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2화. 아직 주인이 아니다
수심각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그림자와 물보라로 뒤엉켜 있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수면 위에 남은 은빛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문령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낯설었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함을 내려다보았다. 물 아래에서 떠오른 함 안에는 빛이 바랜 비단 조각과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비단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흑련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
문령은 무심코 하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호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갔지만 오른팔에는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남긴 선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는 먹물이 피부 밑으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문령은 그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없어지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봤어요.”
“봤다.”
“……조금 봤어요.”
하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무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전투보다 더 무거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
“사형. 그 기운은 단가로 돌아가 치료해야 합니다.”
하륜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치료할 수 있나?”
강무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반 의술로는 어렵습니다. 수월별궁의 진기가 눌러주지 않으면 더 깊이 파고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향했다. 문령은 그 시선이 싫었다. 봉인을 읽는 것도 자신이었다. 진을 여는 것도 자신이었고, 이제 하륜의 몸에 남은 기운까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열쇠나 도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하륜이 먼저 말했다.
“필요 없다.”
백유겸이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단 공자.”
“문령에게 또 뭘 맡길 생각이면 그만둬.”
문령은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말과는 달랐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문령에게 책임을 넘기려는 순간, 하륜은 그 흐름부터 막아섰다.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그냥 두면 안 돼요.”
이번에는 문령이 먼저 말했다. 하륜의 시선이 돌아왔다.
“상관없다.”
“상관있어요.”
말이 나간 뒤에야 문령은 자신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리는 순간 말을 삼켰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하륜의 팔에 남은 검은 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심각에서 그 기운이 당신 검을 타고 들어왔어요. 그대로 두면 또 비슷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봉인 때문에?”
하륜이 낮게 물었다.
문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봉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은 기운에 잠긴 그의 눈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은 봉인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꺼내기에는 마음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그것도 이유예요.”
문령이 작게 대답했다.
하륜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문령은 품에서 진침을 꺼냈다.
“팔을 보여줘요.”
하륜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명령인가?”
“아니요. 봐야 하니까요.”
문령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륜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하륜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문령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은 선이 손등에서 팔목을 지나 어디까지 번졌는지 확인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조금 더 걷어 올리고, 팔 안쪽까지 살펴본 뒤에야 진침 하나를 꺼내 피부 가까이에 세웠다.
“원래 남의 팔을 이렇게 잡나?”
하륜이 낮게 물었다.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봐야 하잖아요.”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하륜이 잠시 말을 잃었다. 문령은 다시 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쓰는 사람답게 단단했고, 손등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또렷했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굳이 놓을 이유도 없었다. 진의 흐름을 읽으려면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서늘하고 씁쓸한 약초 향이 가까이서 스쳤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냄새였다. 이제는 그 향이 나면 누가 곁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하륜은 그런 문령을 잠깐 내려다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문령은 전혀 모른 채 검은 기운에 집중했다.
“이상해요.”
“뭐가.”
“이 기운은 단순히 몸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 검기 안에서 틈을 찾고 있어요.”
하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문령은 검은 선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미간을 좁혔다.
“화가 날 때만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깊이 읽자 묘한 점이 보였다.
“당신이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때 더 빨리 움직여요.”
강무결의 표정이 굳었다. 하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유겸이 무겁게 말했다.
“월식의 기운은 욕심 많은 사람만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도 파고듭니다.”
문령은 하륜을 보았다.
장터에서 약초를 빼앗긴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사람. 자신이 진의 방향을 말하면 한 번도 이유부터 묻지 않았던 사람. 옳다고 생각하면 먼저 움직이는 사람. 그의 장점과 약점이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당분간 검기를 크게 쓰지 마세요.”
“그건 어렵겠군.”
“왜요?”
하륜이 수심각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다시 올 테니까.”
문령도 흑련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그때 백유겸이 나무함 속의 옥가락지를 보며 입술을 굳혔다. 문령이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걸 아세요?”
백유겸은 한참 대답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 옥가락지는 수월별궁의 주인에게 전해지는 증표입니다.”
문령의 손이 멈췄다.
“주인의 증표는 옥패와 금패 아니었나요?”
“두 패는 문을 여는 열쇠일 뿐입니다.”
하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럼 우리는 뭐지?”
백유겸의 대답은 늦었다.
“아직은 주인이 아닙니다.”
수심각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문령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직…… 아니라고요?”
“수월별궁이 두 분의 이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계승자에 가깝습니다.”
하륜이 낮게 웃었다.
“들어오자마자 봉인은 풀리고, 독향에 당하고, 괴물까지 막았는데 아직 후보라.”
백유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령은 옥가락지를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여기까지 와 있었다.
“어디에 이름을 새겨요?”
백유겸이 천천히 호수 아래를 바라보았다.
“명월석입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수심각 아래 어딘가에서 낮은 울림이 전해졌다. 문령의 옥패와 하륜의 금패가 동시에 떨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수월별궁 두 주인 내용을 열심히 따라오고계실 구독자님!! 조금만 힘내세요!! 수월별궁의 비빌이 점점 밝혀지면서 재미있는 구간이 많아 질꺼에요!!!
14화. 우리가 정할게요명월석 위의 두 이름은 마치 누군가 마지막 획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서문령.단하륜.문령은 자신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생 수없이 써온 이름이었다. 부모가 불러주었고, 책의 첫 장에도 적었고, 진법을 익힌 종이 아래에도 남겼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이름을 새기면 수월별궁과 연결된다. 별궁이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리고, 자신이 무너지면 별궁도 무너진다. 명월석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이름을 새기면 주인이 된다.새기지 않으면 세 번째 봉인은 열린다.하륜이 낮게 웃었다.“선택권이 아주 친절하군.”문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선택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었다.“결국 또 해야 한다는 말이네요.”문령의 말에 하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아니다.”“뭐가요?”“안 해도 된다.”문령은 눈을 깜박였다.하륜은 명월석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있었다.“네가 싫으면 이름을 새기지 마.”“그러면 봉인이 열려요.”“그건 별궁의 문제지.”문령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강호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그래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네 책임이라고 밀어 넣는 건 다른 문제다.”문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월별궁보다 자신을 먼저 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도, 백유겸도, 별궁 자체도 늘 문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했다. 그런데 하륜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문령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고 무뚝뚝해서 남의 마음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사람의 선택을 먼저 보았다.“단 공자는요?”문령이 물었다.“뭐가.”“정말 하기 싫으면 안 할 거예요?”하륜은 잠시 명월석을 바라보았다.“아직 모르겠다.”솔직한 대답이었다.문령은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운명이니 책임
13화. 이름을 새기는 곳호수 아래로 이어진 계단은 수심각 뒤편에 숨어 있었다. 낮에는 물과 수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돌계단이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물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로 물이 넘치지 않았다. 양옆에서는 검푸른 호수가 벽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기운이 엷게 흐르고 있었다.문령은 첫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여기로 내려가는 거예요?”백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명월석은 수심각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강무결이 하륜의 팔을 한 번 바라보았다.“사형, 지금 상태로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안 괜찮으면 네가 대신 이름을 새길 건가?”강무결이 입을 다물었다. 문령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웃었다. 하륜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웃었나?”문령의 얼굴이 굳었다.“아니요.”“방금 웃었는데.”“잘못 보신 거예요.”“그런가.”하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짧은 표정 때문에 문령은 괜히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발밑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양옆의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멀찍이 지나갔다. 머리 위로는 분명 호수가 있었는데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마치 물이 두 사람을 피해서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문령은 몇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하륜은 두 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령은 괜히 앞을 보았다. 처음에는 뒤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은 오히려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 변화가 문령에게는 아직 낯설었다.“멈춰요.”문령이 갑자기 말했다.하륜은 즉시 멈췄다.“왜.”문령은 물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던 선이 점차 글자가 되고 있었다.검의 주인은 베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하고,진의 주인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하륜이 글을 읽더니 낮게 말했
12화. 아직 주인이 아니다수심각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그림자와 물보라로 뒤엉켜 있던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수면 위에 남은 은빛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문령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낯설었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함을 내려다보았다. 물 아래에서 떠오른 함 안에는 빛이 바랜 비단 조각과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비단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흑련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봉인한다.문령은 무심코 하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간 가까이에 서서 호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갔지만 오른팔에는 조금 전의 검은 기운이 남긴 선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는 먹물이 피부 밑으로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문령은 그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렇게 보면 없어지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문령이 고개를 들었다. 하륜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안 봤어요.”“봤다.”“……조금 봤어요.”하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무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전투보다 더 무거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사형. 그 기운은 단가로 돌아가 치료해야 합니다.”하륜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치료할 수 있나?”강무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백유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반 의술로는 어렵습니다. 수월별궁의 진기가 눌러주지 않으면 더 깊이 파고들 가능성이 있습니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령에게 향했다. 문령은 그 시선이 싫었다. 봉인을 읽는 것도 자신이었다. 진을 여는 것도 자신이었고, 이제 하륜의 몸에 남은 기운까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열쇠나 도구가
11화. 봉인보다 먼저중심 진침이 빠진 순간 수심각이 크게 흔들렸다.기둥 아래까지 올라온 물결이 난간을 세차게 때렸고, 차가운 물방울이 문령의 뺨과 머리카락 끝에 튀었다.물 아래의 문이 더 크게 벌어졌다.검은 기운이 틈 사이로 솟구쳤다.그러나 문령의 눈에는 그보다 하륜이 먼저 들어왔다.그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검은 선이 오른팔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눈동자 안의 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령은 그의 앞에 진침을 꽂았다.푸른빛이 퍼졌다.검은 기운과 부딪히며 낮은 울림이 났다.하륜의 검끝이 문령의 어깨 가까이에서 멈췄다.“비켜.”목소리는 하륜의 것이었지만, 평소와 달랐다.문령은 고개를 저었다.“안 비켜요.”“진이 무너진다.”“알아요.”문령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손도 떨렸고 숨도 짧았다.그래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하륜의 검끝보다 그의 눈을 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는 곳을 먼저 보던 사람.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도, 지금까지는 맞았다고 담담히 말하던 사람.문령은 그 기억들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다만 낮게 말했다.“돌아와요.”하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문령은 그 반응 하나에 숨을 붙잡았다.“단하륜.”검은 기운이 거칠게 일어났다.하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문령은 피하지 않았다.“저 여기 있어요.”그 말은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말을 한 뒤 문령은 잠시 멈췄다.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다만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한 쌍의 진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자신이 길을 보면 하륜이 그 길로 왔다.그렇다면 이번에도 자신이 길을 보여야 했다.문령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검날이 아니라 하륜 쪽으로.“이쪽이에요.”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낮게 흘렀다.하륜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왔다.검은 빛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금빛이 흔들렸다.문령의 가슴이 조여왔다.“아까 그랬잖아요.”문령은 숨을 골랐다.“제가 보는 곳으로 간다고.”하륜
10화. 네가 보는 곳으로검은 손이 수면을 뚫고 올라온 순간, 호수의 달빛이 산산이 흔들렸다.조금 전까지 잔잔하던 수심각 아래로 먹빛 파문이 번지더니, 물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기어올랐다. 얼굴도 눈도 없는 검은 몸이 물에 젖은 천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문령은 난간 가까이에 서서 숨을 낮췄다.하륜의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자의 몸을 갈랐다.검은 형체가 양쪽으로 찢어졌다.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바닥으로 흩어진 검은 물방울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이 되어 일어났다.문령의 얼굴이 굳었다.“베면 안 돼요.”하륜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았다.“그럼?”짧은 한마디였다.문령은 그림자를 보지 않고 그 아래를 보았다.수면 위에서 끊어지는 달빛, 기둥 아래로 모였다 흩어지는 물결, 검은 형체가 올라오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파문.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그러나 진은 언제나 흐름을 남겼다.문령의 시선이 동쪽 기둥 아래에서 멈췄다.“오른쪽으로 두 걸음.”하륜이 바로 움직였다.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팔 하나가 솟구쳤다.문령은 손에 쥔 진침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검을 세우지 말고 눕혀요. 달빛 밖으로 밀어내듯이.”하륜의 손목이 돌아갔다.세워져 있던 검날이 비스듬히 누웠다. 검은 그림자의 옆구리를 밀어내자, 형체가 수심각 기둥이 드리운 그늘로 미끄러졌다.그 순간 몸이 힘을 잃었다.검은 물처럼 바닥에 흩어지더니 그대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문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맞아요.”“다음.”하륜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문령은 다시 호수를 읽었다.“왼쪽 한 걸음.”하륜이 움직였다.“조금 뒤로.”이번에는 문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돌아갔다.두 번째 그림자가 밀려났다.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몇 번쯤 이어졌을 때, 문령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하륜이 너무 빨랐다.자신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
9화. 물 아래의 달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강무결은 단가의 명령서가 하륜의 손에서 찢어진 뒤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하륜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문령은 두 사람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앞선 하륜의 등을 바라보았다.며칠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단하륜은 화가 날수록 오히려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처음에는 자신에게만 무뚝뚝한 줄 알았다. 하지만 강무결에게도, 백유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함부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거칠어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문령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몇 걸음 앞서가던 하륜의 보폭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동쪽 회랑을 지나 수심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서자 그와 문령의 거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하륜의 한 걸음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같은 간격이었다.“저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거예요?”하륜이 고개만 조금 돌렸다.“아니다.”“아까는 더 빨리 걸었잖아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밤길이 미끄럽다.”문령은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오지 않았고 돌길은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수심각은 수월별궁의 가장 동쪽,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낮이라면 푸른 물결과 낡은 기둥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게 보였겠지만, 달이 뜬 뒤의 수심각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검푸른 호수 위로 은빛이 길게 부서졌고 처마 끝의 풍경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낮게 울었다.문령은 좁은 나무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심각 아래 물고기를 보고 싶어 호숫가까지 내려갔던 날, 평소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어머니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문령아. 저곳에는 가지 마라.왜냐고 묻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