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콜록...”감기가 걸렸는지 한밤중에 기침이 나왔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꼭 기침을 심하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 산속은 기온이 낮아 금세 병이 도진 것 같다.“콜록, 콜록...”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뭔가 이물질이 걸린 듯한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물을 마셨음에도 기침이 가라앉지 않을 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한밤중에 울리는 노크 소리는 섬뜩한 법이지만 여기는 절이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문밖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옆방에 있는 운약 스님이네.”운약은 김지영의 법명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이미 속가 신도가 된 상태였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공손히 합장했다.“스님.”“기침이 심하더구나. 그래서 목에 좋은 비즙을 가져왔어.”김지영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었는데 정수리 부분이 살짝 부풀어 있었고 이마는 둥글고 넓었다. 단번에 복이 많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아들을 두었다.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감사합니다, 사모님. 한밤중에 신경 써 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나는 그녀가 내민 배청을 공손히 받으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힘들게 찾았던 걸 갑작스럽게 찾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인 것 같다.마침 그녀와 연결고리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감기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만들게 되다니.‘역시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몸이 냉한가 보구나. 산속은 기온이 낮은데 젊은 아가씨들은 대개 옷을 얇게 입더라고.”김지영은 내 이불을 흘낏 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네, 두꺼운 옷을 가져오지 못했어요.”이 말에도 나름 계산이 있었다. 일부러 조금 안쓰러운 척해야 그녀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김지
옷의 재질을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값비싼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넘겨주었고 그 순간 나는 묘한 감동과 함께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나는 그녀를 이용하려 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사모님, 이 옷 너무 귀한 거라서 받을 수 없습니다.”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귀하다니,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야.”그녀의 태도와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진정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 그녀가 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 “사모님, 제 이름은 윤지원입니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나는 순간 멍해졌고 그녀는 이내 덧붙였다.“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니까.”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설명했다.“전에 우리 아들이 널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당연히 알아봤지. 하지만 네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 아들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어.”‘그랬구나.’나는 그녀의 온화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사모님, 사실 오늘 사모님 뵈러 여기 왔어요.”“그럼 앉아서 얘기해 봐.” 그녀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솔직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나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녀 곁에 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열리는 법이니까.“사모님, 저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나는 더 숨길 것도 없이 내 처지와 진정우의 상황을 모두 털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회장님과 용준호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면 저와 그것을 함께 없애버릴 겁니다. 살아남으려면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해요.”그녀는 어느새 손에 염주를 들고 한 알 한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전히 그의 뒷모습뿐이었다.환한 달빛 아래 그 익숙한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가깝지만 멀기만 한 거리였다.“강유형, 고마워.”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지영한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지영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히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그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그 순간 나는 머리 위로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강유형과 함께한 10년의 시간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다들 말하길, 헤어진 연인은 마치 젊은 날을 헛되이 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들 수 없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찍어 SNS에 올렸다.[이제는 놓아줄 거야.]그 순간 안리영이 바로 좋아요를 눌렀고 메시지를 보냈다.[뭘 놓아준다는 거야?][과거.]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아직 안 자? 혹시 이제 막 수술 끝났어?][야근 중.]그녀의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작고 붉은 얼굴의 신생아 사진과 짤막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1385번째 천사야.]그 숫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받아낸 아기들의 수를 뜻했는데 그녀의 성과와도 같은 숫자였다.사진 속 갓난아기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안리영과의 채팅창을 끄고 진정우의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작성했다.[돌아와 줘. 우리 아기 갖자.]하지만 메시지는 끝내 답이 없었다. 그가 답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답장을 기다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정말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의 답장을 받고 싶었다.[기다려.]그 한마디 말이다.그사이 안리영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가 계속 답을 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잠들었
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안리영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급한 일이 생겨 불려 간 것 같았다.내 예상은 맞았다. 1385번째 천사의 엄마가 갑자기 대출혈을 해서 안리영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녀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손과 수술복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고 이번 응급 처치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산모는 고비를 넘겼다.“산모 가족 중 한 분, 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주세요.”안리영은 간호사에게 지시하며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산모가 갑작스럽게 대출혈을 일으킨 원인은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라는 걸 수술하는 과정에 이미 파악했었다.그녀가 화가 난 건 산모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모진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모의 남편은 좋은 거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10달을 공들였는데 고작 이런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면서 원망했고 마침 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2천만 원에 팔겠다고 했다.안리영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지만 매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아직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산모의 남편이 먼저 들이닥쳤고 안리영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 저 여자가 수술받은 비용 난 인정 못 해.”그 말에 안리영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한 번 더 말해봐요.”안리영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건지 남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 투덜댔다.“어쨌든 난 인정 못 해.”“인정 안 하기만 해 봐요.”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움찔했지만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인정 못 해. 애 낳고 피 좀 흘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병원에서 돈 벌려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지.”그 뻔뻔한 태도에 안리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남자의 코앞까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당신 와이프가 당신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고
구안석이 안리영을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한복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쏠렸고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안리영은 마치 아이처럼 구안석의 품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바로 뒤에서 나왔던 소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쳤다.안리영도 그녀를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구 교수님만 있으면 됐으니까.“안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안리영이 바라보니 낯이 익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아마도 자신이 분만을 도왔던 산모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리영은 거리낌 없이 구안석의 어깨에 기댄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남자친구예요!”“안 선생님, 두 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우리 애처럼 귀여운 아기도 얼른 낳길 바라요!”이보다 더 강력한 덕담이 있을까.안리영은 익살스럽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알겠어요!”이 짧은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둘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공항을 나섰다.“화났지?”구안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난번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화났어. 근데 이제 용서해 줄래.”다른 사람들 눈에 안리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당당한 의사였지만 구안석 앞에서는 그냥 사랑에 빠져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구안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우리 리영이 진짜 넓은 마음을 가졌네.”“나 그런 거 싫어.”안리영은 단호했다.넓은 마음과 착한 심성의 전제는 결국 자기희생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 이미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구안석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이고 싶었다.구안
“좋아, 나도 오늘 하루는 구 교수님의 것이야.”안리영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끝낼 리 없었던 그는 그녀의 입술을 붙잡고 진하게 키스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 멈춰 섰던 한 차량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사라진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구안석의 핸드폰은 무음 상태였다. 그는 온전히 안리영과 함께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석양 아래에서 자전거를 함께 탔다.마치 오늘 하루 구안석이 온전히 그녀만의 사람이 된 듯했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사실 그의 핸드폰은 무음이었지만 안리영의 핸드폰은 진동이 울렸다. 소희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안리영 씨, 구안석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전화하라고 하세요.]문자 속의 날카로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는데 아마 구안석에게 이미 여러 번 전화를 한 것 같았다.석양이 지는 잔디밭 위,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안리영은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전화해 봐.”구안석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백 개의 낮과 밤을 이겨내고 만나게 된 이 순간을 그녀가 그리워했듯이 그 역시 그녀를 그리워해왔다.“괜찮아, 별일 아니야. 게다가 지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 있겠어? 난 오늘 하루 온전히 너와 함께하기로 했잖아.”그의 대답에 안리영은 감동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고 그녀를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니까. “구 교수님 최고야.”그녀는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지는 석양 아래 두 사람의 뜨거운 입맞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슬쩍슬쩍 쳐다봤지만 전혀 상관없었고 부끄러울 것 하나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이 전화를 걸어왔고 그 벨소리에 두 사람의 입맞춤이 멈춰버렸다.“받아 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그녀는 구안석에게 핸드폰을 건넸다.그는 전화를 받아 들고 스피커폰을 켰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희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안리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구안석 교수처럼 올곧은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안리영은 얼굴이 붉어진 그를 보며 깔깔 웃었다.그녀는 구안석을 데리고 유희연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로 갔다. 진단서와 진료 기록을 검토한 후 구안석은 담담하게 말했다.“환자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수술은 권장하지 않아. 단순히 심장 문제뿐만 아니라 뇌경색도 함께 진행되고 있거든.”안리영도 의사 었기에 의사가 쉽게 희망을 끊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안석이 이렇게 단정 짓는다는 건 더 이상의 진단은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지원이랑 이야기해 볼게. 최후의 희망이라도 붙잡을지는 가족들이 결정할 문제야. 그래도 만약 그들이 수술을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구안석은 정말 바빴기에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안리영도 그걸 알고 있었다기에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지원이랑 상의해 볼게.”“알겠어, 만약 정말 필요하면 말해. 조수한테 일정 조율하라고 할게.”구안석은 결국 수락했만 안리영은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귀국한 이후 그녀와 함께 있어 주긴 했지만 얼마나 바쁜지 그녀도 느낄 수 있었기에 지도 교수님과의 마찰까지 감수하며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그의 희생이 달갑지만은 않았다.그녀도 의사라 바쁘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구안석이 왜 이렇게까지 바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구안석, 정말 그렇게 바빠?” 그녀가 무심코 물었다.구안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그의 죄책감 어린 표정을 보며 안리영은 미소 지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 이해해. 가자, 어차피 오늘은 네가 내 거잖아.”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키 차이 때문에 구안석은 자연스레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웃으며 유희연 부모님의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병동을 벗어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희연이 눈에 들
구안석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거나 다름없었다.이번엔 구안석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재능이 있지만 세상은 복잡하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안리영은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았다. 소희연의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단순히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구안석의 앞길이 막힌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가 봐.”안리영이 한발 물러섰다.소희연의 말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오로지 구안석을 위해서였다.구안석은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들어 안리영의 뺨을 어루만졌다.“일 끝나면 바로 올게, 오래 안 걸릴 거야.”“응!” 안리영이 가볍게 끄덕였다.구안석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속삭였다.“기다려.”안리영은 이마를 그의 가슴에 살짝 비볐다.“얼른 다녀와. 빨리 와야 해.”구안석이 떠나고 소희연도 가기 전 안리영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그와 나란히 걸어갔다.어두운 밤하늘 아래 안리영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 스스로 허락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싸늘한 기운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이제 돌아갈 마음도 없어져서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휴게실로 향했다.“안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당직을 서던 간호사가 그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안리영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어제 입원한 산모 상태 좀 보려고요. 상태가 어때요? 가족은 곁에 있나요?”그 말을 듣자 간호사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말도 마세요. 남편 쪽에서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어요. 오늘은 친정엄마가 오셨는데 계속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간호사는 그러면서 고개를 저었다.“요즘 이런 무책임한 일들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결혼이랑 출산 자체가 싫어질 지경이에요.”안리영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주임이라 단순히 업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이런 일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