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한성유통 외동딸 윤서는 돈과 권력을 맞바꾼 정략결혼으로 정치 명문가의 아들 남태호와 결혼한다. 하지만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고, 결국 무정자증까지 밝혀진다. 윤서가 물려받을 막대한 재산을 탐내는 시어머니는 남씨 핏줄의 손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태호 아이가 아니어도 돼. 남씨 피만 섞이면 되니까.” 그녀가 고른 남자는 남편의 이복형제 배도혁. 시어머니는 두 사람을 한집에 가둔 채 명령한다. “임신하면 내보내 줄게.” 그렇게 남편의 형제와 아이를 가져야만 끝나는 끔찍한 동거가 시작된다.
더 보기최미연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태호를 집으로 불러 마주 앉혔다.거실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 전 식사 자리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흘렀다."다음 주로 병원 예약 잡았어. 이번엔 무조건 가.""싫다고 했잖아요.""태호야."최미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윤서는 받을 검사 다 받았어. 병원에서도 너도 받아보라고 했다잖아.""그게 왜 제가 받아야 할 이유가 돼요?""그럼 언제까지 윤서만 병원에 보내?"태호의 표정이 굳었다."엄마가 보냈잖아요.""그래. 내가 보냈어. 애가 안 생기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아보려고.""그럼 걔한테 문제가 없으면 그냥 기다리면 되잖아요.""언제까지?"태호가 입을 다물었다. 최미연은 한동안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조바심이 뒤섞여 있었다."너 계속 이러면 나도 더는 가만히 못 있어.""뭘 어떻게 하게요.""병원에서 하라는 검사 하나도 안 받으면서 애는 갖겠다고? 그럼 내가 널 어떻게 믿니.""엄마.""검사받고 아무 문제 없으면 끝이야."최미연이 잘라 말했다."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윤서한테 더 검사받으라는 소리 안 해도 되고."태호가 헛웃음을 쳤다."결국 윤서 때문에 이러는 거네요.""걔 때문이 아니라 네 자식 문제야."태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왜 자꾸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해요?""누가 문제 있대?""지금 그러고 있잖아요.""그러니까 가서 확인하라고. 멀쩡하면 그걸로 끝나는 일을 왜 이렇게까지 버티니?"태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을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그런 검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윤서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이제 자신이 확인받아야 할 차례가 됐다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무엇보다 어머니와 윤서가 자신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은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난 멀쩡해요.""그럼 보여줘.""뭘 보여줘요?""검사받고
최미연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점심 약속이 있다는 말에 나갔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진성갤러리 근처 호텔 라운지였다. 윤서가 자리에 앉자 최미연은 차부터 권했다."요즘 회사 많이 바쁘니?""네. 뉴욕 건도 정리해야 하고요.""그래도 몸은 챙겨야지."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것 같았다. 윤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무슨 말씀 하시려고요?"최미연이 잠시 윤서를 바라봤다."병원 한번 더 가자."역시나였다."지난번에 검사받았잖아요.""그건 기본적인 것만 본 거고. 이번에는 제대로 확인해보자고.""특별한 문제 없다고 했어요.""그때는 그때고."최미연은 이미 알아본 게 있는 듯 병원 이름까지 꺼냈다."난임 쪽으로 잘 보는 선생님이 있대. 예약 잡기 어려운데 내가 부탁해놨어."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묻기도 전에 알아보고, 부탁하고, 이제는 통보하고 있었다."어머니. 왜 자꾸 저만 검사받아야 해요?"최미연의 손이 멈췄다."무슨 말이니?""아이 가지려고 검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저만 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윤서는 그대로 물었다."태호 씨는요? 태호 씨도 같이 검사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최미연이 황당하다는 듯 윤서를 바라봤다."멀쩡한 애가 무슨 검사를 받아.""저도 멀쩡해요.""여자는 겉으로 멀쩡해도 모르는 거야.""남자는 안 그래요?""윤서야."목소리가 낮아졌다."괜히 말 이상하게 만들지 마. 내가 너한테 문제가 있다고 했니?""그럼 확인은 왜 저만 하는데요?"최미연이 입을 다물었다. 윤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저도 검사받을 수 있어요. 필요한 검사라면 받을게요. 대신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으면 태호 씨도 검사받게 해주세요.""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너부터 제대로 확인하고."또 그 말이었다. 윤서는 더 실랑이하지 않았다."알겠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 너희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윤서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채명수는 다음 달 유통사업부 투자 계획서를 훑어본 뒤 몇 군데를 지적했다."이건 다시 잡아. 수익률이 너무 보수적이야.""시장 상황 반영한 거예요.""그러니까 더 공격적으로 가야지. 요즘 경쟁사들 확장 속도 봤잖아."윤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명수는 회사 일에서만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미루고, 숫자와 계획부터 확인했다.일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어젯밤 식사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윤서가 서류를 정리하다 먼저 물었다."아버지. 어제 어머니가 무슨 말씀 안 하셨어요?"채명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무슨 말.""그냥요. 저희 일 관련해서요.""부부끼리 싸웠으면 둘이 풀어. 부모들까지 끼어들 일 만들지 말고."역시 그게 전부였다. 윤서는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이런 식으로 선을 그었다. 딸의 결혼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는데 책상 한쪽에 놓인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한빛정책연구소 후원의 밤]걸음이 멈췄다. 처음 보는 이름이 아니었다. 결혼 당시 지참금 사용처를 확인하면서 봤던 곳이었다. 얼마 전 최미연이 가져온 한약의 거래명세표에도 같은 이름이 찍혀 있었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장의 서류에, 같은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왜 안 가?"채명수의 목소리에 윤서가 시선을 거뒀다."아니에요. 서류 가지고 갈게요."밖으로 나오자 비서가 서류를 받으러 다가왔다. 윤서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아버지 다음 주 일정에 한빛정책연구소 행사가 있던데요.""네. 후원의 밤 말씀하시는 거죠?""매년 참석하세요?""네. 제가 입사했을 때도 이미 후원하고 계셨어요.""그게 언젠데요?""5년은 넘었죠."결혼 전이었다. 그것도 한참 전. 시댁과 얽히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 이름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아버지가 거길 왜 후원하시는지 아세요?""정확한 건 모르죠.
최미연에게 연락이 온 건 오후였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 윤서는 결재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무슨 일인데요?"네 부모님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태호한테도 얘기해뒀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갑자기요?"가족끼리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니? 최미연은 장소와 시간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저녁 약속은 시내 한정식집이었다. 윤서가 도착했을 때는 채명수 부부와 최미연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호도 잠시 뒤 들어왔다."우리 며느리 왔네."최미연이 반갑게 윤서를 맞았다. 며칠 전 집에서 봤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앉아. 회사 끝나고 오느라 힘들었지?"윤서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최미연은 분위기를 주도했다."결혼식 끝나고 진작에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죠?"윤서의 어머니가 난처하게 웃었다."부부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죠."최미연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사돈 내외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눈치였다."그럼요. 태호도 요즘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윤서의 시선이 태호에게 향했다. 태호는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정작 윤서에게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다 지난 일이니 이제 좋은 것만 생각해야죠."최미연이 웃으며 태호의 잔을 채웠다. 채명수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사돈어른 말씀이 맞아요. 우리 윤서가 워낙 똑 부러지는 애라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우리 윤서.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최미연은 사람들 앞에서 윤서의 손까지 잡았다."내가 딸이 없어서 그런가, 윤서가 들어오고 집안이 얼마나 환해졌는지 몰라요."윤서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웃지도 않았다.식사가 끝나갈 무렵, 최미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서야. 잠깐 나 좀 보자."윤서도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최미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다음 주 화요일 비워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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