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영은 자신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다. 이번 수술이 성공하면 새 삶을 살게 되겠지만 실패하면 지금의 모든 것은 단지 기억으로 남을 뿐이다.“앞으로 이런 생활을 즐길 날이 훨씬 많아질 거야.”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부딪히며 말했다.“날 믿어.”“언니, 우리 오빠 있잖아요. 겉으론 강한 척해도 속은 여리고 말도 잘 못하고 고집도 세요. 그러니까 너무 싸우지 마세요.”진소영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엔 그녀가 수술을 앞두고 걱정이 많아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언니, 저도 알아요. 요 며칠 일부러 오빠 혼내주고 계신 거죠?”그 말에 나는 살짝 당황해 손가락으로 그녀를 찌르며 말했다.“꼬맹아, 별생각을 다 하네. 그런 거 아니야.”“언니, 저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로맨스 소설 엄청 많이 읽었거든요. 다 알아요. 정말 다 안다고요.”진소영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웃으며 인정했다.“그래, 맞아. 오빠가 너무 강한 척하길래 끝까지 한번 보자고 했어. 근데 뭐 삼십 년 넘게 혼자 살던 사람이야. 며칠쯤 이런다고 어떻겠어.”“그래도 오빠는 내 오빠잖아요. 오빠는 정말 나를 목숨처럼 아끼거든요. 내가 어떻게 오빠를 안 걱정하겠어요?”진소영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나서 말했다.“우리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빠고 제일 멋진 남자예요.”그 말에 나는 울컥해 눈물이 날 뻔했다.“나도 너희 오빠한테 정말 잘할게.”“알아요. 제가 언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요.”진소영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말고 건강을 잘 챙겨. 건강해지면 우리 둘이 함께 네 오빠를 더 아껴주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오빠가 되게 말이야.”나는 그녀를 격려하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우리 약속해요.”진소영은 손가락을 내밀었다.“정말 어린 애 같네.”나는 웃으며 그녀와 손가락을 걸었다.“언니, 오늘 바로 저 병원에 보내
“누워보세요. 제가 상태 좀 볼게요.”구안석은 목에 걸린 청진기를 내리며 말했고 우리는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침착한 진정우조차 어깨가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검사일 뿐 수술도 아니었는데 말이다.나는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다시금 느꼈다. 진정우는 진소영의 손을 꼭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옆을 돌아보며 나를 보았고 나의 의도를 이해한 듯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하지만 정작 진소영은 가만히 구안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안리영이 상황을 보고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소영 씨, 편히 누워 보세요. 구 교수님이 심장 상태를 확인해 주실 거예요. 아프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진소영은 안리영과 금세 친해진 터라 그녀의 말을 듣고야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천천히 눕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작은 뜰에 피어난 꽃처럼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떠오르는 듯했다.나는 다시 구안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청진기를 그녀의 가슴에 대고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매우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진지하게 일하는 남자는 정말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렇게 잘생겼으니 말이다.‘이걸 어쩌지?’딱 봐도 진소영은 구안석에게 반한 게 틀림없었다.“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네요. 어딘가 불편한가요?”구안석이 진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소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지만 곧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구안석은 부드럽게 물었다.“불편한가요? 아니면 괜찮은가요?”“심장이 좀 두근거려요.”진소영은 여전히 구안석을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숨을 쉬어 보세요. 눈을 감아 보세요.”구안석은 조용하고 느린 목소리로 그녀를 안정시켰다.그러나 진소영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언니!”진소영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요? 언니도 교수님을 좋아한다고요? 그건 절대 안 돼요. 언니는 우리 오빠만 좋아해야 해요!”그녀는 방금까지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던 것도 잊고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속으로 웃으며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데 구 교수님은 너무 잘생겼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저 사람이 의사야? 아니면 분명 아이돌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안 돼요!”진소영은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언니, 구 교수님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우리 오빠만큼 멋있지도 않고 남자다움도 부족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오빠는 진짜 좋은 남자이잖아요. 교수님은 왠지 믿음이 안 가요.”“응? 구 교수님이 믿음이 안 간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어?”나는 그녀를 보며 궁금한 얼굴을 지었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흔들었다.“언니, 언니는 다른 남자 절대 좋아하면 안 돼요. 언니는 우리 오빠 거잖아요.”이 작은 아이가 정말 독점욕 하나는 대단했다.“넌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로맨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지?”나는 웃으며 물었다.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그래서 언니는 우리 오빠랑만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요.”“근데 말이지. 구 교수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네가 그를 좋아하게 되면 구 교수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헤어지거나 네가 소설 속 여주처럼 짝사랑의 아픔을 견뎌야 할 거야.”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진소영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교수님도 여자 친구가 있어요?”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 여자 친구가 없을 리 없잖아요.”나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이해하는 쪽으로 변하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그런데 교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처음 만났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바로 안리영이야.”내 말에 진
진소영은 절대로 진정우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병실에 혼자 두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안리영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그녀는 오늘 야간 근무 중이었다.“지원아, 내가 야간 근무를 하고 있다는 거 알면서 시누이를 돌봐달라는 개인 부탁을 해? 내 가족도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니야?”안리영이 일부러 투덜거리며 말했다.“돌보는 게 아니야. 그냥 자고 있는 동안 시간 날 때 한 번씩 상태를 확인만 해달라는 거야.”나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안리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오래 친구로 지냈지만 난 네 시누이랑 비교하면 난 별거 아니구나.”“질투하지 마. 네가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건 변하지 않아. 진정우도 널 대체할 순 없다고.”나는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난 진정우 씨가 아니니 그런 말로 달래지 마. 나한테는 안 먹혀.”안리영은 내 손에 낀 반지를 살피며 말했다.“오래된 디자인이긴 하지만 진정우 씨가 직접 준 거니까 의미가 있는 거지. 강유형은 절대 이런 반지를 선물하지 않을 거야.”안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마도 강유형의 마음속에서 난 이런 반지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옆에 있었으니 강유형은 네가 떠날 리 없다고 착각한 거겠지. 그러니 너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거야.”안리영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 강유형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잖아.”“강유형 씨는 어디 갔을까?”안리영이 자연스럽게 물었다.“모르겠어.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아.”나는 조나연과 진정우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며칠 전 강유형 씨가 병원에 자주 오던데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아마 조나연 때문일 거야. 임신 중이니까.”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그럴 수도 있겠
안리영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가 그동안 혼자서 마음고생하며 좋아하던 사람인데 내 부탁에 구안석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구안석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안리영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상상이 갔다.‘구안석은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서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마음에 상처 주는 걸까?’내가 말하려던 찰나 구안석이 입을 열었다.“전혀 귀찮지 않아. 그리고 오직 너만이 날 귀찮게 할 수 있지.”‘어라? 이건 또 무슨 말이지?’난 혼란스러워했고 안리영도 당황한 얼굴이었다.“선배... 그게 무슨...”“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구안석이 다시 말을 끊고 말했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렇다면 왜 다른 남자한테 관심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주는 거지?”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구안석 씨가 질투하는 거였네. 그런데 이 남자는 그걸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표현하다니. 아직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게 사실상 고백인가?나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고 나는 안리영을 지켜봤다.그녀도 그의 말에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선배, 지금... 저한테 질투하시는 거예요?”‘아니... 그걸 말이라고. 왜 다시 확인하는 거야?’“맞아. 너는 나만 좋아해야 해. 흔들리면 안 돼,”구안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는 정말 직설적이고 솔직했다.안리영은 한 번 목을 삼키며 말았다.“선배님, 저... 좋아해요. 그런데 선배님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요. 그래서...”그녀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난 싫다고 말한 적 없잖아.”구안석이 또 한 마디 덧붙였다.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몹시 기뻤다.‘이제 구안석도 안리영을 좋아한다는 거잖아!’안리영은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구안석의 말은 더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안리영, 나도 널 좋아해. 네가 날 좋아했던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말이야.”구안석의 고백은 점점 더 직설적이고 강렬
‘아파!’나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강한 손이 내 팔을 꽉 잡고 나는 그 힘에 끌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낯선 얼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를 놓고 갑자기 뒤돌아 뛰어갔다.나는 아픈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급하게 떠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 있는 안리영의 사무실을 보며 깨달았다.그 남자는 분명히 문 앞에 서서 나와 안리영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다.그렇게 집중해서 듣고 있으니 내가 나가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결국 내게 부딪히게 된 거다.그렇다면 이 사람은... 차가운 마음이라는 아이디로 알려진 사람이었을까?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진정우가 다가왔다.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안리영이 사무실 안에서 한마디 했다.“선배, 나 지금 배고파.”그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안리영, 역시 선수야. 갑자기 차가운 태도와 부드러운 태도를 오가고 있다니... 정말 잘 다듬어진 모습이야.’“뭘 웃어?”진정우가 가볍게 물었다.“안리영과 구 교수님 말이야. 결국 사귀게 됐어.”나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진정우는 잠깐 뒤를 보고는 내 책을 잡고 손목을 잡았다.“이제 돌아가자.”“소영이 혼자 괜찮을까?”나는 안리영에게는 말해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괜찮아.”진정우는 안심한 듯 말했다.“그동안 소영이는 고향에서 혼자 지내왔어.”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그러네. 소영이는 겉보기에는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그동안 정말 독립적이었지.’그렇게 말하는 진정우를 따라 나는 걱정 없이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가는 길에 진정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진소영의 수술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아 나도 조용히 있었다.차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진정우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나는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그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나는
진정우는 내 이마를 가만히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하지만 난 널 너무 좋아야. 정말 많이... 많이...”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뜨거운 곳으로 가져갔다.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확 빼고 몸 뒤로 숨겼다.그는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는 전혀 안 그런 거야?”“하나도 안 그래. 난 졸려. 그냥 자고 싶어.”나는 그를 밀치며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열쇠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진정우가 내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주었다.“당황하지 마.”그는 내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그 말에 내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열기가 나를 덮친 듯한 기분이었다.진정우는 문을 열어줬지만 내가 들어가려는 순간 내 팔을 잡았다.“정말 나를 안 들여보낼 거야?”“절대 안 돼!”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를 째려보며 소리쳤다.“정우 씨!”“알았어.”그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창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모든 방을 둘러본 뒤 다시 내 앞에 섰다.“확인했어. 문도 창문도 다 안전하고 집 안도 아무 이상 없어.”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다. 그리고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오늘 하루 종일 비행기도 타고 병원도 다녀왔으니 피곤할 거야. 샤워하고 푹 자.”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의 다정한 말투에 나는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벌주고 싶지도 않았다.사실 그가 고향에서 나를 대했던 태도가 떠올랐다.그건 진소영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우리 둘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잘 자. 지원아.”진정우는 내 손을 놓으며 돌아서려 했다.나는 순간 그를 붙잡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진정
진정우가 돌아간 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었다.안리영에게서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와 있었다.사진 속에는 잠들어 있는 진소영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너의 작은 시누이가 무사히 잘 자고 있음.]역시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였다.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 나의 여왕님.]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안리영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마치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이제 막 짝사랑하던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으니 나와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화면 속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있었는데 얼굴 가득 기쁨이 넘쳐나는 모습이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와, 얼굴에서 꽃이 피었네. 숨길 수가 없어. 이렇게 행복한 티를 내다니.”“칭찬 고마워. 지원아.”안리영이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나는 그녀를 더 놀리며 말했다.“근데 리영아, 너 꽤 사람을 잘 다루는 것 같더라. 오늘 보니까 수준급이던데?”“그래? 내가 그런가?”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당연하지.”안리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나는 아까 본 장면을 떠올리며 흥분해서 말했다.“리영아, 네가 고백받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알아? 구 교수님이 널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난 네가 당장 교수님의 품에 뛰어들 줄 알았어!”“그랬다면 너무 뻔하지 않아? 그래서 안 그랬어.”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혹시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하얘졌던 거야?”“아니야. 행복한 건 맞는데 일부러 그랬어.”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야. 감히 수작을 부린 거야?”“그런 셈이지.”그녀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원아, 나는 선배를 정말 오래 좋아했지만 내 감정에 휘둘리고 싶진 않았어. 그리고 선배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게 내게 어떤 큰 은혜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정말 연애에 대한 감각이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