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남자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컥.."
마시던 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직 저희, 제대로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은데요."
"제가 저 싫어하는 사람은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보는 편이라서요. 지금 아니면 못 볼 것 같던데. 아니에요?"
기가 막힌 그의 통찰력에 다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이 기괴한 몰골을 보고도 좋다고 들러붙는 멀쩡한, 아니 과하게 잘생긴 남자라니.
여태 결혼을 못한 이유가 설마 이런 하드코어한 특이 취향 때문이었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순수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말 몇 마디 섞어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제 꼴이 이런데, 뭘 보시고... 대체 왜요?"
남자는 흐트러짐 없는 올곧은 시선으로 다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뻐서요. 거짓말 같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의 조건은 터무니 없이 완벽했다.
빼어난 얼굴과 훤칠한 키, 넘사벽 재력까지.
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만큼은 만날 수 가없었다.
'하정하.'
하필 전남자친구와 성까지 같을 줄이야.
그를 만나면, 전남친을 못잊어 일부러 동명이인인 남자를 꼬셔 만났다는 소문이 퍼질게 뻔했다.
이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어가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죄송하지만, 세 번이나 만나기에는 제가 좀 바빠서요."
그녀가 능숙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와의 자리를 피할 구실이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최근 자신의 '서양화' 전공을 살려 평생교육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전 남자친구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바쁘신 거라면 유감이네요."
그 순간 정곡을 찔린 다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개팅 상대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제 전 남자친구 이름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금 되게 불쾌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시고 가시죠."
그러나 남자는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댄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허다영 씨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다영의 목덜미로 서늘한 소름이 훅 끼쳤다.
"이런 선자리만 서른 번 가까이 돌았으면 나 같은 남자 만나기 쉽지 않은 거 잘 알 텐데."
입가에 머물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씻은 듯 사라지자, 그의 차가운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건 제가 알아서 판단할..."
"대체 이 선자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순진한 사랑 찾기?"
정하가 그녀의 말을 칼같이 자르고 들어왔다.
"정말 결혼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 전 애인을 기다리느라 결혼을 피하는 건지 잘 생각해보세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다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6년이라는 시간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다영은 만지작거리던 가방끈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어설프게 세우고 있던 방어기제를 거두자, 힘이 들어가 굳어있던 어깨에도 스르르 힘이 풀렸다.
'멍청하게 굴지 마.'
전 남친이랑 이름이 똑같다고 이 좋은 조건의 남자를 놓친다고?
서른 번 남짓한 선자리가 이미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낭만은 얼어 죽을, 적당한 타협과 확실한 조건만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게요."
다영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하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타는 연애 같은 거 기대하고 나온 자리 아닙니다. 전 애인한테 미련이 남아서 현실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요."
남자의 짙은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그가 비스듬히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뭡니까."
"다만, 셈이 좀 확실했으면 해서요. 정하 씨."
전 애인과 같은 이름을 부르면서도 다영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아시다시피 집도 망해서 재산이랄 것도 없고, 전 평생교육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제 밥벌이하기도 빠듯해요. 아빠도 위암이시라 병원비도 감당해야 하고요. 감정 소모하면서 의미 없는 밀당이나 할 여유, 없어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낼수록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포장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니 한결 숨쉬기가 편했다.
"원하는 조건이 뭐냐고 물으셨죠?"
두꺼운 안경알 안으로 초롱초롱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돈 많고, 다른 건 모두 다 적당한 사람이요. 적당히 잘생기고, 적당히 매너 있고, 적당히 성격 좋은."
다영의 솔직하다 못해 지독하게 현실적인 요구사항을 듣던 정하의 입꼬리가 나직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조건치고는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정하가 비스듬히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다영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사실 다영은 자신이 떡진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점까지 찍고 나온 이 기괴한 몰골에도 정하가 눈 하나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하 역시 이 선자리가 시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명그룹 회장인 그의 할아버지는 날마다 기한을 정해두고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을 성사시키라며 강한 압박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정하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자신의 재력과 배경을 노리고 완벽한 신붓감인 척 '사랑'을 연기하며 들러붙는 여자들이었다.
구질구질한 애정 구걸이나 감정 노동 따위는 정하의 인생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필요로 한 것은 오직 하나, 할아버지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사랑 따위는 일절 기대하지 않는 사업 파트너 같은 여자였다.
그런 정하의 눈앞에 나타난 허다영은 그야말로 완벽한 선택지였다.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꾸미고 나와 가벼운 사내들을 솎아내는 현명함, 자신의 사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솔직함까지.
적어도 그는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제 신붓감이 될거라는 것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당돌하기까지 한 다영의 역공에, 한 방을 먹었다는듯 정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가식 없이 서늘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번지는 '진짜' 미소였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하네."
그가 테이블 위로 깍지를 끼며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허다영 씨가 방금 말한 밥벌이 걱정. 내 옆에선 평생 안 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의 진한 목소리가 다영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적당히는 잘 모르겠네. 난 아주 잘생기고, 아주 매너좋고, 아주 나이스한 성격이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영은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며칠 치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좁은 보호자용 침대에서 버틸 담요까지 꾹꾹 눌러 담은 커다란 가방이었다.더 이상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집안의 모진 풍파를 무릅쓰고 온 길이었다. 병원으로 향하기 직전, 집 안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암 투병 중인 전남친의 곁을 지키겠다며 짐을 싸는 딸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기가 막혀 오열하셨다."너 미쳤니? 너한테 그런 짓을 하고 떠난 놈한테 왜 가! 당장 가방 내려놓지 못해?!"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캐리어를 빼앗으려 했고, 통하지 않자 다영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눈물로 호원하셨다. 하지만 다영은 그 모든 억죄임을 끊어내고 집을 뛰쳐나왔다.특수 병동 1인실의 묵직한 문을 밀고 들어서자, 독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링거 거치대에 의지한 채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던 정하의 마른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 여는 소리에 정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다영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정하의 퀭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다영아. 그 가방은 뭐야?"정하의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다영은 대답 없이 캐리어를 보호자용 침대 옆에 바짝 붙여놓았다. 그리고 정하에게 다가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정하는 다영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
정하의 병실을 나온 다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 현 남자친구 '하정하'. 전남친과 이름도 같고, 늘 다영의 곁에서 묵묵히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남자. 다영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할 말이 있어.]약속 장소는 두 사람이 자주 찾던 조용한 공원 산책로 근처의 카페였다. 다영이 도착했을 때, 정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장 화장실 근처에서 다영의 엉망이 된 모습을 목격하고, 신랑의 턱시도에 묻은 눈물자국을 발견했던 그날 이후로 그 역시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는지 얼굴이 다소 야위어 있었다.정하는 다영이 다가오자 늘 그랬듯 다정하게 의자를 빼주려 일어섰다. 하지만 다영은 그 손길을 마다하고 맞은편 자리에 딱딱하게 앉았다."다영아.""……우리 헤어지자."인사도 없이 튀어나온 다영의 단호한 한마디에 정하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카페 안의 소음이 순간 둔탁하게 꺾여 나갔다. 정하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다영의 여윈 얼굴을 깊게 훑었다."……왜."단 한 단어, 낮게 깔린 그의 물음에는 억눌린 감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다영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과거의 통곡과 상처, 그리고 비틀린 집착의 기억을 마저 털어놓은 차지연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카페 안의 정적은 한층 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연은 멍한 눈으로 다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다 알겠어?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그 사람을 짝사랑했는지.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너한테 질투를 느끼고, 그 사람이 만든 가짜 무대 위에서 악역을 자처했는지."차지연의 눈빛에는 더 이상 예전의 날 선 독기도, 오만한 위엄도 없었다. 그저 사랑받지 못한 자의 깊은 상처와 허탈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정하가 너한테 청첩장 보낸 것도, 나랑 가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전부 네가 자기를 미워하게 만들어서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 위한 거였어. 그 사람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오직 너 하나만 생각했으니까."지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글라스를 다시 써서 붉게 짓무른 눈가를 가린 그녀는 트렌치코트 깃을 여몄다."나도 이제 지쳤어. 그 사람 옆에서 가짜 아내 노릇 해주는 것도 오늘로 끝이야. 허다영…… 너한테 사과 같은 건 안 해. 하지만 그 사람한테 가봐. 길어야 몇 달 안 남았으니까."차지연은 다영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딸랑거리는 문가 종소리와 함께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졌다.홀로 남겨진 다영은 식어버린 아메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정하의 묵직한 대답에 지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늦은 시각, 그 단정한 하정하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다니. 설마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을 뿐, 그 역시 자신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감이 찰나의 순간 지연의 뇌리를 스쳤다. 차지연은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그러나 이어진 정하의 한마디는 지연의 실낱같은 기대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박살 냈다."……뒤에서 다영이 이상한 소문 퍼뜨리는 거 그만해."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지연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오빠…….""이건 마지막 경고야."정하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묵직하고 서늘한 분노만이 차갑게 깔려 있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려 했던 이유,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넨 단 하나의 이유는 차지연이라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아닌, 오직 허다영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였다.기대와 달라도 너무 다른 현실, 또다시 자신이 아닌 허다영만을 두둔하고 감싸고도는 정하의 태도를 확인한 순간, 차지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참아왔던 억울함과 서러움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오빠, 왜 나는 안 봐주는데……! 내가 몇 년이나 오빠 옆에 있었는데! 샵에 들러서 예쁘게 꾸미고, 오빠 수강 신청 따라 하고, 오빠 동선 따라다닌 거 다 알면서…… 왜 또 허다영이
하지만 콧대 높은 차지연의 자존심은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고백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하정하라는 궤도 주변을 서성이는 방식을 택했다. 정하가 수강 신청을 한 교양 과목과 전공 수업의 목록을 몰래 빼내어 그대로 따라 신청했고, 그와 수업이 겹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청담동 샵에 들러 전문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까지 받고 강의실에 들어섰다.친구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소문은 지연의 확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용하고 과묵해 보이던 정하가 사실은 국내 굴지의 재벌가인 하명그룹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집안 배경과 재력, 외모, 품격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 차지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내가 찍은 남자는 달라. 내 남자친구 자리에 앉기에 부족함이 없어.'그녀는 정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특권층이며, 조만간 자연스럽게 연인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정하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관계를 공식화하려 마음먹었던 어느 청명한 봄날, 지연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캠퍼스 중앙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정하를 발견한 지연이 반갑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정하의 곁에는 낯선 여자애 하나가 바짝 붙어 있었다. 아담한 체구에 수려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차림새를 한 여자애는 정하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차지연과의 미묘했던 만남 이후, 다영은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정하가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거짓말을 던지고 떠난 이유, 그리고 그 비극의 가장자리에 서서 악역을 자처하던 차지연의 떨리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켜 끊임없이 다영을 괴롭혔기 때문이다.결국 다영은 다음 날 아침, 차지연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잠시 만나서 얘기 좀 해.]약속 장소는 대학가 구석에 위치한 조용한 카페였다. 주말 오전이라 카페 안은 적막에 가까울 정도로 고요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식어가는 아메리카노를 멍하니 바라보던 다영의 시야에, 선글라스를 깊게 눌러쓰고 들어오는 차지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날의 화려했던 신부 드레스는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톤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초파리처럼 핼쑥해져 있었다.차지연은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빼서 앉으며 선글라스를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동자에는 피로와 함께 거친 경계심이 가득했다."나한테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차지연이 입술을 짓씹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제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워두려 했던 자존심의 껍데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다영은 그녀의 날 선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제 비상계단에서 정하의 오열을 들은 이후, 차지연을 향했던 분노는 모두 휘발되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의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