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비서

계약비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By:  해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goodnovel16goodnovel
10
1 rating. 1 review
13Chapters
88views
Read
Add to library

Share:  

Report
Overview
Catalog
SCAN CODE TO READ ON APP

3년의 계약이 끝나는 날, 문예진은 미련 없이 사직서를 내밀었다. 서태준의 가장 유능한 비서이자 누구보다 가까운 여자였지만, 그가 끝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랑했다고 해서 머물 이유는 없었다. 예진은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여자를 잃은 태준은 비로소 깨닫는다. 그녀가 정리한 것은 계약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 그는 회장의 권력도 계약서도 없이, 한 여자의 마음을 처음부터 얻어야 한다. 그러나 예진은 더 이상 그의 비서가 아니다. 다시 사랑하려면, 먼저 그녀가 떠날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그가 겨우 준비한 꽃다발도, 늦은 고백도 예진의 발걸음을 돌려세우지 못한다. 태준은 이제 사랑은 명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View More

Chapter 1

1화

서태준은 품 안에서 문예진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새벽빛이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예진은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허리에 감긴 팔을 천천히 풀어 내고 있었지만, 태준은 그녀가 침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예진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익숙한 체온과 은은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태준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일어나려고? 아직 시간이 이른 것 같은데.”

“여섯 시 조금 넘었습니다. 회장님은 더 주무셔도 되지만 저는 먼저 준비해야 해요.”

태준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예진이 고개를 돌리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선이 드러났고, 그는 그곳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예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삼 년 동안 수없이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회사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여자였지만, 둘만 남으면 작은 접촉에도 눈빛이 달라지곤 했다.

태준은 그런 모습을 아는 남자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단정하고 빈틈없는 회장 전속 비서였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는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였다.

그는 예진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졌다.

“오늘 저녁에도 와. 같이 저녁 먹고, 늦으면 여기서 자고 가.”

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예진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렵겠습니다. 미리 잡아 둔 약속이 있어서요.”

태준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예진이 자신의 저녁 제안을 거절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도 시간을 조정해 찾아왔고, 함께 식사하지 못하더라도 잠깐 얼굴을 보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망설임조차 없이 어렵다고 했다.

“무슨 약속인데? 급한 일이 아니면 다른 날로 옮겨.”

평소라면 예진은 난처한 얼굴로 웃다가 결국 그의 뜻을 따라 주었을 것이다. 태준은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예진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 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약속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 식사는 준비해 둘 테니 조금 더 쉬세요.”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태준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베개에 등을 기댔다. 예진에게 거절당한 사실도 낯설었지만, 자신을 달래거나 미안해하지 않은 채 돌아서는 태도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동안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조금 전 그녀의 허리가 닿았던 자리를 쓸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

태준이 문예진을 처음 여자로 의식한 것은 그녀가 비서실에 들어온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그는 해외 인수합병을 마무리하느라 사흘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회장실로 돌아왔지만, 처리해야 할 서류는 여전히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던 태준은 결국 심한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시 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퇴근하지 않은 예진이 마지막 계약서의 수정 사항을 정리한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태준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살피더니 별다른 질문 없이 조명을 낮추고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약은 드셨습니까?”

태준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눈을 감자 예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그의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얹어 주었다.

서늘한 감촉에 눈을 뜬 태준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이 조금 풀려 있었고, 피곤한 얼굴에는 화장기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녀의 눈매와 입술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

태준은 자신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치게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문 비서, 남자친구 있어?”

예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Expand
Next Chapter
Download

Latest chapter

More Chapters

To Readers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reviews

김소희
김소희
잘 읽었습니다. 계속 볼수 ㅇㅅ
2026-10-21 10:52:17
0
1
13 Chapters
1화
서태준은 품 안에서 문예진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새벽빛이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예진은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허리에 감긴 팔을 천천히 풀어 내고 있었지만, 태준은 그녀가 침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예진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익숙한 체온과 은은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태준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벌써 일어나려고? 아직 시간이 이른 것 같은데.”“여섯 시 조금 넘었습니다. 회장님은 더 주무셔도 되지만 저는 먼저 준비해야 해요.”태준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예진이 고개를 돌리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선이 드러났고, 그는 그곳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예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삼 년 동안 수없이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회사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여자였지만, 둘만 남으면 작은 접촉에도 눈빛이 달라지곤 했다.태준은 그런 모습을 아는 남자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단정하고 빈틈없는 회장 전속 비서였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는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였다.그는 예진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졌다.“오늘 저녁에도 와. 같이 저녁 먹고, 늦으면 여기서 자고 가.”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러나 예진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오늘은 어렵겠습니다. 미리 잡아 둔 약속이 있어서요.”태준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지금까지 예진이 자신의 저녁 제안을 거절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도 시간을 조정해 찾아왔고, 함께 식사하지 못하더라도 잠깐 얼굴을 보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오늘은 망설임조차 없이 어렵다고 했다.“무슨 약속인데? 급한 일이 아니면 다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2화
그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태준은 그 표정이 재미있었다. 어떤 업무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던 여자가 사적인 질문 하나에 말을 잃는 모습이 의외로 사랑스러웠다.그날 이후 태준은 예진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회의실에서 서류를 건네받을 때면 가느다란 손가락에 시선이 머물렀고, 차 안에서 나란히 앉으면 그녀의 어깨가 자신에게 닿는지 의식하게 되었다. 늦은 밤 둘만 남았을 때는 일부러 일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있기도 했다.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여겼지만, 어느 날 예진이 다른 남자 직원과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진 뒤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그는 문예진을 원하고 있었다.유능한 비서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남자로 바라보는 여자로서.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을 때 태준은 만족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업무 밖으로 이어진 뒤에는 그 만족감이 더욱 커졌다.예진에게는 자신에게만 허락하는 표정과 손길이 있었다. 태준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그 관계가 쉽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정작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깊이 원하고 있는지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은 채였다.***아침 식탁에 내려왔을 때 예진은 이미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짙은 남색 재킷과 아이보리색 블라우스, 단정하게 묶은 머리까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태준은 그녀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알아차렸다.“같이 먹지 그래.”“저는 회장님 준비하시는 동안 먼저 먹었습니다. 오전 일정이 조금 촘촘해서요.”태준은 맞은편의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예진은 그의 집에서 아침을 맞는 날이면 대개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그녀에게 업무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묻기도 했고, 예진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며 그의 잔을 치워 버리기도 했다.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간섭이었지만 태준은 그런 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3화
“주말 식사 일정은 반영해 두었습니다. 민세아 씨 측에도 참석 가능하다고 전달하겠습니다.”예진의 목소리에 태준은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약혼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태준은 그 평온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차라리 서운한 기색이라도 보였으면 했다. 자신에게 무슨 생각으로 약혼을 진행하는지 따져 묻거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으면 했다.그랬다면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예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주말에는 당신도 같이 가.”태준이 무심한 척 말하자 예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족 간 식사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비서실에서 별도로 대기하겠습니다.”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자신이 세아와 함께 있는 모습을 예진이 지켜보는 것은 불편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예진이 자신과 세아의 약혼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그녀가 어디까지 물러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점점 짜증이 났다.***오전 아홉 시 십 분, 태준은 회장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첫 장의 제목을 읽는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회장 전속 비서 채용 및 업무 인수인계 계획안.**“이게 뭐지?”예진은 책상 맞은편에 서서 차분하게 대답했다.“제 후임 채용 계획입니다. 계약 종료 전에 인수인계를 마치려면 지금부터 절차를 시작해야 합니다.”태준은 서류 첫 장을 넘겼다.채용 일정과 자격 요건, 인수인계에 필요한 기간까지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문서만 놓고 보면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그는 그 완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누가 후임을 뽑으라고 했어?”“제 계약이 삼십 일 뒤에 종료됩니다.”태준은 고개를 들었다.삼십 일.그제야 자신이 삼 년 전 승인했던 계약서의 종료일이 떠올랐다.기간이 끝나면 당연히 연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진만큼 자신의 업무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4화
하지만 태준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문예진, 이리 와.”그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예진은 잠시 망설였다.태준은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다.“내가 당신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다른 직원들하고 똑같이 대한 적 없잖아. 중요한 업무도 당신에게 맡겼고, 필요한 권한도 줬어. 당신이 원하면 대부분 들어줬고.”예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태준은 그 변화를 보았다.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까지 생각하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내겠다는 건 너무하지 않아?”예진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태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회장님께서는 제가 어떤 대답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태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남겠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하지만 그 말을 직접 요구하는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지 드러날 것 같았다.태준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받쳤다.“나 봐.”예진이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태준은 순간 가슴이 불편해졌다.삼 년 동안 예진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기에, 눈가에 맺힌 작은 물기조차 낯설게 느껴졌다.그는 엄지로 그녀의 뺨을 쓸어 주려 했지만, 예진이 조용히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손이 허공에 남았다.“회장님께서는 곧 약혼하실 분이십니다. 이제 이런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예진이 약혼을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그는 그녀가 세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두 집안의 관계와 약혼이 추진되는 이유까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예진은 그 약혼을 이유로 자신에게서 물러서고 있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말이 끝나자 예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5화
그런데 그녀는 지금 그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태준은 침묵했다.예진은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태준은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예진아.”이름만 부르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태준은 그 반응을 보았지만, 예진은 돌아오지 않았다.“회의 준비하겠습니다.”문이 닫힌 뒤에도 태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약혼을 취소하실 겁니까.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는 약혼을 취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진이 떠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마주했지만, 어느 하나를 포기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그 모순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오후가 되자 태준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졌다.해외 투자사와의 화상회의에서는 상대측이 제시한 불리한 조건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계열사 대표단 면담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업무에 관해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회의가 끝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예진을 찾았다.그녀가 회의실 뒤편에 서 있으면 잠시 마음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인사팀이나 비서실로 돌아가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정필원이 회장실에 들어왔다.태준은 보고서를 덮으며 물었다.“문 비서는 어디 있습니까?”“인사팀에 내려갔습니다. 후임 채용 관련 자료를 전달하러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아침에 자신이 분명히 보류하라고 말했는데도 예진은 계속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인사팀에 전달하세요. 후임 채용 절차는 내 승인 전까지 진행하지 말라고.”정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회장님, 문 비서 계약 종료일을 고려하면 인수인계 기간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태준은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승인하기 전까지 보류하라고 했습니다.”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정필원은 더 묻지 않았다.문이 닫히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6화
그는 그 손을 다시 잡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닙니다.”예진이 조용히 말했다.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올라갔다.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다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태준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면 그녀 역시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도 떠나겠다는 것이었다.태준은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처음으로 생각했다.그는 예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높은 연봉과 권한, 신뢰, 특별한 대우.그러나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랐는지는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문예진.”그녀가 고개를 들었다.태준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낮게 물었다.“내가 당신을 놓아주기 싫다면?”예진의 눈빛이 흔들렸다.태준은 그 변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당신이 다른 남자 옆에 서 있는 꼴은 못 보겠어. 내가 모르는 사람하고 웃고, 그 사람이 당신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예진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태준은 그녀가 자신에게 아직 마음이 있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예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회장님께는 곧 약혼하실 분이 계십니다.”태준의 턱이 굳었다.“그 얘기는 그만해.”“그만할 수 없는 일입니다.”예진은 처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눈가가 다시 붉어져 있었다.“저는 회장님의 약혼식이 끝난 뒤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그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태준은 자신이 생각해 왔던 미래를 떠올렸다.세아와 약혼하고, 예진은 지금처럼 곁에 있는 미래.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막연히 믿었다. 그러나 예진은 그 미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예진아.”그가 낮게 불렀다.예진은 고개를 저었다.“저를 붙잡으시려면 먼저 회장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해 주십시오.”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정중히 고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7화
서태준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다가 세 번째로 매듭을 풀었다.짙은 회색 정장에 어울리도록 고른 검은색 실크 넥타이는 처음부터 반듯하게 매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매듭을 다시 잡아당겼다.문제는 넥타이가 아니었다.평소라면 이쯤에서 문예진이 다가왔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선 그의 넥타이를 한 번 더 바로잡고, 셔츠 깃을 손끝으로 정리한 다음 재킷의 어깨선까지 살펴보았을 것이다.태준은 그럴 때마다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예진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이 좋았고, 그녀의 손끝이 목덜미를 스칠 때면 허리에 팔을 감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기도 했다.예진은 그런 그를 나무라면서도 결국 웃곤 했다.그런데 오늘은 탈의실이 조용했다.태준이 거울에 비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그러나 예진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턱 밖에 선 채 태블릿을 확인했다.“회장님, 열 시에 재무전략위원회가 있습니다. 아홉 시 사십 분까지 회의실로 이동하시면 되고, 관련 보고서는 책상 위에 준비해 두었습니다.”태준은 대답 대신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그녀의 시선이 잠깐 그의 목으로 향했다가 다시 태블릿으로 내려갔다.“넥타이가 좀 이상하지 않아?”태준이 거울을 향해 턱을 들자 예진은 그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매듭을 확인하는 눈길은 정확했지만, 예전처럼 다가와 손을 뻗지는 않았다.“매듭을 조금만 위로 올리시면 됩니다. 지금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와서 봐 줘.”그가 넥타이에서 손을 떼며 말했지만, 예진은 움직이지 않았다.“앞으로는 그런 부분도 직접 정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후임 비서에게 인계할 업무에서도 사적인 접촉은 제외할 생각입니다.”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후임 비서?”“네. 업무 매뉴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태준은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탈의실 옆 의자에 걸쳐 놓았다. 전날 자신이 후임 채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Read more
8화
그녀는 복잡한 재무 수치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태준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쟁점만 간결하게 추려 놓았다. 금리 상승에 따른 추가 비용과 만기 집중에 따른 위험, 대체 금융기관과의 협상 가능성까지 한눈에 들어왔다.태준은 자료를 넘기지 못했다.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불필요한 설명을 싫어했고, 숫자 뒤에 숨은 위험부터 확인하는 편이었다. 예진은 그런 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보고서의 순서까지 그의 판단 방식에 맞춰 정리했다.삼 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익혔는지 새삼 실감했다.그런 여자가 떠나겠다고 했다.태준은 보고서를 덮었다.계약 종료일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곁에서 쌓아 온 경력과 신뢰,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까지도.그는 책상 위 내선전화 버튼을 눌렀다.“문 비서, 잠깐 들어와.”예진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회장실에 들어왔다. 책상 앞에 선 그녀는 태준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손짓한 소파 쪽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태준은 전날 서랍에 넣어 두었던 후임 채용 계획안을 꺼냈다.“계약 조건을 다시 검토했어. 연봉은 지금보다 올려 주고, 업무 범위도 조정할 수 있어.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예진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회장님, 보수나 근무 조건 때문에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그럼 뭐가 문제인데?”태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평소라면 협상 상대의 요구를 먼저 파악했을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는 그런 협상에서 좀처럼 밀린 적이 없었다.그런데 예진 앞에서는 그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자신이 약혼을 취소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으면서도, 다른 조건을 제시하면 그녀가 마음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삼 년 동안 함께 일했어. 당신만큼 내 업무를 잘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권한을 맡겼는지도 알잖아.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을 맞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Read more
9화
태준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지금은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잖아.”“중요한 회의입니다. 재무총괄 사장님과 계열사 대표님들이 모두 참석하십니다.”그녀는 태준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이 이야기는 업무가 끝난 뒤에 하셔도 됩니다.”언제나 자신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챙겨 주던 여자였다. 태준은 그런 판단을 신뢰했고, 때로는 자신의 결정보다 예진의 일정 관리가 더 정확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군.”그의 말에 예진의 표정이 굳었다.그녀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손에 쥔 태블릿이 조금 기울어졌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저도 쉽지 않습니다.”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이미 내린 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예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떠나겠다는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차라리 마음이 식었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자신을 사랑하는 듯한 눈빛으로 관계를 끝내겠다는 여자를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장님, 이동하셔야 합니다.”예진이 다시 시간을 알렸다.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낮게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예진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회의실에는 제가 연락해 두겠습니다.”문이 닫힌 뒤에도 태준은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떠나겠다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붙잡고 싶은 마음은 강해졌지만, 무엇을 약속해야 할지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그는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그러나 첫 장에 적힌 숫자보다 예진의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저도 쉽지 않습니다.*태준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그녀도 힘들다고 했다.그런데 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회의실 문이 열렸을 때, 벽시계는 오전 열 시 십팔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Read more
10화
재무총괄 사장이 서류를 넘겼다.“현재 금융기관과 추가 협의 중입니다. 금리 조건이 확정되지 않아서—”“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보수적으로 계산해야 하는 겁니다.”태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단호했다.그는 화면에 표시된 세 개의 자금 조달안을 차례로 확인했다.“첫 번째 안은 단기 차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두 번째 안은 조달 비용이 불리하고, 세 번째 안은 만기 분산 효과가 있지만 환율 위험에 대한 대비가 부족합니다.”태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를 문제가 아닙니다. 단기 차입은 필요한 수준으로 제한하고, 만기 구조는 분산하되 환율 변동 위험을 별도로 관리해야 합니다. 금융기관 협상도 한 곳에 집중하지 마십시오.”재무총괄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금리 변동 시나리오를 세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필요한 현금 확보 규모를 다시 계산하십시오. 차입 구조를 바꾸는 목적은 단순히 이번 분기의 비용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임원들이 빠르게 메모했다.태준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그가 회의의 흐름을 장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앞서 십팔 분을 지각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판단은 정확했고, 질문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불필요한 보고는 잘라 내면서도 중요한 위험은 놓치지 않았고, 의견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숫자와 책임 범위를 기준으로 결론을 내렸다.회의가 끝날 무렵 정필원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회장님, 오전에 문 비서가 별도로 전달한 검토 의견입니다. 방금 지시하신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태준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그 안에는 자신이 회의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금리 상승에 따른 추가 비용과 만기 집중 위험, 대체 금융기관 협상 가능성까지 한 장에 담겨 있었다. 단순히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위험을 먼저 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Read more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