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은 대신 업어치기를 했습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0 챕터

1화. 곶감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그 밥을 다 먹니?"연화는 대답 대신 마지막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우물우물.꿀꺽.빈 그릇이 됐다.옆에 앉아 있던 궁녀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넌 아까도 한 그릇 먹었잖아.""응.""배 안 불러?""아직."연화는 자연스럽게 맞은편 궁녀 상으로 손을 뻗었다."고기 남기지?""야!"궁녀가 황급히 젓가락으로 막았다."그건 내 거야!""안 먹잖아.""먹을 거거든!""방금 한숨 쉬었잖아.""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연화는 아쉬운 듯 손을 거뒀다.궁녀들이 혀를 찼다."기집애가 사내처럼 먹기는.""많이 먹어야 오래 살지.""그래서 넌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데?"연화는 잠시 생각했다."출궁해서 떡집 해야지.""또 떡집이래.""떡집 좋잖아.""네 머릿속엔 떡밖에 없냐?""곶감도 있어."궁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연화는 진지했다.궁에 들어온 지 삼 년.그동안 깨달은 건 두 가지였다.첫째.세상에 공짜는 없다.둘째.궁에는 공짜 밥이 있다.게다가 엄청 맛있다.연화는 이게 너무 좋았다.---"야."옆 궁녀 하나가 슬그머니 물었다."근데 너 진짜 관심 없어?""뭐.""승은."연화가 인상을 찌푸렸다."싫어.""왜?""귀찮아.""이년아."궁녀들이 동시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전하께 승은 드는 게 귀찮다고?""응.""너 미쳤어?"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좋아하는 것도 아닌데.""좋아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그럼?""전하잖아!"연화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했다.그러곤 진심으로 물었다."전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데?""...""..."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궁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화를 쳐다봤다."너 진짜 몰라?""응.""궁에 들어온 지 삼 년인데?""멀리서만 봤어.""세상에."연화는 억울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바빴다.밥 먹고.일하고.간식 먹고.또 일하고.곶감 나오면 줄 서고.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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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전하께서 찾으신다

망했다.연화는 무릎을 꿇으며 생각했다. 정말로 망했다."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일단 말했다.궁녀들은 원래 이럴 때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는 법이다.연화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말했다."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한 번 더 말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했다.죽을 죄를 지은 건가?연화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분명 쌀자루가 떨어질 뻔했다.그리고 전하는 그 아래에 있었다.그러니까.자신이 안 잡았으면.넘어지셨을 텐데....그럼 공 아닌가?잠시 고민하던 연화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아니다. 전하를 잡아당겼다. 그것도 너무 세게."이름이 무엇이냐."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자 연화의 어깨가 움찔했다."소첩은 연화라고 불리옵니다.""연화."왕이 짧게 이름을 되뇌었다.이름을 따라하는 모습에, 연화는 이유 없이 더 불안해졌다."어느 전각 소속이지.""수라간이옵니다.""수라간."또 따라 한다.연화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혼나는 게 편할 것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왕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침묵이 길어졌다.연화는 점점 초조해졌다.이럴 거면 차라리 곤장을 때려라. 사람을 왜 이렇게 긴장시키는 거지."고개를 들어 보아라.""..."연화는 얼어붙었다.고개를? 전하를? 정면으로?그건 아닌 것 같은데."들리지 않았느냐.""소첩이 어찌 감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전하!"뒤이어 우르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상궁이었다.창백한 얼굴로 달려온 상궁이 그대로 엎드렸다."전하! 괜찮으십니까!"뒤따라온 내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순식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연화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다행인 건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상궁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왕을 살폈다."다친 곳은 없으십니까?""없다.""망극하옵니다."상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곤 그제야 연화를 발견했다.정확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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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정말 모르고 그랬느냐

연화는 어쩔 수 없이 내관의 뒤를 따라 걸었지만, 걸을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정확히는 도망치고 싶었다.상궁께 혼난 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전하께서 찾으신다.'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설마 불려가서 칭찬받는 건 아닐 테고.'궁에서 내쫓기면 어떡하지?조심스레 앞서 걷는 내관을 바라봤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고 싶어 입을 열었다."저기…."내관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무슨 일이냐.""전하께서… 많이 노하셨습니까?"잠시 침묵이 흘렀다.내관은 작게 웃는 듯하더니 말했다."직접 들으면 알 것이다.""..."도움이 하나도 안 됐다.연화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왕이 머무는 전각 앞에 도착했다."들라 하신다."문이 서서히 열리고, 연화는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고개 숙여 인사 올리옵니다."조용했다.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왕.그리고 가까이 시중드는 내관 한 사람.그뿐이었다."연화."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예."이름을 기억할 줄이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요새 집무가 조금 한가하신 건가..?'"고개를 들어라."'또 저 소리다.'상궁은 절대 올려다보지 말라 했는데. 하지만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시선을 들었다.짙은 눈동자를 찬찬히 살피니, 분명 낮에 보았던 얼굴이었다.그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이렇게 보니….'정말 전하셨네.'새삼 실감이 났다.---왕은 잠시 연화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정말 몰랐느냐."연화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예.""짐이 누구인지.""정말 몰랐습니다.""거짓이 아니고?"연화는 고개를 저었다."멀리서 뵌 적은 있을지 모르나, 가까이 뵌 것은 처음이옵니다."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삼 년이옵니다.""삼 년 동안 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느냐."연화는 잠시 생각했다."일하느라 바빴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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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다시는 안 뵐 줄 알았습니다

## 4화. 다시는 안 뵐 줄 알았습니다"다음이 어딨냐고...."연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전하께서는 이름까지 기억하셨다.얼굴도 알아보라 하셨다.하지만 그뿐이었다.벌도 없었고.곤장도 없었다.'운이 좋았네.'연화는 금세 마음을 놓았다.애초에 왕과 궁녀는 마주칠 일이 없는 사이다.이번 일은 그저 우연이었다.앞으로는 다시 뵐 일도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다음 날."연화."상궁의 부름에 연화가 얼른 달려왔다."예, 상궁마마.""대비전으로 가거라.""소첩이 말씀이십니까?""그래.""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상궁은 담담하게 답했다."힘쓰는 일이다.""..."연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대비전 마당.궁녀 셋이 커다란 화분 하나를 붙들고 낑낑대고 있었다."조금만 더!""안 움직여!""이쪽으로!"화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연화가 조심스레 다가갔다."비켜주시면 소첩이 옮겨보겠사옵니다."궁녀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러났다.연화는 두 손으로 화분을 감싸 쥐었다.그리고.번쩍."...""...""..."혼자 들었다.궁녀 하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거... 거기 맞느냐?""예."연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분을 내려놓았다."여기 두면 되겠사옵니까?""...맞다."---"너."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연화가 뒤를 돌아보았다.고운 치마를 입은 어린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공주였다."방금 그걸 혼자 든 거냐?""예, 소첩이 옮겼사옵니다.""무겁지 않았어?""조금 무거웠사오나, 옮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조금?"공주는 피식 웃었다."재밌는 사람이네."연화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잠시 뒤.공주가 가지고 놀던 비단 공이 높은 나뭇가지에 걸렸다."아...."궁녀들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사다리를 가져오겠습니다.""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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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작은 행차

수라간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김이 피어올랐고, 궁녀들은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연화 역시 커다란 찬합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때.강녕전 상궁이 수라간 안으로 들어섰다.궁녀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수라간 상궁도 곧장 앞으로 나섰다."상궁마마."강녕전 상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전하께서 오늘 소규모 행차를 나가신다."수라간 상궁이 조용히 대답했다."준비는 이미 마쳤습니다.""기미를 맡을 수라간 나인 하나를 붙여야 한다. 기미상궁이 고뿔에 걸렸다 하여..."수라간 상궁이 사람들을 둘러보려는 순간.강녕전 상궁이 말을 이었다."이번 행차는 전하의 뜻에 따라 사람을 많이 데려가지 않는다.""...""최고상궁은 궁에 남고.""힘 좋은 아이 하나만 보내라 하셨다."수라간 상궁은 아무 말 없이 수라간 안을 둘러보았다.잠시 후."...연화."연화가 얼른 장독을 내려놓고 달려왔다."예, 상궁마마.""오늘 행차에 따른다.""...소첩이 말씀이십니까?""기미도 하고."잠시 뜸을 들인 상궁이 덧붙였다."짐도 들어야 한다.""..."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힘쓰는 일이었다.잠시 뒤. 궁궐 정문.평소보다 훨씬 작은 행렬이었다.호위무사 몇 명.내관.강녕전 궁녀들.그리고 수라간에서 나온 연화.연화는 커다란 찬합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강녕전 궁녀 하나가 힐끗 바라봤다."무겁지 않니?""조금 무겁사옵니다.""...""..."궁녀는 더 묻지 않았다.저 아이의 '조금'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행렬이 천천히 궁을 나섰다. 연화는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랐다. 왕의 모습은 감히 올려다보지 않았다.'이런 일도 다 있구나.'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행렬이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히이잉―!말 한 필이 갑자기 크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치켜들었다.순식간에 행렬이 흔들렸다."말이다!""비켜라!"호위무사들이 움직이려는 찰나. 말이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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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강녕전

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강녕전은 다시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내관들은 행차에 쓰인 물건을 정리했고, 궁녀들은 수라상을 물렸다.왕은 편전으로 들어가기 전, 호위무사를 불렀다.“방금 그 아이.”호위무사가 고개를 숙였다.“연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그렇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왕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말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소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옵니다.”“백성을 제압한 것도.”“…”“힘만으로 되는 몸놀림은 아니었습니다.”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나지막이 물었다.“무슨 내력이 있는 아이인지 알아보았느냐.”“변방 군영에서 복무하던 군관의 딸이라 하옵니다.”“…군관.”“예.”“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미를 따라 입궁하였다고 합니다.”왕은 더는 묻지 않았다.그저 짧게 말했다.“알겠다.”호위무사는 물러가려다 잠시 머뭇거렸다.“전하.”“말하라.”“강녕전 상궁께서 말씀하시길, 기미상궁의 고뿔이 깊어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 합니다.”“…”“행차에도 수라간 나인이 필요하니.”“대신할 아이를 붙여야 할 듯합니다.”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답했다.“그 아이로 하지.”“…연화를 말씀이십니까.”“그래.”“기미도 맡고.”잠시 말을 멈춘 왕이 덧붙였다.“행차에도 익숙해졌으니.”“강녕전을 돕게 하라.”“명을 받들겠습니다.”⸻같은 시각. 수라간.“연화.”상궁의 부름에 연화가 얼른 달려왔다.“예, 상궁마마.”“기미상궁의 병세가 생각보다 길어진다.”“…”“강녕전에서 사람이 왔다.”연화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상궁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당분간 네가 기미를 맡는다.”“…소첩이요?”“그래.”“기미상궁이 나을 때까지만.”연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잠깐이니까.그런데.“짐도 강녕전으로 옮겨라.”“…예?”“당분간 강녕전 소속으로 차출이다.”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강녕전에서…”“지내란 말씀이십니까?”“그래.”“싫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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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선물

강녕전은 수라간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궁녀들은 발소리조차 죽여 걸었고, 내관들 역시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연화는 작은 보퉁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오늘부터 강녕전을 돕게 된 연화입니다."강녕전 상궁이 연화를 천천히 훑어보았다."수라간에서는 힘이 좋기로 이름났다 들었다.""...""하지만 강녕전에서는 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연화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눈치다.""...예.""전하를 모시는 곳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명심하겠습니다."---첫 기미는 무사히 끝났다.국. 탕. 반찬.차례대로 독을 살핀 뒤 이상 없음을 알렸다.왕의 수라가 올라가고.연화는 한숨을 돌렸다.'다행이다.'---식사가 끝난 뒤.수라를 물리는 일이 남아 있었다.연화는 빈 그릇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문득 작은 접시 하나를 발견했다.기미를 위해 따로 덜어두는 그릇인 줄 알았다.'이것도 확인해야 하나...?'조심스레 젓가락을 들었다.그 순간."얘야."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연화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강녕전 상궁이었다."무엇을 하는 것이냐.""...기미를.""기미는 끝났다.""...""그 음식은 전하께 올렸던 수라다."순간.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송구하옵니다."상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수라간 버릇을 여기까지 가져오면 아니 된다.""...""강녕전에서는 모르는 것은 먼저 묻고.""아는 척하지 마라."연화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명심하겠습니다."---그날 이후.연화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평소 같으면 궁녀들과 웃으며 일했겠지만.오늘은 조용히 제 할 일만 했다.강녕전 궁녀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많이 혼났나 보다.""원래는 저렇게 풀이 죽는 아이가 아니라던데."---해가 기울 무렵.연화는 빈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머릿속에는 상궁의 말만 맴돌았다.'모르면 먼저 묻고.''아는 척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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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피하는 버릇

강녕전으로 옮겨온 지도 어느덧 한 달.연화는 어느새 강녕전 생활에도 익숙해져 있었다.상궁에게 크게 혼났던 날도 있었다.하지만 따뜻한 떡 두 점에 수정과 한 잔을 먹은 뒤로는.'다음엔 안 그러면 되지.'하고 금세 털어버렸다.먹을 것이 있으면 기분이 풀리고.혼나면 반성은 하되 오래 끌지는 않았다.연화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그 한 달 동안.헌 또한 이상하리만치 연화를 여러 번 마주쳤다.떨어지는 그릇을 받아내는 모습.미끄러지는 궁녀를 붙잡는 모습.무언가 벌어질 것 같으면.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모습까지.처음에는 우연이라 여겼다.두 번째도 그리 생각했다.하지만.세 번째.네 번째.우연이라 하기에는 반복이 잦았다.---"연화."상궁의 부름에 연화가 얼른 다가왔다."예, 상궁마마.""오늘 아침 차는 네 차례다.""예."연화는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뜨거운 김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문 앞에 선 내관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연화는 숨을 한번 고른 뒤. 조심스레 처소 안으로 발을 옮겼다.헌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책을 읽고 있던 그는 발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책장을 넘기려던 손이 멈칫했다."...차를 올리겠사옵니다."연화는 무릎을 꿇고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은은한 차향이 방 안을 채웠다.인사를 올린 뒤 물러나려던 순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잠시.""...예 전하."연화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왕은 찻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연화도 동시에 찻잔을 받쳐 들었다.그 순간이었다.왕의 손끝이 닿으려 하자.연화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뒤로 물러났다."..."정말 눈 깜빡할 사이였다.하지만 왕은 분명히 보았다.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이번에는 찻잔이 아니라.연화의 손등을 스쳤다.움찔.이번에도.연화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손이 저도 모르게 뒤로 빠졌다."...!"연화는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방 안의 공기까지 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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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활

강녕전의 아침이 다시 밝았다."얘, 연화야.""예, 상궁마마.""이것을 동쪽 행각으로 가져다 두거라.""예."연화는 두 손으로 커다란 나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안에는 찻잔과 다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걸음은 한결같이 가벼웠다.지나가던 궁녀 하나가 작게 감탄했다."저 아이는 저 무거운 걸 혼자 드네.""그러게."다른 궁녀도 고개를 끄덕였다."힘 하나는 정말 타고났어."연화는 그 말을 들은 듯 말 듯 머쓱하게 웃었다."...조금 무겁긴 합니다.""조금?"궁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저게 조금이면 우린 뭔데."연화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송구합니다.""사과는 왜 하니."궁녀들이 다시 웃었다.연화도 따라 작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같은 시각.누각에서는 헌이 아침 보고를 받고 있었다."전하. 지난달 호조에서 올린 장부는 모두 정리가 끝났사옵니다."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관의 보고가 이어지는 사이.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두 손 가득 짐을 든 채 마당을 가로지르는 궁녀.걸음은 가볍고 표정은 태평했다."...""전하?"내관이 조심스레 불렀다.헌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계속하라."그때."오라버니!"밝은 목소리가 누각을 울렸다.공주였다."또 보고만 받고 계세요?"헌은 피식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그러는 너는.""놀러 왔지요."공주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그러다 문득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그 궁녀잖아요."공주는 금세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야!"연화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공주마마.""이리 와."연화는 상자를 내려놓고 서둘러 달려왔다."부르셨사옵니까."공주는 연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너.""...예.""힘이 세지?""...조금.""조금?"공주가 키득 웃었다."그 큰 화분도 혼자 들었잖아."연화는 괜히 머쓱한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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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첫 외출

활터에는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은 화살이 아직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우와."공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금세 활짝 웃은 공주가 연화를 향해 손뼉을 쳤다."맞혔다!""정말 맞혔어!"연화는 괜히 민망해져 활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운이 좋았사옵니다.""또 그런다."공주가 피식 웃었다."잘하고도 꼭 운이라고 하더라."연화는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 정도면 넘어가겠지.'하지만 내금위 군관들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헌에게 다가갔다."전하."헌은 과녁을 바라본 채 짧게 물었다."어떠한가.""활을 처음 잡은 솜씨가 아니옵니다.""...""몸의 중심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시위를 당기는 법도 익숙하였습니다.""우연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사옵니다."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연화를 바라보았다.조금 전 과녁을 바라보던 눈빛과,이제는 머쓱한 얼굴로 공주 앞에 서 있는 모습이도무지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잠시 후 헌이 몸을 돌렸다."오늘은 이만 들자."공주는 금세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벌써요?""정사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흥."공주는 아쉬운 얼굴로 활을 내려놓았다.연화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다....'---저녁 무렵.수라간은 내일 새벽 올릴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연화도 상을 나르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그러다 급히 몸을 돌던 순간이었다.툭.옷고름이 문고리에 걸리며 풀어지고 말았다."연화라고 했지."상궁의 목소리에 연화가 얼른 멈춰 섰다."...예.""강녕전 궁녀가 복색을 그리 흐트러뜨리고 다녀서야 되겠느냐."연화는 얼른 옷고름을 여몄다."...송구하옵니다."풀이 죽은 얼굴이었다.상궁은 그런 연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이리 와 보거라."연화가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상궁이 약과 하나를 내밀었다.가장자리가 조금 깨진 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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