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하?"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커다란 손이 연화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이었다.
연화는 얼떨결에 헌과 마주 앉았다.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됐다. 진짜 한다.' 정자 한쪽에 서 있던 무관은 괜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 "좋아!" 공주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시작!""...공주마마."
연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해야 하옵니까.""응."
"...소첩은."
잠시 머뭇거리던 연화가 작게 덧붙였다. "...힘 조절을 잘 못하옵니다." 공주가 웃었다. "오라버니도 약하지 않아요." 연화는 난처한 얼굴로 헌을 바라봤다. '그래도 전하신데.' 차마 힘을 쓸 수는 없었다. --- "시작!" 공주의 외침이 떨어졌다.그런데 이상했다.
둘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주가 눈을 깜빡였다.
"...왜 안 하세요?" 연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를 상대로 힘을 쓰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헌도 담담히 말했다. "...짐 또한. 궁녀와 겨루려는 것이 아니다." 공주는 결국 이마를 짚었다. "답답해."공주는 두 사람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럼 둘 다 살살.""..."
"살살입니다."
연화는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살살이 어디까지지.'"다시, 시작."
이번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둘 다 서로를 의식한 채 힘을 거의 쓰지 않았다.
공주가 혀를 찼다.
"이러다 해 지겠네." 그러더니 불쑥 연화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앗." 균형이 살짝 흐트러진 연화는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꽈악.
헌의 손이 아주 조금 밀리면서, 정자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관이 작게 눈을 크게 떴다.
연화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송구하옵니다!" 황급히 손을 빼려는 순간.헌이 이번에는 조용히 힘을 주었다.
툭.
밀렸던 손이 다시 가운데로 돌아왔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연화는 그제야 헌의 손을 제대로 느꼈다.
생각보다 거칠었다.
활을 잡고 검을 쥔 사람의 손이었다.
'...의외네.' 헌 역시 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힘이 세군.''그런데도 끝까지 봐주고 있었다.'
"그만!"
공주가 벌떡 일어났다. "재미없어요! 둘 다 서로 봐주잖아요." 연화가 얼른 손을 거두며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공주가 연화를 가리켰다. "너.""...예."
"분명 봐줬지?"
연화가 뜨끔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
"맞네."
"...전하를 어찌 이기겠사옵니까."
공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 다 답답해." 투덜거리며 먼저 정자를 내려갔다.무관도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정자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연화도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연화." 낮은 목소리에 연화가 걸음을 멈췄다. "...예, 전하." 헌은 잠시 연화를 바라보았다.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
"...봐주지 말거라." 연화는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예?" 그러나 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히 몸을 돌려 정자를 내려갔다.
연화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손끝에 미묘한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들켰네." 작게 중얼거린 연화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멀어지던 헌도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리고 있었다.
“내가 아직 네 대답을 듣지 못했다.”연화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이헌은 그녀를 안아 들고 강녕전을 향해 달렸다. 놀란 궁인들이 급히 길을 비켰다.“의관은 아직이냐!”“오고 있사옵니다!”“당장 데려오라!”내관이 전의를 향해 뛰어갔다.이헌은 침전 안으로 들어가 연화를 눕혔다. 상궁이 다친 팔을 확인하려 하자 그가 먼저 찢어진 소매를 걷어 올렸다.상처 주변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독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이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연화.”대답이 없었다.그가 연화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눈을 떠라.”연화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지만 다시 잠잠해졌다.“전하, 의관이 왔사옵니다.”이헌은 몸을 비키면서도 연화의 손은 놓지 않았다.의관은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상처부터 살폈다. 맥을 짚는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어떤 독이냐.”“정확히 살펴봐야 하옵니다.”“살펴보는 데 얼마나 걸리지?”“우선 상처에 남은 독을 빼내고 해독탕을 쓰겠습니다.”“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의관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이헌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입을 열어라.”“독의 종류를 알아내야 정확한 해독이 가능하옵니다. 푸른빛이 도는 것으로 보아 북방에서 자라는 초
“그러니 이제 모른 척하지 말거라.”이헌의 얼굴이 가까웠다.연화는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눈만 깜빡였다. 뺨을 감싼 손은 따뜻했고, 그가 시선을 내릴 때마다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대답은?”“무엇을 대답해야 합니까?”“내가 너를 여인으로 본다고 했지 않느냐.”“들었사옵니다.”“그게 전부냐?”연화는 머릿속을 다 뒤져 보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잠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무엇을 말이냐.”“소인을 궁녀가 아니라 여인으로 보신 것 말입니다.”이헌은 곰곰이 생각했다.“정확히는 모르겠다.”“전하께서도 모르시면서 소인에게만 모른 척하지 말라고 하십니까?”“나는 적어도 내 마음을 인정했으니까.”“소인은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옵니다.”이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얼마나.”“그것까지 지금 정해야 합니까?”“네게 맡겨 두면 평생 생각만 할 것 같구나.”“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믿기 어렵다.”연화는 조금 억울해졌다.“소인을 믿지 못하십니까?”“약과를 앞에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연화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강녕전에 두고 온 약과 열 개가 떠올랐다. 그사이 다른 궁녀들이 먹지 않았는지도 걱정되었다.이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역시 약과부터 생각하는구나.”“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셨지 않습니까.”“그러니 강녕전으로 가자. 약과도 그곳에 있다.”연화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아직 남아 있습니까?”“상궁에게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라 일러 두었다.”“역시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고작 약과를 지켜 주었다고?”“소인에게는 중요한 일이옵니다.”이헌은 연화를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따뜻한 온기가 뺨에서 사라지자 연화는 저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아까까지는 너무 가까워 물러나고 싶었는데, 막상 거리가 벌어지니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연화도 그의 뒤를 따랐다.몇 걸음 가지 않아 이헌이 돌아봤다.“왜 뒤에서 걷느냐.”
“있다면 어마마마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대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연화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이헌의 손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만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들은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마음이 있다니.전하께서 자신에게?“그것이 무슨 뜻입니까?”대비가 되물었다.“들으신 그대로입니다.”“전하께서는 지금 궁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까?”연화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대비가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이헌은 부정하지 않았다.“아직 제 마음에 이름을 붙인 적은 없습니다.”이헌이 연화를 한번 내려다봤다.“다만 이 아이가 제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싫습니다.”연화는 숨을 삼켰다.이헌은 언제나 자신을 찾았다.밤차를 다른 궁녀가 올렸을 때도, 수라간으로 쫓겨났을 때도, 오늘 대비전으로 불려 갔을 때도 직접 찾아왔다.그 이유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임금은 원래 아랫사람을 세심하게 살피는 줄 알았다.그런데 다른 궁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그것이 마음입니다.”대비의 단호한 말에 이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렇다면
“아니면 후궁으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민서령의 물음이 떨어지자 연화의 눈이 커졌다.후궁이라니.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어였다.연화는 이헌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그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이헌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단호했다.“소녀는 전하의 후궁이 되기 위해 입궁하였습니다.”“아직 간택도 시작되지 않았다.”“그러니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민서령은 물러서지 않았다.“전하께서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 소녀가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연화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자신이 끼어들 대화가 아닌 듯했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 하자 이헌이 연화를 돌아봤다.“가만히 있거라.”“손을 놓아주시면 가만히 있겠습니다.”“놓으면 또 어디로 갈지 모르지 않느냐.”“소인이 가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옵니다.”연화가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아침까지 강녕전에 있었는데 상궁마마께서 갑자기 대비전으로 데려가셨습니다.”“그러니 데리러 왔다.”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연화는 더 말하지 못했다. 이헌은 민서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궁녀는 새로 보내 주겠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비전에 청하거라.”“전하.”“연화는 데려가겠다.”
“내가 언제 허락했지?”이헌의 싸늘한 물음에 상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대비마마께서 내리신 명이라 소인들도 어찌할 수 없었사옵니다.”“연화는 강녕전의 궁녀다.”“...”“그런데 주인인 내게 묻지도 않고 데려갔단 말이냐.”상궁의 얼굴이 난처하게 굳었다. 대비의 명도 어길 수 없고, 이헌의 명도 거역할 수 없었다.이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비전으로 향했다.그 시각, 연화는 새로 입궁한 규원의 처소 앞에 서 있었다.병조판서의 외동딸 민서령.연화는 그 이름을 이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명문가의 여식인 데다 미색과 학식이 출중해 오래전부터 국모감으로 거론되던 규수였다.연화는 제 옷매무새를 내려다봤다.궁녀복은 단정했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상궁에게 맡겨 둔 약과가 자꾸 생각났다.한 달이나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면 오늘 안에 가져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연화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들어오너라.”안으로 들어간 연화는 민서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인 연화라 하옵니다. 오늘부터 아기씨를 모시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민서령은 찻잔을 든 채 연화를 살폈다.연화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대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지만, 눈앞의 규원은 또 다른 의미로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나이는 연화보다 두어 살 많아 보였다. 연분홍 치마에 옅은 비취색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단아했다. 머리부터 손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네가 그 연화구나.”
“소인이 강녕전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연화는 상궁을 멍하니 바라봤다.“아예 떠나는 것은 아니다. 간택이 끝날 때까지만 새로 들어오는 규원의 시중을 들라는 명이시다.”“그게 얼마나 걸립니까?”“빠르면 보름, 길면 한 달이겠지.”한 달.연화는 품에 안은 약과 상자를 내려다봤다. 강녕전에 온 뒤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짐을 꾸려야 할 판이었다.“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잘못이 있어 보내는 것이 아니다.”“그럼 어째서 하필 소인입니까?”상궁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밤사이 퍼진 소문과 오늘 아침 내려온 명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대비마마의 명이다. 궁녀가 이유를 따져 무엇 하겠느냐.”연화는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습니다.”“약과는 두고 가거라.”연화가 상자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이것은 전하께서 소인에게 내리신 것이옵니다.”“그걸 안고 대비전에 갈 셈이냐?”“두고 가면 다른 아이들이 먹을 수도 있습니다.”상궁의 표정이 답답하게 굳었다.&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