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 제7화 : 여왕의 세탁법
--- 바람이 비수처럼 온몸을 난도질했다. 영하 15도의 가평 설산은 거대한 얼음 무덤 같았다. 환기구 이음새에 찢긴 어깨와 등 가죽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눈밭 위로 떨어지자마자 서늘하게 굳어 가며 검붉은 얼음 결정으로 변했다. 손톱이 뒤집힌 열 손가락은 이미 감각이 마비되어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저기다! 저기 핏자국이 있어! 멀리 못 갔을 테니까 샅샅이 뒤져!" 절벽 위쪽에서 강태식 팀장의 칼칼한 고함 소리가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귀를 찔렀다. 수십 개의 플래시 불빛이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설아의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최형구의 거친 숨소리와 뽀드득거리는 군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 그 벼랑 끝에 선 설아의 망막 위로 푸른색 AI 시스템 창이 격렬한 경고음을 울리며 점멸했다. `[위험: 저체온증 3단계 진입 하강 중 (현재 체온 33.8°C)]` `[생존 가능 시간: 11분 42초]` `[알림: 수신된 마이크로 칩의 생체 데이터 활성화, 스위스 UBS 본사 보안 네트워크 자동 응급 호출 프로토콜 발동]`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야 해.' 설아는 주머니 속, 신혜숙 여사의 허벅지 살을 찢어 꺼낸 핏자국 묻은 마이크로 칩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날카로운 티타늄 모서리가 마비된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 고통만이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아 주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어이, 저기 있네! 은설아, 이 미친년이 감히 어딜 도망가?!" 눈 덮인 수풀을 헤치며 강태식과 최형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번뜩이는 가죽 구속 벨트와 고용량 향정신성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강태식이 비열하게 이를 드러내며 설아를 향해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앙-! 하늘을 찢는 듯한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눈보라를 뚫고 강렬한 백색의 서치라이트가 강태식과 최형구의 눈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아악! 내 눈! 뭐야, 이거?!"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린 채 뒤로 자빠졌다. 눈밭을 거칠게 가르며 나타난 것은, 미 육군의 장갑차를 연상케 하는 매트한 블랙 컬러의 초대형 방탄 SUV 세 대였다. 번호판조차 없는 괴물 같은 차들이 눈길을 드리프트하며 사설 구급대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문이 열리며 완벽한 핏의 검은색 방탄 수트를 입은 거구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귀에 꽂힌 인이어와 가슴팍에 새겨진 황금빛 엠블럼. 스위스 UBS 은행의 VVIP 자산 및 신변을 전 세계 어디서든 보호하는 최고 등급의 프라이빗 경호팀(Executive Security Division)이었다.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강태식과 최형구의 복부를 군화발로 짓밟고 까부라뜨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설 구급대원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밭에 처박혔다. 경호팀의 수장이 설아의 앞으로 걸어와 모자를 벗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최고급 캐시미어 담요가 들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Madam Eva Eun(에바 은 여사님). 신혜숙 주주님의 최종 자산 승계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저희는 당신의 영혼까지 보호합니다." 설아는 담요를 건네받으며 눈밭에 처박힌 강태식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려 달달 떨고 있는 그의 눈동자 위로, 설아의 AI 시스템이 차후 실행할 '마포 구급대 공중분해 시나리오'의 연산 결과를 띄웠다. "저 벌레들은…… 일단 살려둬. 나중에 내 손으로 직접 단두대에 올릴 테니." 설아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차량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전 시댁이 쌓아 올린 추악한 세상의 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서울 성북구의 한 프라이빗 성형외과 및 세포 재생 클린룸. 스위스 자본이 통째로 대관한 그곳의 공기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특수 재생 세럼의 기묘한 향취로 가득 차 있었다. 설아는 전신이 투명한 의료용 젤로 뒤덮인 채 캡슐 안에 누워 있었다. "은설아 씨, 아니 에바 은 여사님. 전신 피부 재생술과 안면 골격 미세 조정 수술이 시작됩니다. 마취하시겠습니까?" 스위스에서 초빙된 세계 최고 권위의 재건 성형 전문의가 물었다. 설아는 완벽하게 굳어 있는 얼굴로 차갑게 답했다. "아니요. 마취는 필요 없습니다. 생살을 깎아내고 뒤집는 그 고통을…… 단 1밀리미터도 잊지 않고 뼈에 새길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레이저가 화상으로 문드러진 발등과 뺨의 살가죽을 태워버리고, 뒤집힌 손톱 밑의 세포를 강제로 자극해 재생시키는 극단의 통증이 밀려왔다. 온몸의 신경이 불타버릴 것 같은 작열감 속에서도 설아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그녀의 뇌 속 AI 인지 시스템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가동되고 있었다. `[자산 연산 시스템 가동: 페이퍼 컴퍼니 '에바 홀딩스'의 자금 2조 4,000억 원 유동성 확보]` `[실시간 시장 조사: 한성 바이오 만기 채권 3,000억 원 발행 임박]` `[타깃 동향 추적: 강민우, 최유라 사치품 구매 및 마카오 사채 이자 연체율 87% 돌파]` '강민우, 홍명숙. 네놈들이 내 지분을 뺏으려고 희희낙락하는 동안, 네놈들의 한성 가문은 밑바닥부터 썩어가고 있었구나.' 설아는 머릿속으로 한성그룹의 재무제표를 완전히 리딩했다. 강민우의 마카오 도박 빚과 한성 바이오의 무리한 임상 시험 실패로 인해, 그들은 지금 당장 현금 3,000억 원을 구하지 못하면 부도 처리되어 길바닥에 나앉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그 3,000억 원의 만기 채권을 전액 매입할 유일한 구원투수의 시나리오를, 설아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단숨에 직조해 냈다. 구원이 아닌, 목줄을 옥죄어 올 교수형의 밧줄이었다. --- 3개월 후. 성수동의 최고급 초호화 펜트하우스, 거 거대한 전면 거울 앞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어깨 위로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칠흑 같은 단발머리, 백옥처럼 투명하고 결점 하나 없는 피부, 그리고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이목구비.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시댁의 구박을 받으며 눈물 흘리던 나약한 은설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전 세계 금융가를 뒤흔들 거물 자산가이자 잔혹한 복수의 여왕, '에바 은'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황금빛의 데이터가 최종 완료 신호를 보냈다. `[한성그룹 만기 채권 3,000억 원 사모펀드 '에바 홀딩스' 이름으로 전액 매입 완료]` `[담보 조건 설정 조건: 한성그룹 핵심 지분 35% 및 평창동 대저택 법적 담보권 설정 성공]` `[계약 체결 완료: 강민우, 홍명숙 인감 날인 확인]` 서류 가방을 든 스위스 대리인이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여사님, 예상대로 홍명숙 여사와 강민우 이사는 에바 홀딩스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 채, 3,000억 원을 송금받자마자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있을 강민우와 최유라의 결혼식 준비에 수십억을 쏟아붓고 있더군요." 설아는 책상 위에 놓인 강민우와 최유라의 초호화 결혼식 청첩장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녀의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 끝이 최유라의 이름 위를 강하게 짓눌렀다. "결혼식이라……." 설아의 입술이 기괴할 정도로 아름답게 비틀려 올라갔다. 눈동자 속의 푸른 빛이 광기 어리게 번뜩였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심장을 찌르는 것만큼 짜릿한 도파민은 없지. 내일 그 화려한 안방을 빼앗은 가짜 안주인의 면사포를…… 내 손으로 직접 짓밟아 줄 테니." 설아는 순백의 실크 바지 수트를 천천히 걸쳐 입었다. 전 시댁 가문의 목줄을 쥐고 흔들 피의 단두대, 그 첫 번째 절정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제75화 : 피의 전조와 묶여버린 제국여의도 에바 홀딩스 특별 통제실의 대형 유리창 너머로 한강 상류에서부터 몰려든 시커먼 먹구름이 도시의 마천루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대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빌딩 숲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눅눅한 안개와 오싹한 한기는 통제실의 대리석 바닥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실내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초고층 전용 가습기에서 피어오르는 습한 장미 향은 여전히 사방에 머물러 있었지만, 수백 대의 메인 서버가 쉴 새 없이 토해내는 뜨겁고 알싸한 오존 냄새와 차갑게 식어버린 위스키의 알코올 잔향이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밀도를 형성하고 있었다.은설아는 버건디색 실크 로브 자락을 소파 위로 우아하게 늘어뜨린 채, 거실 중앙의 가죽 상석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느슨하게 풀어진 실크 자락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목덜미와 가녀린 어깨선, 그리고 매끄러운 다리 라인은 흐릿한 전산 화면의 푸른빛을 받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지배자의 위엄과 치명적인 에로티시즘을 동시에 내뿜고 있었다. 설아의 망막 위로 스위스 결제 연합을 짓밟고 회수한 25조 원의 최종 정산 리포트가 푸른빛 데이터 스트림이 되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설아는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으로 제 입술 끝을 지긋이 쓸어내리며 차분하게 읊조렸다.대한민국 정재계와 월가, 그리고 유럽의 늙은 포식자들까지 모조리 내 제국 아래 사지가 찢겼어.눈가에는 여전히 슬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듯한 가련한 피해자의 가면을 완벽하게 띄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이면에서 폭주하듯 회전하는 퀀텀 코어 연산 회로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최악의 포식자 그 자체였다.설아 씨.침대 아래, 차가운 한기가 서린 설아의 구두발 밑에는 대성 인베스트먼트 대표 백현재가 무릎을 꿇
제74화 : 침묵의 가시와 핏빛 신단평창동 골짜기 산자락에 깔린 안개는 붉은 노을빛을 받아 검붉은 피처럼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었다.한때 대한민국 최상층부의 가부장적 폭력과 오만함이 눌러붙어 있던 전 시댁 가문의 대저택 터. 1회차 인생 당시 은설아가 홍명숙 여사와 강민우의 구둣발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평 요양병원 독방으로 끌려가기 직전까지 학대당했던 그 참혹한 장소는, 이제 형체도 없이 부서져 은빛 신단의 거대한 기초 구조물로 뒤바뀌고 있었다. 지하 50미터 암반층을 향해 파고드는 대형 굴착 기계들의 묵직한 진동음이 대지를 흔들었고, 깨진 콘크리트 먼지와 그을린 흙냄새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공기 중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그 웅장하고 음산한 공사 현장 단상 위, 순백의 샤넬 모피 코트 자락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은설아가 서 있었다.그녀의 하얀 가죽 구두발 밑에는 1회차의 비참했던 며느리가 흘렸던 피눈물이 여전히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은 세상을 지배하는 25조 원의 절대적인 포식자, 에바 은이었다. 눈가에는 슬픈 눈물이 고여 있는 듯 가련하고 순결한 피해자의 가면을 완벽하게 띄우고 있었지만, 백옥 같은 피부 아래 흐르는 기류는 세상의 모든 인과율을 사냥하려는 지독한 지배자의 위엄이었다.설아 씨, 바람이 매우 차갑습니다. 바닥의 흙먼지가 당신의 옷자락을 더럽힐까 두렵습니다.대성 인베스트먼트 대표 백현재가 진흙탕 바닥 위로 자신의 가죽 코트를 망설임 없이 벗어 던져 설아의 구두 앞길에 길게 깔아놓았다.검은 와이셔츠 단추가 풀어진 채, 그의 억센 가슴팍에는 새벽 안방에서 설아의 손톱에 찍혔던 서늘한 핏자국이 선명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백현재는 젖은 진흙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린 채, 설아의 구두에 묻은 먼지를 제 와이셔츠 소매로 정성스럽게 닦아내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와 맹목
제73화 : 잿더미 위의 성전과 아날로그 그림자사직동 최고급 펜트하우스 60층 안방의 전면 통유리창 너머로 내려앉은 새벽 안개는 먹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밤새 광화문 빌딩 숲을 적시던 장대비는 잦아들었으나, 유리 벽면을 타고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수증기와 눅눅한 한기는 실내 대리석 바닥을 오싹하게 염색하고 있었다.초고층 전용 가습기에서 피어오르는 습한 장미 향은 여전히 거실 공기를 감싸고 있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싱글 몰트 위스키의 알코올 잔향과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턱 막히게 만드는 매혹적이고도 기괴한 밀도를 형성하고 있었다.은설아는 버건디색 실크 가운 자락을 침대 위로 완만하게 퍼뜨린 채, 킹사이즈 침대 헤드에 우아하게 기대어 누워 있었다.느슨하게 풀어진 가운 깃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목덜미와 가녀린 어깨선, 그리고 매끄러운 다리 라인은 푸른빛 새벽광을 받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군주로서의 위엄과 치명적인 에로티시즘을 동시에 내뿜고 있었다. 설아의 망막 위로 스위스 결제 연합과 월가로부터 강탈한 25조 원의 최종 정산 리포트가 푸른빛 데이터 스트림이 되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설아는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으로 제 입술 끝을 지긋이 쓸어내리며 차분하게 읊조렸다.대한민국 정재계와 월가, 그리고 스위스의 늙은 포식자들까지 모조리 내 발밑에서 사지가 찢겼어.눈가에는 여전히 슬픈 눈물이 고여 있는 듯한 가련한 피해자의 가면을 완벽하게 띄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이면에서 폭주하듯 회전하는 연산 회로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최악의 포식자 그 자체였다.설아 씨.침대 아래, 차운 대리석 바닥 위에는 대성 인베스트먼트 대표 백현재가 무릎을 꿇은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검은 와이셔츠 단추가 풀어진 채 그의 억센 가슴팍은 공포와 맹목적인 정욕으로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고, 핏빛
제72화 : 맹목의 늪과 붉은 전야여의도 에바 홀딩스 특별 통제실을 가득 채웠던 환호성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대리석 바닥의 서늘한 한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십 개의 모니터 스크린 위로 스위스 결제 연합의 5조 원이 청산되어 들어오는 황금빛 숫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했지만, 그 숫자들이 내뿜는 광채조차 실내를 지배하는 묘한 긴장감을 완벽하게 걷어내지는 못했다.창밖의 서울 도심은 어느새 장대비가 완전히 그치고 눅눅한 잿빛 안개에 잠겨 있었다. 고층 빌딩숲 사이로 흘러드는 흐릿한 새벽녘의 잔광이 통제실의 두꺼운 방탄 유리창을 타고 완만하게 굴절되어, 은설아가 서 있는 단상 아래로 길고 검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지는 습한 장미 향은 여전히 공기 중에 남아 있었지만, 서버 컴퓨터들이 쉴 새 없이 뱉어내는 뜨겁고 알싸한 오존 냄새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은설아는 소파 가죽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순백의 실크 원피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흘러내려 있었고,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는 흐릿한 푸른빛을 받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군주로서의 위엄을 자아내고 있었다. 25조 원이라는 전무후무한 자본의 성채를 그러쥐며 대한민국과 월가, 그리고 유럽의 포식자들까지 차례로 도살해 낸 여왕. 눈가에는 여전히 슬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한 가련한 피해자의 가면을 완벽하게 띄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 정밀하게 연산되는 회로는 이미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지독한 악귀의 본형이었다.설아 씨. 에바.단상 아래, 차가운 한기가 감도는 설아의 구두발 밑에는 대성 인베스트먼트 대표 백현재가 무릎을 꿇은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와이셔츠 단추는 몇 개 풀어헤쳐진 채 그의 가슴팍은 거친 숨결로 요동치고 있었고, 핏빛 넥타이는 진흙과 핏자국이 얼룩진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
제71화 : 사방의 거미줄과 잿빛의 공조스위스 취리히 호수가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석조 고성 스타일의 비밀 회의실 내부는 한겨울 만년설에서 불어오는 강바람보다 더 서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수백 년 동안 유럽 최고위 귀족 가문들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세계 금융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 온 거물들이 원목 테이블 주위에 어두운 안색으로 모여 앉아 있었다. 넓은 실내 공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시가 연기와 차갑게 식어버린 위스키의 알코올 잔향, 그리고 웅웅거리는 전산 서버가 뱉어내는 둔탁한 오존 냄새로 끈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스위스 민간 은행 결제 연합의 의장이자 유럽 사모펀드 카르텔의 대부 헤르만 폰 베르크는 금테 돋보기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며 전면 모니터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스크린 위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단 몇 달 만에 2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본을 쓸어 담으며 월스트리트의 뱅가드 카르텔까지 처참하게 도살해 버린 여인, 에바 은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뉴욕의 데이비드 멜러가 단 2분 만에 역방향 숏스퀴즈에 걸려 청산당했다."헤르만 폰 베르크의 쉰 목소리가 성벽의 차가운 석조 벽면을 타고 무겁게 퉁겨져 나왔다."이것은 단순한 금융 천재의 움직임이 아니다. 국제 외환망의 원장 자체를 실시간으로 왜곡시키는 괴물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방금 전 뱅가드 카르텔이 파멸하면서 그들이 관리하던 유럽 귀족 가문들의 우회 지분과 오프라인 비밀 자산 일부가 저 에바 홀딩스라는 거대한 성채 속으로 통째로 빨려 들어간 것이 확인됐다. 저 여자를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 유럽 민간 은행 연합의 질서까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될 것이다."그의 곁에 서 있던 스위스 금융감독청 고위 감사관이 수기로 작성된 극비 문서를 내밀며 나지막하게 보고했다."의장님, 에바 홀딩스의 자금 인출을 차단하기 위
제70화 : 월가의 사냥개들과 20조 원의 성채월스트리트를 지배하는 거대 글로벌 헤지펀드 뱅가드 카르텔의 아시아 아웃소싱 본부 회의실. 사방을 엄숙하게 감싼 방탄 통유리창 너머로 마천루가 뿜어내는 차가운 네온사인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실내를 지배하는 것은 수백 대의 메인 서버가 뿜어내는 서늘한 냉각팬 소리와, 묵직하게 가라앉은 코히바 시가 연기, 그리고 차갑게 식어버린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한 향이었다.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뱅가드 카르텔의 아시아 총괄 부사장 데이비드 멜러는 금테 돋보기를 매만지며 모니터 화면을 냉혹하게 노려보았다. 스크린 위에는 대한민국 금융 시장의 실시간 지분 변동 그래프와 함께, 정체불명의 거대 자본인 에바 홀딩스의 자금 흐름도가 시뻘건 먹선으로 매핑되어 있었다.차승재 비서실장에 이어 성진그룹의 명태섭, 그리고 그림자 국가 기금 5조 원까지 단 수개월 만에 통째로 삼켜졌다.데이비드 멜러의 메마른 목소리가 회의실의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그들이 은닉해 두었던 차명 비자금 전체가 에바 은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 계좌로 귀속된 것이 확인됐다. 전산망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한민국 최상층부의 목을 차례로 친 악귀다. 이 여자를 이대로 방치하면 아시아 금융 시장 전체의 주도권이 저 여자 손에 넘어간다.그의 곁에 서 있던 전직 금융감독원 출신의 수석 브로커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이 여자는 단순한 재벌가 상속녀가 아닙니다. 시장의 인과율 자체를 왜곡시키는 기이한 자본 폭주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쳐놓은 법적 방화벽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데이비드 멜러가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비밀 결재 패드에 친필 서명을 날렸다. 그는 평생을 아시아 전역의 부실 기업과 국가 기간산업을 공매도 덫으로 찢어발겨 자본을 약탈해 온 월가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에게 은설아가 구축한 13조 원의 자본은 거대한 먹잇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