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아침부터 공주의 심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공주는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예?"
"요즘 이상해."
상궁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왕을 두고 이상하다 말하는 사람이 궁 안에 몇이나 되겠는가.
공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약도 주고.""궁녀 하나를 못 빌려준다고 하고. 분명 이상해."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확인해 봐야겠어."
--- 연화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공주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연화.""예, 공주마마."
"너 힘 세지?"
연화는 빗자루를 든 채 잠시 고민했다. "...센 것 같사옵니다." 이제 부정해도 의미 없을 거 같았다.공주가 피식 웃었다.
"화분도 들고, 활도 쏘고.""..."
"웬만한 장정도 이겨먹겠던 걸?"
연화는 괜히 머쓱해졌다. "...송구하옵니다.""왜 맨날 송구해."
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팔씨름도 잘하겠네." 순간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팔씨름이옵니까?""응."
"..."
'갑자기?'
"소첩은 그런 것은..."
잠시 말을 고르던 연화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해 본 적이 없사옵니다." 속으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있긴 한데.' 공주는 그런 속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 처음 해 보면 되겠다." 연화는 괜히 불안해졌다. --- 정자에는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헌은 서책을 펼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공주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오라버니.""..."
"심심해요."
"그러냐."
"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공주가 활짝 웃었다. "팔씨름해요." 헌의 손이 서책 위에서 멈췄다. "...싫다.""왜요?"
"귀찮다."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못 하시는 거네요."
헌은 서책을 다시 넘겼다. "아니다.""그럼 하세요."
"..."
"싫다."
공주는 연화를 힐끗 돌아봤다. "연화.""...예."
"너는?"
연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소첩이 어찌 전하와 겨루겠사옵니까.""명이다."
"..."
'또 명이네.'
연화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공주는 더 신이 났다.
"오라버니. 설마.""..."
"연화한테 질까 봐 그러세요?"
무관의 눈썹이 꿈틀했다.연화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그럼?"
공주가 턱을 괴고 씩 웃었다. "힘도 안 쓰고 이길 자신 있으신 건가." 헌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못 하시는 거죠?" 정자 안이 조용해졌다.연화는 공연히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왜 일이 이렇게 커졌지.' 잠시 뒤.헌이 천천히 서책을 덮었다.
툭.
낮은 소리가 정자 안에 울렸다.
무관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 그가 연화 앞에 섰다.
연화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전하?" 헌은 담담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좋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한번 겨루어 보자꾸나.""...전하?"
연화가 놀라 올려다본 순간.헌의 커다란 손이 연화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내가 아직 네 대답을 듣지 못했다.”연화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이헌은 그녀를 안아 들고 강녕전을 향해 달렸다. 놀란 궁인들이 급히 길을 비켰다.“의관은 아직이냐!”“오고 있사옵니다!”“당장 데려오라!”내관이 전의를 향해 뛰어갔다.이헌은 침전 안으로 들어가 연화를 눕혔다. 상궁이 다친 팔을 확인하려 하자 그가 먼저 찢어진 소매를 걷어 올렸다.상처 주변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독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이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연화.”대답이 없었다.그가 연화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눈을 떠라.”연화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지만 다시 잠잠해졌다.“전하, 의관이 왔사옵니다.”이헌은 몸을 비키면서도 연화의 손은 놓지 않았다.의관은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상처부터 살폈다. 맥을 짚는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어떤 독이냐.”“정확히 살펴봐야 하옵니다.”“살펴보는 데 얼마나 걸리지?”“우선 상처에 남은 독을 빼내고 해독탕을 쓰겠습니다.”“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의관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이헌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입을 열어라.”“독의 종류를 알아내야 정확한 해독이 가능하옵니다. 푸른빛이 도는 것으로 보아 북방에서 자라는 초
“그러니 이제 모른 척하지 말거라.”이헌의 얼굴이 가까웠다.연화는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눈만 깜빡였다. 뺨을 감싼 손은 따뜻했고, 그가 시선을 내릴 때마다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대답은?”“무엇을 대답해야 합니까?”“내가 너를 여인으로 본다고 했지 않느냐.”“들었사옵니다.”“그게 전부냐?”연화는 머릿속을 다 뒤져 보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잠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무엇을 말이냐.”“소인을 궁녀가 아니라 여인으로 보신 것 말입니다.”이헌은 곰곰이 생각했다.“정확히는 모르겠다.”“전하께서도 모르시면서 소인에게만 모른 척하지 말라고 하십니까?”“나는 적어도 내 마음을 인정했으니까.”“소인은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옵니다.”이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얼마나.”“그것까지 지금 정해야 합니까?”“네게 맡겨 두면 평생 생각만 할 것 같구나.”“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믿기 어렵다.”연화는 조금 억울해졌다.“소인을 믿지 못하십니까?”“약과를 앞에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연화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강녕전에 두고 온 약과 열 개가 떠올랐다. 그사이 다른 궁녀들이 먹지 않았는지도 걱정되었다.이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역시 약과부터 생각하는구나.”“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그러니 강녕전으로 가자. 약과도 그곳에 있다.”연화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아직 남아 있습니까?”“상궁에게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라 일러 두었다.”“역시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고작 약과를 지켜 주었다고?”“소인에게는 중요한 일이옵니다.”이헌은 연화를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따뜻한 온기가 뺨에서 사라지자 연화는 저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아까까지는 너무 가까워 물러나고 싶었는데, 막상 거리가 벌어지니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연화도 그의 뒤를 따랐다.몇 걸음 가지 않아 이헌이 돌아봤다.“왜 뒤에서 걷느냐.”
“있다면 어마마마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대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연화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이헌의 손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만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들은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마음이 있다니.전하께서 자신에게?“그것이 무슨 뜻입니까?”대비가 되물었다.“들으신 그대로입니다.”“전하께서는 지금 궁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까?”연화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대비가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이헌은 부정하지 않았다.“아직 제 마음에 이름을 붙인 적은 없습니다.”이헌이 연화를 한번 내려다봤다.“다만 이 아이가 제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싫습니다.”연화는 숨을 삼켰다.이헌은 언제나 자신을 찾았다.밤차를 다른 궁녀가 올렸을 때도, 수라간으로 쫓겨났을 때도, 오늘 대비전으로 불려 갔을 때도 직접 찾아왔다.그 이유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임금은 원래 아랫사람을 세심하게 살피는 줄 알았다.그런데 다른 궁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그것이 마음입니다.”대비의 단호한 말에 이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렇다면
“아니면 후궁으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민서령의 물음이 떨어지자 연화의 눈이 커졌다.후궁이라니.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어였다.연화는 이헌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그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이헌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단호했다.“소녀는 전하의 후궁이 되기 위해 입궁하였습니다.”“아직 간택도 시작되지 않았다.”“그러니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민서령은 물러서지 않았다.“전하께서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 소녀가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연화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자신이 끼어들 대화가 아닌 듯했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 하자 이헌이 연화를 돌아봤다.“가만히 있거라.”“손을 놓아주시면 가만히 있겠습니다.”“놓으면 또 어디로 갈지 모르지 않느냐.”“소인이 가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옵니다.”연화가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아침까지 강녕전에 있었는데 상궁마마께서 갑자기 대비전으로 데려가셨습니다.”“그러니 데리러 왔다.”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연화는 더 말하지 못했다. 이헌은 민서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궁녀는 새로 보내 주겠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비전에 청하거라.”“전하.”“연화는 데려가겠다.”
“내가 언제 허락했지?”이헌의 싸늘한 물음에 상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대비마마께서 내리신 명이라 소인들도 어찌할 수 없었사옵니다.”“연화는 강녕전의 궁녀다.”“...”“그런데 주인인 내게 묻지도 않고 데려갔단 말이냐.”상궁의 얼굴이 난처하게 굳었다. 대비의 명도 어길 수 없고, 이헌의 명도 거역할 수 없었다.이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비전으로 향했다.그 시각, 연화는 새로 입궁한 규원의 처소 앞에 서 있었다.병조판서의 외동딸 민서령.연화는 그 이름을 이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명문가의 여식인 데다 미색과 학식이 출중해 오래전부터 국모감으로 거론되던 규수였다.연화는 제 옷매무새를 내려다봤다.궁녀복은 단정했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상궁에게 맡겨 둔 약과가 자꾸 생각났다.한 달이나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면 오늘 안에 가져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연화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들어오너라.”안으로 들어간 연화는 민서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인 연화라 하옵니다. 오늘부터 아기씨를 모시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민서령은 찻잔을 든 채 연화를 살폈다.연화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대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지만, 눈앞의 규원은 또 다른 의미로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나이는 연화보다 두어 살 많아 보였다. 연분홍 치마에 옅은 비취색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단아했다. 머리부터 손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네가 그 연화구나.”
“소인이 강녕전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연화는 상궁을 멍하니 바라봤다.“아예 떠나는 것은 아니다. 간택이 끝날 때까지만 새로 들어오는 규원의 시중을 들라는 명이시다.”“그게 얼마나 걸립니까?”“빠르면 보름, 길면 한 달이겠지.”한 달.연화는 품에 안은 약과 상자를 내려다봤다. 강녕전에 온 뒤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짐을 꾸려야 할 판이었다.“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잘못이 있어 보내는 것이 아니다.”“그럼 어째서 하필 소인입니까?”상궁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밤사이 퍼진 소문과 오늘 아침 내려온 명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대비마마의 명이다. 궁녀가 이유를 따져 무엇 하겠느냐.”연화는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습니다.”“약과는 두고 가거라.”연화가 상자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이것은 전하께서 소인에게 내리신 것이옵니다.”“그걸 안고 대비전에 갈 셈이냐?”“두고 가면 다른 아이들이 먹을 수도 있습니다.”상궁의 표정이 답답하게 굳었다.&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