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형은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턱에는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이 한밤중에 그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아마도 강유형은 삼촌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내게 계속 전화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내가 그를 미워하고 그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보니 미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보고 나니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아마 모든 감정이 무뎌져서 그런 것 같았다.그는 문 앞에서 서 있기엔 불편해 보여서 나는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들어와서 이야기해.”그가 들어와서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엄마가 모든 걸 나에게 말했어... 지원아, 미안해...”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고 그가 내게 온 이유가 단순히 사과하려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지원아,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오늘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건... 아니, 사실은 부탁이야...”그는 잠시 망설였다.“부탁이라고?”나는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온 걸 듣고 놀랐다. 평소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는 늘 대충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분명히 부모에게는 효자였다.“지원아,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 아버지는 이제 네 부모님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부탁할 수 있는 건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거야. 내가 대신 그 빚을 갚을게.”“너는 그게 무슨 빚인지 아냐?”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물었다.“그건 목숨이 달린 빚이야.”그러자 그의 시선이 잠시 땅에 닿았다.“알아. 그래서 네가 아버지를 용서해 준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게.”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게 바로 내게 주는 고통이었다.“그럼 네가 뭘 하면 내 부모님을 살릴 수 있겠어?”나는 그의 말을 더욱 날
강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두 시간 뒤였다. 강진혁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지원아, 유형이 교통사고를 당했어. 지금 응급처치 중인데 좀 와줄 수 있겠어?”강진혁의 목소리는 매우 급했다.나는 그가 말하는 걸 듣고 나서 손이 떨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와 싸웠던 기억이 떠올라 핸드폰이 떨어져 버렸다.강진혁 쪽에서 아마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지원아, 괜찮아? 너 괜찮은 거 맞아?”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던 안리영이 급히 달려 나왔고 내 얼굴을 보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 오해하지 마. 네가 와야 하는 이유는 유형이 지금 치료 중이라서 네가 혈액을 공급해 달라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와서 유형이를 한 번만 봐달라는 거야. 유형이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계속 네 이름만 부르더라.”안리영은 내가 말한 대로 핸드폰을 주워서 강진혁에게 대신 대답했다.“강유형과 지원이는 이제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런 소식은 필요 없습니다.”강진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안리영은 전화를 끊고 나를 옆에 앉히며 어깨를 감싸안았다.“이 강유형 집안은 정말 끝까지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나?”“다 내 잘못이야...”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라고...”안리영은 내가 강유형과 싸운 사실을 모르지만 내 감정을 헤아려서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대신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지원아... 이러지 마. 뭐든지 혼자서 다 짊어지려 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불안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강유형을 미워했고 그의 집안 사람들을 증오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생사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죽으면 나의 분노도 함께 사라질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강유형의 집안이 내 부모님의 죽음을 밝히고 난 뒤 나는 계속해서 혼란스러웠고 나아갈 길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 머리는 터질 것처
“그럼 왜 넌 모든 사람을 위해 소원을 빌었어?”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러자 안리영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며 말했다.“지원아, 난 이 몇 년 동안 참 많이 봐왔어. 암에 걸린 여성들의 절망과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의 안타까움... 너무나 많은 생사이별을 봤어.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래서 이제는 그런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내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안리영은 내 손을 잡고 이어 말했다.“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거야.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거고.”그 말을 들으며 나는 잠시 안리영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단순히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녀 주위에 마치 부처님의 빛이 감도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이어서 나에게 물었다.“넌 산에 올라갈 거야? 안 가도 괜찮아. 여기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마음만큼은 진실하니까.”“올라갈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네 몸 상태 괜찮겠어? 그냥 나랑 같이 내려가자.”안리영은 여전히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말을 마친 후 나는 산꼭대기의 사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올라가서 네 소원도 같이 빌어줄게.”“하하.”안리영이 다시 웃었다.“그럼 고마워. 하지만 나는 진짜 올라갈 수 없어.”안리영은 나를 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내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신경 쓰는 듯 보였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안리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톡 쳤다.“무슨 일이긴... 아무 일 없다고. 그냥 산을 오르는 게 무서워. 예전에 한 번 올라갔다가 진짜 거의 죽을 뻔했거든.”“휴...”안리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산 오르는 게 좀 트라우마가 있어.”나는 고
하룻밤 저러고 있었다고...내가 강씨 가문을 떠난 뒤 아줌마가 이곳에 왔나 보다.그녀가 무릎을 꿇고 등을 구부린 채로 복판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손으로 움켜잡은 듯했다.스님이 그쪽으로 다가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아줌마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아줌마.”그러자 아줌마는 몸이 한 번 떨렸고 그 뒤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술만 떨며 눈물을 흘렸다.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 그제야 하룻밤 사이에 많이 희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지원아.”아줌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그녀의 품은 나에게 그 누구보다 익숙하고 따뜻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손을 들기조차 힘들었다.“지원아, 아줌마가 잘못했어. 죄를 뉘우치러 부처님에게로 왔어.”아줌마는 내 귀에 흐느끼며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사죄와 애원으로는 내 부모님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나는 사찰의 부처님 동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내 부모님의 부재를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내가 무엇을 하거나 또 얼마나 그들을 미워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감정이 나와 살아있는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안리영이 했던 말과 스님이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 부모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미움이 부모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미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결국 나만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다.“아줌마, 무슨 소원을 빌어도 돌아오지 않아요. 아줌마는 그냥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을 뿐이잖아요.”내 목소리가 목에 걸리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부처님께서 줄 수 없어요. 오직 내가 줄 수 있어요.”왜냐하면 내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놓았다.“전화해서 물어볼게.”그녀는 전화하러 가고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나는 모든 이들의 평안과 순조로운 삶을 기도했다.그때 아줌마의 목소리가 내 기도 속에서 들려왔다.“강진혁, 날 속이지 마. 정말 괜찮은 거야? 알겠어. 지금 바로 돌아갈게. 유형에게 말해줘 난 지금 법운사에 왔다고. 여기서 지원이도 만났어.”아줌마는 말을 마치고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지원이는...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유형에게도 말해줘. 지원은 괜찮고 우리 잘못도 용서했다고... 알겠어...”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 절은 단순히 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묶여 있던 모든 감정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아줌마는 돌아갔고 나는 스님이 읊조리는 경을 들으며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저녁이 되어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는 그곳에 있었다.안리영이 나를 데리러 왔고 그녀는 해바라기 꽃 한 송이를 건넸다.“너 이제 다시 태어난 거야. 축하해.”그녀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이번에 모든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나 자신을 놓아줄 수 있었다.안리영과 나는 서로를 안고 산에서 내려갔고 지 사장네 가게에 가서 술을 마셨다.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아주 늦게까지 마셨다. 모든 사람이 떠난 뒤 우리는 지 사장을 불러 함께 마셨다.“사장님, 이 술집은 평생 열어줘야 해요. 우리가 치아 없이 늙어버려도 여기에 와서 한 잔씩 할 수 있게 말이죠.”안리영이 내 어깨를 감싸며 지 사장한테 부탁했고 그러자 지 사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치아를 잃을 때면 저는 이 세상에 없을 거겠죠.”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사실을 말한 거였다.나는 안리영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지 사장은 술잔을 우리에게 흔들며 말했다.“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고 있죠. 그래서 죽음은 필연적인 거죠. 그러니 이르게 오든 늦게 오든 뭐가 중요하겠어요?”그 말에
나는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살짝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 그리고 콧날이 살짝 올라간 모습은 분명 중서양 혼혈이 분명했다.그가 다시 만났다고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나를 스누커 소녀라고 부르며 말을 걸었다.분명히 그는 나를 알고 있었고 내가 스누커를 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네?”나는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저는 브라운이라고 하죠. 신지태의 당구장에서 당신이 당구를 치는 걸 봤어요. 정말 멋졌어요! 아니. 멋졌다가 아니라 날카로웠다고 해야 하나요?”그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고 그의 말은 내 의문을 풀어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었다. 내가 당구를 칠 수 있게 된 건 강유형에게 배운 것이고 신지태와 함께 칠 때도 항상 강유형과 함께였지 다른 사람이랑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가 말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분명히 한 번쯤은 만났던 사람이라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혼혈인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알았던 사람일까?그렇지만 스누커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는 부인했다.“그건 착각일 뿐이에요.”“절대 착각 아니에요. 확실히 당신이었어요.”그 남자는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고 그는 파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윤... 지원 씨... 맞죠?”그는 내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나는 점점 그와 얽히는 게 불편했다.익숙하지 않은 남자가 내 이름을 알다니 어떤 목적이든 간에 경계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미안하지만 저는 그쪽을 몰라요.”나는 그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고 했지만 그는 내 길을 막았다.“악의는 없어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서 말 걸었어요.”나는 갑자기 불쾌해졌다.“그런데 저는 당신과 친구로 지내기 싫어요. 비켜요.”“지원 씨랑 한 게임 하고 싶어요.”그는 여전히 나를 붙잡으며 말했고 나의 불
“무슨 당구를 친다는 거야? 오늘 여긴 연회를 하는 자리야. 당구 대회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당구 치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허진호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하며 브라운의 손목을 꽉 쥐었다.“이거 놓으라고.”순식간에 브라운의 얼굴이 빨개졌고 허진호의 힘 때문에 고통을 느낀 게 분명했다.허진호도 생각보다 꽤 손에 힘이 있는 모양이다.하지만 브라운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진정우가 말을 던지면서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고 그의 시선은 브라운이 내 손을 잡은 곳에 떨어졌다.브라운은 그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정우, 난 그냥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당구 한 게임 하자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지원 씨가 내 체면을 전혀 세워주지 않네.”진정우는 내 얼굴을 지나쳐 브라운을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왜 지원 씨가 네 체면을 챙겨줘야 하는 거지? 넌 누구야? 누가 너를 데려왔어?”그의 세 가지 차가운 질문이 떨어지자 누군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진정우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려. 이 자식과 이 자식을 데려온 사람은 오늘 이 연회에서 나가라고.”그러자 브라운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는 그냥 진씨 가문의 외부에서 온 잡종이야... 나를 쫓아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이번엔 진정우가 말하지 않자 그의 경호원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브라운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아냥거리며 떠났고 떠나면서 나에게 윙크하며 한마디 덧붙였다.“지원 씨, 이제 게임 한 번 하자. 약속했어.”정말 거만한 놈이었다.“뭐야?”허진호는 욕하며 진정우를 바라보았지만 진정우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저 자리를 떠났다.허진호는 진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목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붉어졌네요. 저 외국 놈은 정말 여자를 어떻게 대는지도 모르나 봐요.”허진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파요?”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불어주
“오늘 전하려는 또 다른 기쁜 소식은 바로 진씨 가문과 용씨 가문의 결혼 소식입니다. 진정우는 3개월 후에 용씨 가문의 아가씨 용설아와 결혼할 것입니다.”진정우의 할아버지의 말은 마치 얼음물 한 바가지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나는 순간 온몸이 차가워졌다. 어쩌면 이게 진정우가 나와 헤어지려고 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용설아, 나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용준호의 여동생이며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 내가 용진표를 조사할 때도 이 정보를 알게 되었고 당시 용설아의 높은 학력에 관심이 갔었고 그녀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도 정말 예쁘고 박사학위도 가졌으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라고 할 수 있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 발걸음은 너무 빨라서 신은 하이힐이 내 발을 따라오지 못했고 나는 문 앞에서 거의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사람이 안 풀리면 물 한 모금 마셔도 체한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 것 같았다.발목의 고통을 참으면서 나는 문 앞에 도달해 차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지금 나는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고 1초라도 더 머무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그때 내 손이 겨우 들려 했을 때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면서 강진혁의 얼굴이 보였다.“내가 데려다줄게.”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강진혁은 내 말을 끊었다.“지원아, 네가 이미 우리 집안 사람들과 다 얘기를 했지만 나랑은 아직 확실히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이 딱 좋은 기회야.”그의 말이 맞았다. 삼촌이 모든 걸 털어놓은 뒤 나는 강유형과 이야기했고 아줌마와도 얘기를 나눴지만 강진혁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강진혁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슬픔을 눌러가며 말했다.“오빠는 내가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