 통찰력에 다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이 기괴한 몰골을 보고도 좋다고 들러붙는 멀쩡한, 아니 과하게 잘생긴 남자라니.여태 결혼을 못한 이유가 설마 이런 하드코어한 특이 취향 때문이었나?어이가 없으면서도 순수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말 몇 마디 섞어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제 꼴이 이런데, 뭘 보시고... 대체 왜요?"남자는 흐트러짐 없는 올곧은 시선으로 다영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예뻐서요. 거짓말 같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그의 조건은 터무니 없이 완벽했다.빼어난 얼굴과 훤칠한 키, 넘사벽 재력까지.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만큼은 만날 수 가없었다.'하정하.'하필 전남자친구와 성까지 같을 줄이야.그를 만나면, 전남친을 못잊어 일부러 동명이인인 남자를 꼬셔 만났다는 소문이 퍼질게 뻔했다.이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어가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죄송하지만, 세 번이나 만나기에는 제가 좀 바빠서요."그녀가 능숙하게 그를 밀어냈다.그와의 자리를 피할 구실이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최근 자신의 '서양화' 전공을 살려 평생교육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남자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전 남자친구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바쁘신 거라면 유감이네요."그 순간 정곡을 찔린 다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개팅 상대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제 전 남자친구 이름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금 되게 불쾌해요.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시고 가시죠."그러나 남자는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댄 자세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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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의 단죄
"..."성격하고 매너는 몰라도 얼굴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남편감인것 같은데?"정하의 시선은 마치 이미 걸려든 사냥감을 감상하는 포식자처럼 여유롭고 집요했다."세 번.""말씀하신대로, 세 번 만나보죠. 그쪽이 성격하고 매너가 좋은지는 지금 본 바로는.. 잘모르겠어서."그렇게 그의 제안은 다영의 수락으로 극적타결됐다.그녀의 인생에 다시 한 번 큰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세 번.'다영이 내밀었던 조건을 곱씹으며, 정하는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오후 6시.다영이 출강하는 평생교육원 앞은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수강생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강생들 사이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첫 만남 때의 충격적인 분장 대신, 화장기 옅은 수수한 얼굴에 움직이기 편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고된 강의 탓인지 그녀는 뒷목을 주무르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가늘한 목선과 자그마한 체구.투명한 피부와 동그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딱 내 취향이네.'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정문 앞과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뒤,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결국, 그가 차에서 내렸다.정하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모델 뺨치는 훤칠한 키에 살짝만 봐도 운동한 티가 나는 탄탄한 체격, 화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그 뒤로 주차된 최고급 블랙 세단까지. 평범한 일상과는 지독하게 이질적인 풍경이었다."허다영씨."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고 선명한 목소리에, 땅만 보고 걷던 다영의 고개가 그대로 멈추었다.'설마.'서서히 고개를 들자 눈 앞에 거짓말처럼 우뚝 서 있는 정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졌다."왜 여길.."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쳐메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연락도 안받길래, 또 퇴짜 놓은건가 싶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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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너랑 만났던 시간까지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네가 여길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하정하의 첫마디는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네가 여길 어떻게.그 한마디로 잠깐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것만 같은 기분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너처럼 가난한 애가 여기를 어떻게 왔냐는 의미인지.자기가 있는 곳을 어떻게 왔냐는 건지.아니, 하정하는 애초에 그런 복잡한 의도를 품고 사람을 교묘하게 깎아내릴 만큼 치밀한 위인이 못 되었다.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일차원적인 의문. 그의 무의식이 필터링조차 거치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온 것뿐일텐데.차라리 나를 상처 입히려는 악의가 있었다면 화라도 났을 테지만 일말의 악의조차 없는, 저 투명하고 얄팍한 무례함이 오히려 가슴을 더 후벼 팠다."다..다영아."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옥구슬같은 목소리.그의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다시 한 번 그녀의 가슴에 대못이 박혔다.내 아이가 차갑게 숨을 거두던 그 순간에 나를 비웃듯 바라보던 그 눈빛은 어디갔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난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잠시 스친 지연의 눈빛에는 묘한 우월감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어떤 차림으로, 얼마나 지쳐서 여기에 서 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그 찰나의 시선이 비수처럼 꽂혔다."네가 여길 진짜 어떻게 왔어? 여기 회원제로만 운영되는 곳인데…… 혹시 정하 찾아온 거야?"지연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말아 쥐며 하정하의 팔에 더욱 밀착했다.마치 제 것임을 확인시키는 듯 했다.나를 불청객 취급하며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다."얘기는 들었겠지만, 오빠랑 나 곧 있으면 결혼해.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다영아. 근데 너도 알잖아. 오빠하고 나같은 사람한테 결혼은 그냥 하는게 아니라..집안이 어느정도 맞아야하는거."그녀는 가슴을 저미게 할 정도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하정하는 지연의 그 무례한 멸시에도 그녀를 제지하기는커녕, 내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이 화장실 휴지 조각보다 못하게 되기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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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제 내 여자일인데, 어떻게 남의 일이야
주변 공기마저 압도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그의 등장에, 전시회장 안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저 남자가 일행이었어?'모델 뺨치는 훤칠한 키와 우리나라에 단 하나만 들어왔다는 루이비션의 한정판 맞춤 정장, 그리고 손목에서 빛나는 수억 원대의 명품 시계.그리고 마치 하얀도화지 처럼 창백한 피부와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그의 외모는 웬만한 연예인들을 기죽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영과 함께 온 파트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그의 옆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후줄근한 차림에 수수한 얼굴.명품 하나 걸치지 않은 초라한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저런 남자랑 함께 온 거지.그저 우연히 같은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긴채, 정하가 내 민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하지만 그 남자가 웃는 얼굴로 내 민 손은 뜨거웠고, 억셌다.운동 한 번 해보지 않은 것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손이었다.정하의 악력에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고 나서야, 그들의 긴 악수는 끝을 맺었다.그리고 하얗게 질린 손을 털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다영이하고는..""우리?"남자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무심하게 뱉어진 그 한마디가 정하의 어설픈 소유욕을 차갑게 싹둑 베어냈다."..아니, 다영이하고는 지금 무슨 사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그리고 정하가 다시 물었을때, 남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제가 좋아해서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입니다."뻔뻔한 그의 태도에 정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차갑게 굳었다."요즘 세상에 그러시는거 범죄라는 소리 못들어보셨나요?"답지 않게 그의 목에 붉은 핏줄이 섰다."범죄라."남자가 입술 안에서 그 단어를 음미하듯 굴리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낮고 서늘한 실소를 터뜨렸다.웃음기가 완전히 가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정하의 핏대 선 목줄기를 향해 꽂혔다."글쎄요. 적어도 6년이나 만난 여자친구를 버려두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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