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이 거대한 악어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자, 그 악어는 바로 진정우 쪽을 향해 돌진했다.수조 안에는 이미 여러 마리의 거대한 악어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최상위 포식자인 패왕 악어까지 가세했다.아무리 진정우와 용설아, 강유형이 함께 싸운다 해도 이건 버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더는 지켜볼 자신도 없었다.“꺄악!”그때 용설아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 있는 힘껏 뭔가를 찌르고 있었고 바로 그 순간 진정우가 강유형을 힘껏 잡아당겨 수조 가장자리로 던졌다.그리고 이어서 용설아까지 끌어올린 후, 수조 안의 악어 머리를 디딤돌 삼아 단숨에 뛰어올랐다.그들은 악어 떼를 뚫고 빠져나왔고 나는 그제야 간신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브라운의 느긋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역시, 진정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군.”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칭찬까지 했다.그 순간, 용설아가 단숨에 몸을 날려 브라운에게 달려들며 날렵하게 칼을 꺼내 그의 목에 들이밀었다.그리고 근처에 있는 브라운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너희 보스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윤지원을 풀어줘!”이제는 나를 구할 차례인가 보다. 솔직히 용설아가 나를 구하려 먼저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하지만 브라운의 부하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브라운 역시 목에 칼이 닿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소용없어. 얘네들은 내 말만 듣거든. 그리고 말이야, 내가 죽으면 저 여자는 그냥 여기서 바람 맞으며 말라 죽겠지?”“풀어주라고 했잖아!”용설아가 이를 악물고 칼을 더욱 깊이 누르자 브라운의 목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했고 오히려 진정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테스트 게임은 끝났어. 이제... 우리도 결산해야지?”“좋아. 너와 결산을 하지. 대신 나머지 사람들은 보내.”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했다.“그
“진정우, 우리 사이의 빚을 어떻게 청산할까?”브라운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비아냥거리듯 물었다.사실 그는 이미 진정우를 어떻게 다룰지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단순히 그를 조롱하려는 속셈일 뿐이었다.그러나 진정우는 여전히 침착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겠지.”진정우라는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이 차분했다.헤르나나 브라운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는 마치 거대한 산처럼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브라운은 손에 들고 있던 알록달록한 스누커 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우리 사이가 틀어진 건 이 공 때문에 아닌가?”진정우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브라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우리 둘이 한 판 붙어보는 건 어때? 네가 나를 이기면... 진정우를 풀어주는 조건을 걸지.”브라운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와 스누커를 치고 싶어 했고 그 집착은 여전했다.하지만 왜 굳이 나와 스누커를 치려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왜 나랑 치고 싶은 건데?”나는 솔직한 의문을 던졌다.“너랑 치고 싶으니까. 너도 알잖아? 며칠 전 대회에서 너 얼마나 완벽하게 쳤는지.”브라운은 단순히 나를 도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지금 이곳은 그의 영역이고 내가 거부한다 해도, 그는 강제로 나를 테이블 앞에 세울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그의 도전에 응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나는 그의 제안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기로 했다.“내가 널 이긴다면 정말 과거의 일은 잊을 수 있는 거야?”나는 진정우를 풀어달라는 직접적인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냉정함에 비하면 그 정도의 배려조차 아깝게 느껴졌으니까.“물론이지. 난 말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브라운은 뜻밖에도 흔쾌히 수락했지만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근데 네가 지면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네가 결정해 봐.”나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해.”브라운은 만족스럽다는 듯 박수를 쳤다.“통이 크네. 그래서 남자들
“오늘은 한 번의 스트로크로 모든 공을 넣어야 해. 한 개라도 남으면 네가 지는 거고 제한 시간은 15분이야.”브라운이 경기 규칙을 선언했고 나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좋아!”“준비됐으면 바로 시간 잰다.”그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마치 VIP 관객이라도 된 듯 경기를 지켜봤다.나는 테이블 앞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시간을 재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고 카운트가 시작되자마자 큐를 들어 올렸다.팡! 팡! 팡!공들은 정확히 포켓에 빨려 들어갔다. 10분이 지나자 테이블 위에는 단 두 개의 공만 남았고 승리는 이미 확정적이었다.나는 심호흡하며 마지막 한 큐를 준비했다. 집중력을 끌어올려 큐를 휘둘렀고 또 하나의 공이 깔끔하게 들어갔고 이제 단 하나 남았다.바로, 그때.“짝! 짝!”브라운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방해하려는 걸 알았지만 무시하고 마지막 공을 향해 큐를 들었는데 갑자기 발밑에서 차가운 감촉이 스치면서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꺄악!”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려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손에서 큐가 날아가면서 공이 튕겼고 주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순간, 용설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이건 무효야! 반칙이잖아!”아직도 심장이 요동치던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황한 채 브라운을 바라보았고 그는 능청스럽게 바닥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는 그의 손끝을 따라 쳐다봤더니 그곳에는 황록색 줄무늬의 뱀이 꿈틀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방금 나를 스친 게 저거였다고?’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물컹거리는 것들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애벌레조차도 질색인데 뱀이라니.브라운은 태연하게 뱀을 들어 올려 팔에 감으며 웃었다.“내 귀여운 녀석, 왜 몰래 도망쳤어? 누나를 깜짝 놀라게 했잖아.”그는 능청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녀석, 사람 안 무는 착한 애야. 못 믿겠으면 한번 만져볼래?”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미쳤다고 그걸 만지겠냐?”브
진정우가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채, 각자 앞에 스누커 공이 한 바구니씩 놓여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브라운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오늘 진정우를 인간 샌드백으로 만들 작정이었다.“브라운, 네가 진짜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1대1로 붙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남자냐?”용설아가 참지 못하고 그를 도발했다.“브라운, 이렇게까지 하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소문이라도 나면 네 체면이 남아나겠어?”방금 상처를 치료받은 강유형도 가세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순간일수록 진정우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브라운은 더 악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그와 깊은 교류는 없었지만 나는 이 남자가 철저한 미친놈라는 걸 이미 깨달았다.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내가 남들한테 조롱당한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이제 와서 그런 게 두려울 것 같아?”역시, 브라운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이건 공정하지 않아.”용설아가 끝까지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공정하지 않다고? 그럼 너도 같이해.”브라운이 손짓하자, 용설아는 순식간에 끌려 올라갔다. 그러자 진정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괜히 그를 자극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자극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널 도와주겠어?”용설아는 그와 나란히 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천생연분.’그녀는 브라운의 속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려고 일부러 자극한 것뿐이었다.“브라운, 이건 너랑 나 사이의 문제야.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하면서 용설아가 다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맞아, 원래는 걔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어쩌겠어? 네 여자가 널 지키고 싶어 하는걸.”브라운은 비꼬듯 웃으며 혀를 찼다.“너희 둘 참 애틋하네, 그렇지? 우리 미녀 스누커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지
스누커 공의 무게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뼈까지 부러뜨리진 않더라도, 제대로 맞으면 살이 움푹 팰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한 팔이 나를 감싸안았다.쿵! 쾅! 팡! 팡! 팡!사방에서 공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 공 사이에서 회전하며 휘청거렸다.그러나 나를 안고 있던 진정우는 놀랄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로 움직이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그의 한쪽 팔이 단단히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이끌려 쉼 없이 몸을 틀어가며 쏟아지는 공을 피해 다녔다.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공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어떤 것은 그의 손이나 팔로 튕겨 나갔고 어떤 것은 우리가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비켜 지나갔다. 이게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이하면서도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브라운, 이제 그만해! 당장 멈추라고!”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쏟아지는 공이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공은 여전히 끝없이 날아왔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정우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숨이 가빠지고 그가 나를 안고 움직이는 속도도 처음보다 확연히 느려졌다.“퍽!”바로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며 흔들리는 걸 보았다. 진정우가 공에 맞은 것이다.“진정우!”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가 나를 안고 있는 이상, 나는 오히려 그가 회피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고 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그에게 도움이 될 순 없어도, 적어도 짐이 되지는 않아야 했다.“조금 있으면 널 밖으로 밀어낼 거야.”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의 속삭이듯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는, 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익숙한 온기였다.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도
“진정우! 진정우!”나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이 빠져, 쓰러진 진정우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진정우, 대답해! 제발 대답 좀 해봐!”용설아가 그를 안고 필사적으로 흔들며 애타게 외쳤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함께 잠을 잘 때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깨고 늘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가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브라운! 당장 구급차를 불러! 빨리!”용설아가 소리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그제야 얼어붙었던 내 머릿속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끔찍한 생각이 스쳐 가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간신히 힘을 짜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을 짚으며 앞으로 기어가듯 움직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강유형!”바로 신지태였다.곧이어 여러 사람이 몰려들었고 신지태가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내 시야를 가로막았고 그사이 진정우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풀려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겨우 입을 열어“진정우”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브라운은 체포되었고 강유형 역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쓰러진 진정우의 모습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병원 응급실 앞에서 나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수술실의 붉은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지친 의사가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붙잡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 하나였다.“현재 응급처치 중입니다.”“이제 그만 묻고 그냥 기다리세요.”옆에서 용설아가 나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지만 진정우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후두부 뼈가 부서졌어요.”용설아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뭐라고요?”“정
“정우는...”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설아는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아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원 씨는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셨죠?”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극비 특수 요원이었어요. 3년 동안 국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던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죠.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브라운이나 헤르나는 그 조직의 잔당에 불과해요.”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정우는 임무를 마친 후 전역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신지태 씨 사건을 통해 그 조직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게다가, 그 조직의 남은 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고 해요. 그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직접 정우를 건드리기 어려우니, 결국 그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어요.”용설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그가 지원 씨와 헤어진 이유예요. 그리고 그의 진짜 정체와 배경이죠.”나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혹시... 설아 씨는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나요?”내가 어렵게 물었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진정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용설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그와 함께 싸운 적 없어요. 우리의 관계도 모두 거짓이었어요. 그가 그렇게 한 것도, 결국 지원 씨를 지키기 위해서였죠.”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자신이 조사당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원 씨와 헤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저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저와 함께 있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수술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용설아 씨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세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가려 했지만 용설아 씨는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환자의 후두부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봉합을 시도했지만 뇌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요. 출혈 부위도 여러 군데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순간, 용설아 씨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가누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침대 위에는 수술복을 덮고 누워 있는 진정우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머리는 하얀 붕대에 감겨 있었다.나는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그때, 용설아가 조용히 말했다.“지원 씨,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설아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그녀가 나를 데리고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나는 마침내 진정우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평소에 그가 잠들었을 때처럼, 조용하고 평온해 보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정우야...”용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용설아 씨가 다시 말했다.“정우야, 정신 차려. 지원 씨가 왔어.”그 순간, 그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