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내 핸드폰이 언제 꺼졌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다만 진정우가 욕실에서 나를 안아 침대로 옮겼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녹아버린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조차 들기 힘들었던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그대로 잠들었다.“조금 눈 붙이고 있어. 내가 죽 끓여줄게.”진정우의 낮고 약간 쉰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나는 희미하게 대답만 하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하지만 잠결에도 핸드폰 소리가 자꾸 들렸다. 뭔가 귀찮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눈도 뜰 수 없었다. 결국 손을 더듬어 옆자리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정우 씨... 정우...”나는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진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왜 그래?”“핸드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나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뭐라고?”그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핸드폰, 시끄러워.”다시 한번 반복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지원아, 꿈꾼 거야. 네 핸드폰은 꺼놨어.”정말 그랬을까? 그런데도 계속 들렸던 그 소리는 뭐였을까? 나는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진정우는 방 한쪽의 책상에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깬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는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그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허진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이 방해될까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내 움직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다가왔다.“왜 나를 안 불렀어?”“너무 바빠 보여서.”내가 대답하자 내 목소리가 쉰 소리로 나왔다. 그제야 지난밤의 열정적인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진정우도 알아차렸는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이따가 목캔디 사다 줄게.”“괜찮아. 난.
“머리만 감고 샤워를 안 한 적은 있지.”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빨리 씻어 그러다가 밤을 새우겠어.”나는 재빨리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또다시 그에게 끌려갈 것 같았다.처음 진정우를 만났을 때 그는 차갑고 거칠며 여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고 성욕이 전혀 없는 남자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제는 이런 남자가 욕망을 자극받으면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지 알게 되었다.그가 씻으러 가고 나는 식탁을 정리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배운 습관 덕분에 먹고 난 그릇을 그대로 두는 일이 없었다.아직 주방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고 단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울렸다. 확실히 우리 방이 맞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나는 손을 닦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진정우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그래도 습관적으로 문 앞에서 먼저 물었다.“누구세요?”“나야.”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강유형이었다.이 늦은 밤에 왜 날 찾으러 온 거지?오늘 아침에 마주쳤을 때도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던 그가 왜 지금 내 문 앞에 있는 거지?내가 문을 열지 않자 강유형은 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나는 그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주변 사람들을 깨울 걱정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와 마주하는 게 싫었지만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마침내 문을 열자 강유형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문을 두드리던 손은 멈춰 있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그의 말에 나는 오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못 들었어. 그런데 왜...”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내 팔을 잡았다.“나랑 가자.”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강 대표님, 시간이 없어요!”비행기 승무원이 서둘러 출발을 요청했다.개인 비행기라도 정해진 항로와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출발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됐어.”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딱 1분만 줄게.”강유형이 승무원을 향해 말했고 그 후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그가 이렇게 내게 전화를 허락한 것이 의외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는 얼마든지 규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유형은 내 시선을 피하고 창밖을 응시했다.“출발하세요.”나는 휴대폰을 승무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승무원은 그의 의사를 묻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비행기의 실제 소유자였기 때문이다.잠시 후, 강유형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냉정하게 말했다.“출발해.”승무원이 그의 지시를 무전으로 전하며 비행기는 천천히 이륙 준비를 했다.그때, 강유형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나서 나를 다시 바라봤다.나는 그것이 진정우의 전화임을 직감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가 이륙 중이었고 나는 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그의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니 예상대로 진정우였다. 나는 직접 전화를 끊고 그의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비행기가 상공으로 오르고 승무원이 담요와 음료를 가져다주었다.“괜찮아요. 방금 야식을 먹어서요.”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검은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그 어둠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강유형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삼촌이 갑자기 위독해진 이유도 묻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서
“집에 나랑 네 삼촌뿐이었어. 요즘은 고양이나 강아지도 다 네 삼촌 비위 맞추고 사는데... 누가 삼촌을 화나게 했겠어.”아줌마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멈췄다.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 그래. 네 삼촌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등을 주물러 주고 나니까 소파에 잠깐 눕겠다고 했었어. 그런데 내가 전화 받는 동안 네 삼촌도 전화를 받았던 것 같아.”혹시 그 전화가 삼촌의 상태를 악화시킨 원인이었을까?“아줌마, 삼촌 전화기는 어디 있어요?”나는 서둘러 물었다.아줌마는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안 가져왔어. 아마 집에 있을 거야.”지금 당장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그 전화가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았다.조금 뒤, 강진혁과 강유형이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어두웠다. 특히 강진혁은 삼촌의 상태를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강유형에게도 전한 것 같았다.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들을 찾아서 진실을 알고 싶었으나 아줌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를 유일한 희망처럼 붙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응급실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의사가 나왔다.“의사 선생님, 아버지 상태가 어떻습니까?”강진혁과 강유형이 동시에 물었다.“출혈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습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의사의 말은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우리 모두 침묵한 채 있었고, 의사는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시간을 조금 더 살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삼촌의 생명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강유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삼촌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보호자 중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나를 추천했다.“지원아, 삼촌이 병원에 오는 내내 네 이름만 불렀어.”
삼촌이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내가 아는 삼촌은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울지 마, 지원아... 울지 마.”삼촌은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내 옷으로 훔쳤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이 옷은 내 옷이 아니었다. 강유형의 외투였다.호텔에서 그에게 끌려 나올 때 나는 잠옷 차림이었다. 차 안에서 강유형이 자기 외투를 건넸고 나는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슬립형 잠옷만 입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외투를 입었다. 그 외투를 지금도 입고 있었다.“네, 안 울게요.”나는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삼촌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고도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나는 삼촌의 손을 더 꽉 잡고 다짐하듯 말했다.“괜찮아지실 거예요. 꼭 괜찮아지실 거예요.”“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지...”삼촌의 목소리는 너무 힘이 없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는 평생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지원아, 너는 네 엄마를 참 많이 닮았구나.”삼촌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그 말을 들으니 문득 예전에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나와 많이 닮았다는 유희연이 생각났다.우리는 끝내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 다른 세상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우리 엄마가 정말 예쁘셨나 보네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삼촌도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네 엄마는... 아주 현명하고 자애로웠지."“아줌마처럼 말이에요?”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삼촌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지원아, 너는... 정말 착한 아이야. 반드시 행복할 거야.”삼촌의 말을 들으니 그의 마음속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진 일에 대해 미안함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네. 저는 지금도 행복해요. 정우
평생 아빠, 엄마의 교통사고에 대해 의문을 품어온 나는 삼촌의 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아니야.”삼촌은 여전히 부인했다.“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일에 집중하고 진정우와의 미래에만 신경 쓰라는 뜻이야.”삼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를 말리려 다가왔지만 삼촌이 손짓으로 그녀를 막았다. 간호사는 결국 한 마디만 덧붙였다.“마지막으로 1분만 더 하세요.”나는 삼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기에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몸 상태를 우선으로 해야 했다.“삼촌, 우리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쉬세요.”하지만 삼촌은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지원아, 약속해 줘.”삼촌의 말을 들은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의 집착은 분명 내 부모님의 사고에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삼촌이 지금 상태로는 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나는 삼촌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약속할게요.”삼촌의 눈빛은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지만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다.“지원아, 앞만 보고 살아. 삼촌 말 꼭 기억해.”이 말은 얼마 전 내가 소지훈에게 했던 말이었다.하지만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완전히 잊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을까?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만 나는 그들의 무덤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용기가 생길 것이다.간호사가 삼촌의 산소마스크를 다시 씌우자 그의 호흡은 차츰 안정되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간호사는 그를 잠들게 하지 않으려 했고 나는 삼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삼촌은 겨우 “응”과 “아”로만 대답할 뿐이었다.면회 시간이 끝나고 삼촌은 제대로 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복도에는 강진혁과 아줌마가 보이지 않았고 강유형은 혼자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내가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그의 향기, 그리고 숨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나는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의 낮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이제는 진정우를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그러자 나는 손끝이 움찔하며 주먹을 쥐었다.한때 나도 그를 그렇게 신경 썼다.안리영과 밥 한번 먹으러 가도 꼭 그에게 알렸고 하지만 그는 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런데 이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자 오히려 그가 화를 내며 나를 다그치고 있다.“그래. 내 남잔데 내가 신경 안 쓰면 누가 신경 써?”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상처를 주는 말도 기술이었다.지금의 강유형과 나는 이미 서로 멀어졌지만 그가 내게 남긴 상처는 아직도 생생했다.무심코 떠오르는 순간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을 후벼 팠다.그래서 그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있다면 그동안의 내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그가 아직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강유형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이건 그가 화가 날 때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그의 모습을 보니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참 우습네.’공식적으로 다른 사람과 엮였다고 알려진 그가 이제 와서 이런 반응이라니.그렇다면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그의 마음을 찔러서 내 상처를 조금씩 보상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나는 핸드폰을 찾아서 진정우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진정우는 아직 회복 중인 여동생을 두고 멀리까지 나를 위해 따라와 줬는데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더구나 그 대상이 과거의 연인이라면 아무리 그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준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을 리 없었다.나는 강유형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아섰다.그런데 그는 내 허리를 다시 한 손으로 붙잡아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강유형, 지금 뭐 하는 거야!”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밀쳤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지원
나는 왜 그를 밀쳐내지 못했을까?강유형은 여전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착각하며 집착한다면 나는 그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결국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건 그 자신일 테니까.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아니면 내 부모님이 하늘에서 내 지난 10년간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강유형이 나와의 과거를 잊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조금 있으면 고준석이 핸드폰을 가져다줄 거야. 들어가서 푹 쉬어.”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감싸던 손을 풀었다.그는 뒤돌아섰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다.한때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내가 이제는 그 모습이 아련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나는 로비로 내려갔다.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고준석이 도착했다.“윤 팀장님.”나는 더 이상 그의 비서가 아니었지만 고준석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하지만 호칭 따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강 대표님이 직접 주문하신 핸드폰입니다. 윤지원 씨가 쓰시던 브랜드의 최신 모델이에요.”그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핸드폰은 필요 없으니 당신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고준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윤 팀장님, 그건 조금...”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거절한 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핸드폰 빌릴 수 없으면 그냥 됐어요.”나는 말하며 돌아섰다.“아, 알겠어요!”고준석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그 핸드폰을 받아 들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자동 응답 메시지가 들려왔다.진정우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혹시 진정우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 걸까?혹시 몰라 내 핸드폰에도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통화 연결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진정우가 화가 나서 내 전화를 일부러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