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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다시 별장으로

Autor: 지호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05 09:03:58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윤서는 마지막으로 메일함을 확인한 뒤 노트북을 닫았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정작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낮에 만난 최미연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혼하지 마라. 아이를 가져라. 그러면 한빛정책연구소 자료를 묻어주겠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 하나만으로 밤새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최미연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녹음을 확인한 뒤 파일을 따로 저장했고, 휴대폰은 그대로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상무님, 손님 오셨는데요.”

“누구요?”

직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태호였다.

윤서의 표정이 굳었다.

“여긴 왜 왔어요?”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어요.”

“나는 있어.”

태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술에 취하지도 않았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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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5. 비상구의 농밀한 공포

    스티븐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할 말을 끝낸 사람처럼 그는 도혁의 귓가에서 얼굴을 뗐다. 코트 깃을 한 번 바로잡고, 화장대 위에 흩어진 브러시 하나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오늘은 인사만 드리러 왔습니다. 다음엔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죠.”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복도 끝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냐고 묻는 소리, 투자사 쪽이라고 대답하는 낮은 목소리. 그리고 발소리가 멀어졌다.매니저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을 때, 도혁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형. 형!”“괜찮아.”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도혁은 매니저의 손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봤다. 분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회색이었다.“다음 신까지 얼마나 남았어.”“한 시간 반. 형 지금…….”“한 시간만 줘. 감독님한텐 속이 안 좋다고 해.”매니저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도혁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도 목적지를 말할 수 없었다.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촬영장 뒷문으로 나가 택시를 불렀다. 뒷좌석에 앉아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믿기지 않았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검은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낮에는 만나지 않는다. 그녀의 회사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그들이 정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들을 하나씩 지나치며, 택시는 한성유통 본사 지하주차장 입구에 섰다.---윤서는 상무실에서 결재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최미연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서 떨어지지 않은 며칠이었다. 지분 명의부터 넘기렴. 그 한 줄을 그녀는 변호사에게 녹음째 넘겼고,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혁에게도.그 사람은 막 돌아온 촬영장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시어머니의 새벽 티타임까지 얹어 줄 수는 없었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저장하지 않은 번호. 낮 시간에는 절대 오지 않던 번호였다.[지하주차장. 비상구. 오 분만.]윤서는 그 다섯 글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규칙을 만든 사람이 규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4. 미국에서 온 명함의 정체

    오후 네 시. 장소는 배도혁 씨가 정하세요. 혼자 오시고요.그 문자를 받은 다음 날, 도혁은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네 시가 되기 십 분 전, 그는 촬영장 대기 차량 안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그 번호가 떠 있었다. 답장 창은 비어 있었다. 손가락을 몇 번이나 화면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네 시가 지났다. 네 시 반이 지났다. 그는 끝내 한 글자도 보내지 않았다.다섯 시 정각, 메시지가 왔다.[기다렸습니다. 다음엔 제가 가죠.]도혁은 그 문장을 지웠다.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그날 밤 윤서에게 한 줄을 보냈다. 오늘은 못 가요.차단 버튼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며칠이 지났다.그사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촬영장에 나왔다.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맞추고, 컷 소리가 나면 웃었다. 감독은 요즘 도혁이 물이 올랐다고 했다. 스태프들은 복귀 후 첫 주보다 표정이 편해졌다고 했다.아무도 몰랐다.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그가 문 쪽을 한 번씩 돌아본다는 걸.촬영장 주차장에 들어설 때마다 낯선 검은 세단이 없는지 확인했다. 밴 창문 틈으로 방문객 명단을 훑었다. 차단한 번호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그날도 분장은 오후 두 시에 시작됐다.헤어 담당이 마지막 앞머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매니저가 나가기 전에 거울 너머로 그를 봤다.“형, 요즘 잠은 자?”“자.”“거짓말. 눈 밑 봐.”매니저는 혀를 차며 커피를 사러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도혁은 그 문을 조금 열어 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분장실에 혼자 남은 도혁은 대본을 펼쳤다. 다음 장면은 주인공이 오래 숨겨 온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그는 그 대사를 세 번 소리 내어 읽었다.문이 열렸다.노크는 없었다.“배우 좋죠.”낮은 목소리였다. 미국식 억양이 아주 조금 섞인 한국어.도혁은 대본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목소리가 먼저 몸에 닿았다.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것이 내려갔다.거울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3. 태호의 미행 보고서

    윤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스피커 너머에서 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자는 듯, 느긋한 목소리였다.“됐다, 태호야. 오늘은 그만하면 됐어.”윤서가 손을 뻗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들었죠. 통화 끝났으면 나가요.”목소리는 낮았다. 떨리지 않았다. 태호는 그게 더 견딜 수 없었다. 한 시간 전까지 다른 남자를 안고 있던 여자가, 남편 앞에서 저렇게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게.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두 번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그는 복도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어머니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태호는 대답 없이 통화를 끊었다.---신혼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침 일곱 시였다.윤서가 나간 뒤로 이 집은 절반만 살아 있었다. 그녀가 쓰던 화장대는 비어 있었고, 드레스룸 한쪽은 옷걸이만 걸려 있었다. 거실 벽에는 웨딩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떼어 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흥신소에서 새 메일이 와 있었다. 발송 시각은 오전 여섯 시 십이 분. 밤새 골목을 지킨 직원이 오늘 새벽 기록까지 붙여 보낸 모양이었다.[2차 보고서 첨부합니다. 지난번 사진 외에 출입 시간대를 정리했습니다.]첨부 파일을 열었다.앞장에는 이미 본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장 뒤편 주차장, 회색 승용차에서 내리는 남자. 비 오는 새벽, 비상구를 밀고 나오는 뒷모습. 큰길에서 택시에 오르는 모자 쓴 남자.그다음 장부터가 새로웠다.표였다. 날짜와 시각이 칸칸이 정리돼 있었다.[입장 23:12 / 퇴장 04:06] [입장 22:47 / 퇴장 04:01] [입장 23:30 / 퇴장 03:58]한 줄, 또 한 줄. 표는 두 장을 넘어갔다. 맨 아래에는 흥신소 직원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대상 남성, 비상계단 이용. 체류 시간 평균 약 다섯 시간. 퇴장 시각은 거의 일정함.]거의 일정함.태호는 그 다섯 글자를 오래 봤다.표를 한 줄씩 손가락으로 내려가며 날짜를 셌다. 그가 법원 복도에서 그녀의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2. 시어머니의 티타임

    윤서는 인터폰에 대답하지 않았다.화면 속 태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 번 더 버튼을 누르고, 그래도 답이 없자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안 열면 여기서 소리 지를 거야. 관리인 깨우고, 경찰도 부르고.”그가 골목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경찰한테 방금 누가 이 건물에서 나갔는지 말해 줄까. 지금쯤 택시 탔겠지.”윤서의 손끝이 인터폰 버튼 위에서 굳었다.로비에서 소란이 나면 관리인이 내려올 것이다. 태호가 도혁의 이름을 외치기라도 하면, 누가 듣고 어디까지 퍼뜨릴지 알 수 없었다. 경찰까지 부르겠다는 말을 허풍으로 넘길 수도 없었다.윤서는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건물 현관 잠금을 풀었다.잠금이 풀리는 짧은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은 없었다. 그녀는 도혁에게 연락할까 잠깐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지금 그가 이 건물로 돌아오는 것보다 나쁜 일은 없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그녀는 거울을 봤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었다. 가운 깃을 목까지 여몄다.샤워를 할 시간은 없었다.머리를 묶는 손목 안쪽에서 그 냄새가 났다. 아침까지만 남겨 두자던 그 냄새였다. 윤서는 녹음 중인 휴대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만이었다. 태호가 한 발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1. 삼킨 숨소리

    현관문이 닫히고, 비상구 철문이 멀리서 한 번 울렸다.그게 끝이었다. 집 안에는 다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새벽 네 시였다. 그가 먼저 나간다. 그들이 정한 규칙이었다. 지키기 쉬운 규칙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오래 귀에 남았다.윤서는 이불을 끌어당긴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 시트에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을 그 자리에 얹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천천히 식어 갔다.몇 시간 전의 숨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히 가진 밤이었다.도혁은 무릎을 세워 침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조심스럽게 벌려진 윤서의 허벅지 안쪽에 닿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델 것처럼 뜨거웠다. 그가 팔꿈치로 상체를 받친 채 천천히 몸을 겹쳐왔을 때, 맞닿은 아랫배와 가슴팍 사이로 서로의 맥박이 날것 그대로 쿵쿵 울렸다."선배님."젖은 숨이 입술 틈새로 흘러내렸다. 도혁은 윤서의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터질 듯 달아오른 입술을 느리게 빨아들였다. 혀끝이 얽히며 질척한 마찰음이 귓가를 채웠다. 서두르지 않는, 그러나 한 치의 틈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고 묵직한 탐닉이었다.윤서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침대 시트를 그러쥐자, 도혁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깍지를 꼈다. 손바닥에 엉겨 붙는 축축한 땀과 체온. 그의 허리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앉으며 여린 살결 틈새를 묵직하게 밀고 들어왔다."하, 읏……."끝까지 맞물려 들어오는 압박감에 윤서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도혁은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붙든 채, 아주 느리게 안쪽을 채워 나갔다. 살갗과 살갗이 마찰할 때마다 눅진한 열기가 허리 아래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번졌다. 거칠지 않았다. 부서질까 겁내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지만, 물러섬 없이 끝까지 짓눌러 오는

  • 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   100. 도련님의 자리

    다음 날 밤 열한 시, 현관 초인종이 짧게 한 번 울렸다.이틀 동안 울리지 않던 소리였다. 이 시간에 그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었다.윤서는 문을 열기 전에 잠깐 숨을 골랐다. 이틀 동안 오지 않던 사람이었다. 문을 열자 도혁이 서 있었다. 모자를 벗어 손에 쥔 채였다. 얼굴이 이틀 사이 한결 수척해 보였다.“늦었죠.”“아니요.”윤서는 비켜섰다. 도혁이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다.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은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이유는 나중에, 라던 한 줄. 그다음 날에는 오지 못한다는 짧은 연락만 왔다. 윤서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그걸 본 도혁이 먼저 말했다.“말 못 하는 일이 생겼어요.”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선배님한테 그러라고 했던 거, 이번엔 제가 할게요. 말 못 한다고만 할게요. 아직은요.”윤서는 그의 얼굴을 봤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별장 천장의 스피커 아래서도, 편집된 영상이 온 나라에 퍼진 날에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혼자 들고 오래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었다.말 못 한다고만 해 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럼 기다리겠다고. 그 말을 이제 그녀가 돌려줄 차례였다.“알겠어요. 기다릴게요.”도혁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식탁에 마주 앉았다. 찻잔 두 개가 이번에는 둘 다 채워져 있었다.윤서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그에게 돌려 보였다. 묻지 않기로 했다면, 숨기지도 않아야 했다.[나 이제 다 알아. 이번엔 내가 조건을 걸 차례야.]도혁이 화면을 내려다봤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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