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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이름을 새기는 곳

Author: 미셀127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0 18:21:13

13화. 이름을 새기는 곳

호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수심각 뒤편에 숨어 있었다. 낮에는 물과 수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물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로 물이 넘치지 않았다. 양옆에서는 검푸른 호수가 벽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기운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

문령은 첫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

백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월석은 수심각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

강무결이 하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

“사형, 지금 상태로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네가 대신 이름을 새길 건가?”

강무결이 입을 다물었다. 문령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웃었다. 하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웃었나?”

문령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요.”

“방금 웃었는데.”

“잘못 보신 거예요.”

“그런가.”

하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짧은 표정 때문에 문령은 괜히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발밑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양옆의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멀찍이 지나갔다. 머리 위로는 분명 호수가 있었는데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마치 물이 두 사람을 피해서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

문령은 몇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륜은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령은 괜히 앞을 보았다. 처음에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오히려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 변화가 문령에게는 아직 낯설었다.

“멈춰요.”

문령이 갑자기 말했다.

하륜은 즉시 멈췄다.

“왜.”

문령은 물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던 선이 점차 글자가 되고 있었다.

검의 주인은 베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하고,

진의 주인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

하륜이 글을 읽더니 낮게 말했다.

“별궁이 훈계도 하는군.”

“시험하는 거예요.”

“진법이 사람을?”

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진은 적을 막는 것보다 주인을 가리는 데 더 많은 힘을 쓴다고 배웠어요.”

“그 말도 어머니한테?”

문령은 잠시 멈칫했다.

“네.”

하륜은 더 묻지 않았다. 문령은 그가 자신의 부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부러 말을 줄인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위로할 줄 몰라서인지, 괜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몰랐다. 다만 억지로 파고들지 않는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계단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에는 옥빛 문양이, 오른쪽에는 금빛 문양이 새겨진 문이 서 있었다.

백유겸과 강무결은 그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두 분만 가셔야 합니다.”

“왜?”

“명월석은 이름을 새길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길 자체가 닫힙니다.”

문령은 두 문을 살폈다. 왼쪽은 자신의 길, 오른쪽은 하륜의 길인 듯했다. 그런데 두 문 위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따로 들어가면 과거를 보고,

함께 들어가면 진실을 본다.

문령은 숨을 멈췄다.

백유겸의 표정이 변했다.

“이 문구는 기록에 없었습니다.”

하륜이 곧바로 말했다.

“함께 들어가지.”

문령이 그를 돌아보았다.

“바로요?”

“혼자 들어가서 누가 멋대로 내 과거를 뒤지는 건 더 싫다.”

너무 하륜다운 대답이라 문령은 웃을 뻔했다. 하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정해.”

“제가요?”

“진을 읽는 건 너다.”

문령은 두 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따로 들어가면 과거.

함께 들어가면 진실.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혼자 들어가는 쪽이 더 두려웠다. 문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요.”

하륜이 금패를 꺼내자 문령은 자신의 옥패도 꺼냈다. 두 패를 문양에 대려던 순간, 물벽 위로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떠올랐다.

두 주인은 같은 순간 문을 열어야 한다.

문령은 글자를 읽고 잠깐 생각하더니 하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같이 하면 되겠네요.”

하륜의 손이 멈췄다.

“……뭘.”

“하나, 둘 하면 같이 대요.”

문령은 이미 그의 손에 들린 금패 위치를 맞추느라 진지했다. 하륜은 맞잡힌 손과 문령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지만, 그녀는 그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 둘.”

문령이 세자 두 사람이 동시에 패를 문양에 댔다. 옥빛과 금빛이 한꺼번에 번졌다. 문령은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손을 놓았다. 따로 서 있던 두 문이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천천히 하나로 겹쳐졌다. 하륜은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열린 문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기 직전, 문령은 무심코 하륜의 오른팔을 보았다.

검은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프면 말해요.”

하륜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하나?”

문령은 순간 대답이 막혔다.

“진이 흔들리면 곤란하니까요.”

하륜이 낮게 웃었다.

“이번에도 봉인 때문이군.”

“……그것도 이유예요.”

문령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대답을 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듯 하륜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문령은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흰 안개가 발끝부터 밀려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간에 조금씩 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젊은 여인 하나와 검을 든 사내.

문령의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젊은 윤설화가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단청우가 있었다. 하륜의 몸도 미세하게 굳었다. 환영 속 윤설화가 말했다.

“봉인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단청우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래도 내 아들을 이곳에 넣을 수는 없소.”

하륜의 시선이 흔들렸다. 문령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더는 보지 않았다. 대신 환영 속 부모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수월별궁으로 부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옥패와 금패를 남겼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이 죽을 운명을 미리 알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윤설화의 목소리가 안개 사이에서 낮게 울렸다.

“아이들에게 제물이라는 말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문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하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문이 열리면 둘 중 하나는 봉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흑련의 말이 다시 겹쳐졌다.

열쇠와 제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

문령은 비로소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다음 말이었다.

“그 아이들이 평생 죽을 준비만 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령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숨겼다.

속였다.

그런데 그 거짓말 안에 자신을 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모순이 너무 아팠다. 옆에서 하륜이 낮게 말했다.

“결국 결과는 같군.”

문령이 눈을 떴다.

하륜은 환영 속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사랑해서 숨겼든 두려워서 숨겼든,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문령은 그 안에서 분노보다 더 깊은 상처를 느꼈다. 문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안개 너머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거대한 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품은 것처럼 희게 빛나는 돌.

명월석이었다.

그리고 돌 위에 두 이름이 떠올랐다.

서문령.

단하륜.

아직 새겨지지 않은 채, 두 이름은 서로 가까운 자리에서 낮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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