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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세상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어가던 배경수는 병실에 떡하니 서 있는 만년설 같은 성도윤을 발견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었고, 성도윤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둘이 알아?”

성도윤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남자와 재벌가 며느리로 조용한 삶을 사는 여자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 않은가? 교집합이 전혀 없을 텐데...

“그게...”

차설아는 골치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배경수한테 병원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전남편과 외간 남자의 만남이라니, 어딘가 수라장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뭐지?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무려 저의 여신이라고요.”

배경수는 노란색 해바라기 꽃다발을 들고 한껏 들뜬 걸음걸이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성도윤 씨는 모를 테지만, 당시 설아 누나는 우리 학교의 아이돌이었죠. 누나한테 대시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지경이니까. 물론 전 수많은 추종자 중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팬이었죠. 오늘은 누나가 이혼을 신청한 경사스러운 날인데, 찐 팬으로서 당연히 제일 먼저 축하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말을 마친 배경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싹 지우고 정중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으로 차설아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나의 여신이여, 이 해바라기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해바라기는 누님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죠? 갖은 역경에도 오로지 햇빛만 보고 자라나라는 것이 꽃말이잖아요. 누님한테 해바라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은 없을 거예요.”

물론 차설아가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다만 해바라기의 꽃말은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한결같은 사랑이다. 마치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여태껏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할 때가 왔다. 그렇다고 평생 한 남자한테 목을 맬 수는 없으니까.

차설아는 꽃다발을 흔쾌히 받아 들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감탄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받아보는 꽃이야. 향이 너무 좋네.”

“누님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매일매일 선물해줄게요.”

순간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실내의 온도마저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배경수는 잠자코 있는 성도윤을 흘긋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대표님, 우리 여신한테 자유를 돌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앞으로 해안시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전설이 탄생하겠네요.”

성도윤은 배경수의 존재를 그냥 무시했다.

그는 배성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늦둥이에 불과했다. 고작 음탕한 생활밖에 모르는 애송이 따위를 왜 신경 쓰겠는가?

노란색 해바라기를 들고 있는 차설아의 모습은 유난히 눈이 부셨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성도윤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해바라기 좋아할 줄은 몰랐네.”

차설아는 냉소를 지었다.

“모르는 게 한두 가지뿐이겠어?”

곧이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배경수를 향해 말했다.

“경수야, 꽃병에 꽃 좀 꽂아줘.”

“네!”

배경수는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성도윤은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도대체 무슨 관계이지?

성격이 유별나기로 소문난 배씨 집안 도련님은 절대로 착한 남자는 아닌데, 차설아 앞에서 어찌 이토록 고분고분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도윤, 아직 볼일이라도 남았나?”

차설아는 미소를 잃지 않고 성도윤을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다시 말해서 왜 안 가고 버티고 있냐는 뜻이었다.

성도윤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숙려기간 동안 넌 여전히 유부녀야. 분수에 맞게 행동해.”

“알았어, 어차피 너처럼 씨를 함부로 뿌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차설아의 말에 성도윤은 기가 찼다.

그러나 딱히 반박하지 않고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병실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배경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누님, 봤어요? 표정이 어둡다 못해 구릴 지경이네요. 지난 4년 동안 여러 장소에서 마주쳤지만, 저 포커페이스에 표정 변화가 있는 걸 처음 본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아, 웃겨. 역시 누님이 한 수 위네요. 한 방 먹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꼴이라니! 쌤통이네요! 하하하!”

그러나 차설아는 통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씁쓸하기만 했다.

어쨌거나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로서 두 사람의 사이가 오늘 이 지경까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됐어, 그만 웃어. 내가 부탁한 물건 가져왔어? 얼른 줘.”

차설아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배경수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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