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깔깔거리는 모습을 마침 진정우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게 되었다.“뭐가 그리 좋아?”내가 TV를 보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도 꺼져있는데 왜 혼자 웃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던 것 같다.그러다가 문득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두리안을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요즘 따라 두리안이 너무 먹고 싶었다.“손 씻고 내가 열어줄게.”진정우는 나더러 먹기만 하면 된다면서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너도 씻자.”그러면서 내 손도 같이 씻어줬는데 나는 방금 안리영에게서 들은 얘기를 그에게 해줬다.“그러면 뉴스에 나온 교통사고가 리영 씨 삼촌이었던 거야? 뉴스에는 그저 서씨 가문의 사람이라고만 하던데.”“조시언 씨는 항상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신비로운 사람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차...”그러나 뒷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돌아서다가 마침 그의 입술과 부딪히게 되었다.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정확하게 딱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역시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런 장면들도 다 지어낸 게 아니라 다 그럴만한 확률이 있었다.비록 나랑 진정우는 함께 산 지 오래된 노부부였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 어김없이 설레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진정우도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살짝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내 입술을 다시 베어 물었다.부드럽고 천천히...나는 혹시나 그가 감정 조절이 안 될까 봐 최근에는 거의 만지게 하지도, 심지어 뽀뽀도 금지했다.하여 이번에도 살짝 그의 입술을 피했는데 이 모습은 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소녀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입 맞추고 싶지만 또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진정우는 아주 처음부터 차분하게 내 입술만 쫓아가다가 나중에는 지쳤는지 다시 한번 깊게 빨고는 입을 뗐다.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생을 사서 하네.”“맞아, 그래도 하고 싶어.”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는 나를 데리고 거실에 가서 두리안을 열어줬다.한창 맛있게 먹고 있
안리영은 다시 조시언의 집으로 들어가면 들어갔지, 자기 집에 돌아가기 싫었다.조수민은 안리영을 설득할 수는 있어 조시언은 꿈쩍도 안 하는 모습에 결국에는 포기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둘 다 정말 고집불통이다!”그러다가 다시 안리영더러 조시언을 설득할 수 있도록 눈치를 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안리영, 오늘부터 삼촌이 다 나을 때까지 네가 옆에서 돌봐드려. 붕대도 갈아주고 검사받을 때도 같이 가주고 집에서 밥이랑 이불 빨래도 다 네가 해.”조수민은 언제나 이렇게 강압적으로 안리영을 대했다.안리영은 이 일로 조수민과 다퉜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사춘기 때는 모녀가 거의 매일 전쟁을 치르다시피 싸웠다. 만약 그 당시 조시언이 없었다면 안리영은 극단적인 생각도 했을 만큼 괴로워했다.그러고 보니 조시언이 그녀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할 수 있었다.“네네, 알겠습니다, 주 여사님. 이토록 소중한 삼촌인데 무조건 24시간 내내 돌봐드려야죠.”안리영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늘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보였다.“잔머리 굴리지 말고, 어디 두 번 다시 삼촌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네 양심상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그녀는 조시언이 이렇게 된 게 마치 안리영 때문인 것처럼 말했다.안리영은 자기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이 상황에서 대꾸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수민은 가기 전까지 그녀에게 당부했다.“날 속일 생각하지 마. 기습적으로 검사할 수 있으니까.”그렇게 조수민을 떠나보낸 후 안리영은 의자에 앉아 천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가 또다시 자신이 진짜 친자식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날을 잡아 머리카락으로 친자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무슨 생각해?”이때, 조시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그는 지금 팔만 다쳤을 뿐,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순간 조시언이 다리를 다치지 않게 도와준 하느
“다친 건 괜찮아요?”“응... 괜, 괜찮아.”서민호는 괜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멀쩡한 머리에 이렇게 붕대를 감으니 왠지 모르게 진짜 심하게 다친 것처럼 점점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그럼 몸조리 잘해요. 삼촌은 어느 병실이에요?”“저기야,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 저 혼자 갈게요.”그의 적극적인 태도에도 안리영은 한사코 혼자 가겠다고 했다.마침 서민호의 핸드폰이 울리게 되면서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안리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조수석에 앉았던 서민호가 이 정도로 다쳤으면 분명 조시언의 부상도 가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조시언의 병실로 가려는데 갑자기 뒤쪽 처치실의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 두 명이 나왔다.“생각만 해도 웃겨.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붕대는 왜 감아 달래?”“아까 못 들었어? 여자 친구가 보고 가슴 아파할 수 있게 일부러 그런다고 했잖아.”“정말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돼.”지금 혹시 서민호를 말하는 건가 싶어 안리영의 눈살이 순간 찌푸려졌다.‘그러면 다친 게 아니란 소린가?’평소에 다소 얼빠진 모습을 자주 보여준 걸 고려하면 왠지 그런 행동도 서슴없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조시언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왼쪽 팔에 깁스를 한 조시언의 모습이 보였다.“여기에는 왜 왔어?”안리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조시언 씨, 아무리 살기 싫어도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잖아!”삼촌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 보니 진짜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내 잘못이야, 나도 반성하고 있어.”조시언은 한껏 낮은 소리로 답했다.“충동적인 사람도 아니면서 왜 술을 마신 상태로 차까지 끌고 나갔던 거야?”안리영은 병원으로 오는 내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어제 같이 국수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고 여태껏 조시언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절대 이런 사고를 낼 만큼
병실 안.서민호는 핸드폰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찍다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나도 다쳤다고 누가 소문을 퍼뜨린 거야? 이 정도 부상은 나가서 보여주기도 애매하잖아!”가볍게 머리만 좌석에 부딪혀 빨개졌을 뿐이지 피나거나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이 틈에 조회수나 올려보겠다는 양심 없는 기자들이 마치 그가 거의 목숨을 잃을뻔했던 것처럼 자극적인 기사들을 낸 바람에 그의 어머니도 방금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그러면 기사 내용처럼 어디 돌이나 벽에 머리를 박으면 되겠네.”조시언의 농담 같지도 않는 말에 서민호는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뻔뻔스러운 놈, 그 차는 내가 어제 금방 뽑은 따끈따끈한 새 차란 말이야. 당장 물어내.”서민호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내 비서가 이따 올 테니까 지금 걸을 수 있으면 바로 가서 한 대 사든지.”조시언은 말에 서민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퐁퐁 뛰기 시작했다.“당연히 걸을 수 있지. 발레도 가능한걸?”역시나 단순한 서민호의 모습에 조시언은 어이없는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아니다.”방금까지 아이처럼 좋아하던 서민호가 갑자기 조시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아닌데?”“뭐가 아니란 거야?”서민호가 조시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 알아챈 듯 물었다.“너 일부러 차 사고 냈지?”방금 발레 춤을 추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나 보다.역시나 사람은 운동해야 머리도 좋아지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 같다.“일부러는 무슨, 얌전히 차 받고 싶으면 그 입 다물어.”조시언의 경고에 서민호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왜 일부러 몸까지 다쳐가면서 이런 일을 벌였어? 혹시 자학하는 걸 좋아해?”그러나 조시언은 그저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그렇다고 치자.”“대체 왜? 무슨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자학까지 하는 건데? 아니면 화가 나는 일이 있는데 어디 풀 곳이 없었어? 그것도 아니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야?”이제 보니 서민호의 망상증은 거의 중증에 가까운 것 같았다.“응, 병에 걸렸어.
“악! 조시언, 이 미친놈아!”좌석에 머리를 부딪힌 서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차는 멈췄으나 빠르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조시언이 앉고 있던 운전석 쪽이 이미 뒤틀려있었고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그리고 쓸린 자기 팔을 힐끗 쳐다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신고하지 말고 일단 구급차부터 불러.”“신고 안 하면 내 차는 누가 배상해 주는데?”서민호는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내가 할게. 나 술 마셨어.”그의 말에 서민호는 단번에 욕설을 내뱉었다.한편, 안리영이 눈을 떠보니 겨우 새벽 5시 30분이었다. 어제 분명히 늦게 잤지만 이상하게 일찍 눈이 떠졌다.그리고 눈앞에 익숙하지만 낯선 자기 방을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조시언의 집에서부터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열었는데 맨 먼저 [서씨 가문의 황태자, 차 사고로 병원에 입원]이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사실 해동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황태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민호, 한 사람뿐이었다.어제 분명 조시언도 같이 나가는 걸 보았던 안리영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고 기사를 쭉 내려보니 구급차에 실려 간 사진이 몇 장 더 뿌옇게 올라와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희미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해도 안리영은 그 사람이 조시언이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겨우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주 선생, 혹시 어젯밤 교통사고 났던 환자들은 지금 어떻게 됐나요?”“새벽에 차 사고만 총 4건이었는데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새벽만 되면 사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꺼번에 몰려온다.그러자 안리영이 빠르게 답했다.“기사에 난 서씨 가문의 환자분요. 몇 명이 다쳤어요? 많이 다쳤어요?”“아, 두 분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좀 심하게 다쳤어요. 조씨 가문의 황태자분이라던데 기사에는 내지도 못했대요.”의사는 한껏
우유를 들고 있던 조시언의 손이 살짝 떨리더니 얼굴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안리영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무 핑계나 대려고 하던 이때, 조시언이 먼저 답했다.“그래.”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리영은 우유를 받았다.“고마워, 삼촌.”그러나 이 고맙다는 인사가 자신을 통쾌하게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 아니면 미리 데워준 이 우유에 대한 감사인지 안리영도 헷갈렸다.그리고 냉큼 자기 방으로 돌아갔지만 조시언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어차피 조시언도 허락했으니 안리영은 더 지체할 필요 없이 바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원래 물욕이 없고 처음부터 이곳에 잠시만 머물다가 갈 생각이었기에 사실 정리할 짐도 없었다.안리영은 순식간에 가방을 싼 뒤, 방안을 한번 훑어보다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안녕.”아마 조시언이 서운해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장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굳이 한밤중에 갈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내일 아침 조시언이 깨나기 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러면 다시 그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문득 그가 준 우유가 생각난 안리영은 우유를 마시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빨리 자야 내일 아침 일찍 갈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안리영은 잠이 오지 않았다.가능한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 했으나 머릿속에는 온통 조시언 뿐이었고 아까 가까이에서 맡았던 쌉싸름한 알코올 향기도 그대로 나는 것 같았다.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괴로워하고 있던 이때, 갑자기 자동차 경적이 밖에서부터 들려왔다.조시언이 분명 오늘에는 차를 몰고 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 다른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잠도 오지 않았던 참에 안리영은 커튼을 살짝 열어서 확인해 봤는데 그는 조시언의 둘도 없는 친구인 서민호였다.“한밤중에 왜 부르고 난리야.”서민호는 차에서 창문만 내린 채 대뜸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그러나 안리영은 조시언이 뭐라고 답하는지 전혀 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