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원저녁엔 뭐 먹고 싶어? 약속 없으면 집에서 먹자.언니가 퇴근하고 집 가는 길에 사가지고 갈게.]그 문장은 아무렇지 않은 척 위장한 마음이었다.어느샌가부터 이런 문자 하나도, 하연에게 보내기엔 지원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하지만 손끝은 솔직하게, 조금 떨렸다.답장은 금세 왔다.[하연아무거나요.언니가 나랑 먹고 싶은 거!]그 말 한 줄에,지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이 아이는 정말,이젠 나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였을지도 모른다.지금은 죽은 남편에게 자기 동생이라며 소개받았을 때에유난히 귀를 붉히던 중학생 아이가 보내는 시그널이,이제야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그런데.. 나는 준비됐나?"홀로 작게 중얼거리는 지원.*그날 저녁.지원은 퇴근길에 시장에 들렀다.매일 구매하는 일상적인 고등어나 두부 대신,하연이 좋아하는 닭강정과 딸기, 샤인머스캣,그리고 작고 귀여운 와인 한 병까지.별 것도 아닌데도,계산대에 진열된 것들을 바라보며지원은 괜히 낯간지러워 고개를 숙였다.'뭔 기념일도 아닌데.. 왜 이러지, 나는.'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하연이 반쯤 벌어진 현관에서 웃으며 뛰어나오는 순간,그 모든 고민은 흐려졌다.“언니,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나 부르지.. 안 무거웠어요?”“무겁긴 뭐가 무겁다고. 그리고.. 그냥..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지원은 물끄러미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연은 와인 병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라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영화에서 보니까 주인공들은 이럴 땐, 키스하면서 어서오라고 말해주던데.”순간, 지원의 심장이 멈췄다.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하연의 표정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마치 그 말이,진짜 바람 같기도 하고, 아니길 바라는 도전 같기도 해서.지원은 입을 열었다.“..너 이제 영화랑 미드 금지야.""아, 왜요!"하연의 코를 꼬집는 지원.
아직은 새벽에 더 가까운 아침,햇살은 조용히 부엌 창문을 타고 살금살금 들이쳤다.유리창 너머로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잠들어있는 세상이 느긋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동시에 내쉬고 있었고,지원과 하연의 집 부엌은 그 조용한 새벽의 한가운데에 놓인 듯, 평온하고 따뜻했다.하연은 식탁에 자연스레 기대어앉은 채 조용히 그릇에 담긴 계란을 젓가락으로 부드럽게 풀고 있었다.노른자는 단정하게 깨져 흰자 속에 번졌고, 하연은 조심스레 젓가락을 돌렸다.소금과 약간의 후추로 간을 마친 계란물이 고르게 섞이자 불을 켜 후라이팬을 달궜고, 그 위에 기름을 두르자‘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집 안의 고요가 조금 흔들렸다.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계란. 하연은 능숙하게 계란을 뒤집어가며 계란말이를 만드는 중이다.그러다 하연도 모르게 손목에 살짝 계란을 튀기던 기름이 닿았고, 하연은 작게 숨을 들이쉬며 소리를 냈다.“아야..! 쓰읍..”그 소리는 벽을 타고, 문틈을 비집고,아직 잠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방 안의 지원의 귀에 가 닿았다."음..? 하연아..?"하연의 작은 비명에 무의식적으로 곧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지원.바로 부엌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지원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뛰쳐나왔다.“왜? 또 뭐 튀었어? 다쳤어? 아니면 바퀴벌레라도 나왔어? 바퀴벌레는 너가 잡아야 돼, 나 못잡는 거 알잖.. 뭐해?”잠긴 목소리로 낮게 내뱉어진 말들은 어떻게 들으면 무심한 듯도 들렸지만, 사실 지원의 목소리에는 그 덤덤한 말들을 뚫을듯 묘하게 날카로운 걱정이 드러나있었다.하연은 고개를 돌려 지원을 바라봤다.헝클어진 머리, 하얀 파자마, 약간 부은 눈가.훨씬 일찍 일어난 하연보다도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응.. 근데 별건 아니에요. 그냥 기름이 살짝 튀어서. 괜찮아요. 언니 졸리면 더 자요. 제가 다 되면 부를게요.”하연은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싱크대에 차가운 물을 틀고 손목을 식혔다.그러나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숨이 가빠져오는 것만 같았다.평소보다 조금 더 자주, 더 깊게 들이쉬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하지만 하연은 한 걸음 더 지원에게 다가왔다.하연의 이마가 지원의 어깨에 스칠 듯 가까워졌다.“나, 요즘 언니한테 피를 나눈 가족처럼 다정한 척하는 것도, 마냥 나이 차이나는 철부지 동생이자, 죽은 남편 때문에 어쩔수 없이 떠맡은 불쌍한 남편의 여동생인 척하는 것도 점점 못 하겠어요.머리로도, 가슴으로도 하기 싫어요.”그 말은 갈비뼈처럼 단단했고, 동시에 심장처럼 약했다.지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결국 낮게 아랫 입술을 꽉, 물었다.“..그럼 뭐가 되려고. 뭘 어쩌려고.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그것은 거절도, 수락도 아닌마치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마음의 무게를 담은 질문이었다.하연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웃었다.그 미소는 순수하고, 위태롭고, 정직했다.“..나를 언니가, 언니가 나를, 우리, 서로에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어른 대 어른으로.”공기 한 겹이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한 정적.지원은 그 말 앞에서,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했다.하연의 그 한 마디는살갗 위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들렸지만,막상 지원의 가슴에 닿는 감정은 셀 수조차 없이 너무 무거워,도망치고 싶은 충동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일렁였다. 무엇이 무엇의 그림자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그 순간.지원은 깨달았다.이제, 끝의 경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너무 가까워졌다.슬금슬금 다가오는 경계를 막거나, 피하거나, 아니면..온몸으로 부딪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홀로 짐작했다.*그날 저녁.지원은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었다.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읽던 책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책 페이지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글자들은 의미를 잃었고, 페이지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하루 종일 지원의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던 하연의 말.‘사랑하는 사람이
아침, 청명한 하늘은 유난히도 고요한 침묵으로 가득 차있었다.주황빛으로 밝게 빛나는 해가 소리없이 회색빛 먹먹한 구름을 모조리 쫓아내버린듯 하늘은 맑았지만,창문 너머에서 집 안으로 들어와 스며드는 햇살은 자기만의 힘을 잃은 듯 조용했고, 부엌 안을 감싸는 공기마저 낯설게 정적이 감돌았다.부자연스러운 정적.침묵이 잠에 든 지원을 쿡쿡 찌르는듯 했다."으음.."지원은 새벽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 밤이었다...요새 지원의 잠 상태는 늘 그렇긴 하지만.이불을 걷고 조용히 일어난 뒤,침대 위 베개와 이불을 단정하에 정돈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지원은 터덜터덜 거실로 나갔다. 아직 집안도 역시 바깥처럼 어두웠지만, 굳이 불을 켜지 않고도 익숙하게 닿는 자리마다 손이 자동으로, 저절로 움직였다.매일같이 반복한 일이니만큼 손길에는 주저함이 없었다.커피포트를 채우고, 원두를 갈고, 뜨거운 커피가 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뉴스를 틀고 잠시 멍하니 밤새 일어난 새로운 사건들과 오늘의 날씨 예보를 보다가,커피가 진하게 우러져나오는 향이 부엌 가득 번질 무렵, 조용히 거실로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지원의 귀에 들렸다.툭툭, 누가 들어도 하연이었다.평소의 하연이 깨어날 시간보다는 늦은 기상.원래는 지원이 커피 내릴 때 즈음이면 식탁에 앉으며 "언니, 저도 마실래요."라고 했을 텐데.하연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눈가는 여전히 부어있었다.하지만 그 세상 무해하게 귀여운 얼굴로 하연이 기웃거리며 자기 방문 틈을 열고 거실로 나온 그 순간, 지원은 이상하게 긴장했다."언니.."하연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지원을 향해 다가왔다.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하연.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지원은 커피를 따르던 손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뭐, 그냥..눈이 일찍 떠지더라. 요즘 좀 잠이 얕아졌나 봐...생각
“..언니?”그 목소리는 잠과 현실 사이에서 건너온 것처럼 잠긴 채로 희미했다.하지만 너무 정확히, 지원을 불러냈다.지원은 손을 멈췄다.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응. 나야.”속삭이듯 대답했다.그 어떤 감정도 숨기려 하지 못했다.“거기서 뭐해요..? 나 잘 자고 있나 확인하러..? 내가.. 애도 아니고.. 거 참..”하연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투가 지원의 귀에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며들어 섞여있는 것만 같았다.“..그냥, 네 얼굴 보고 있었어.”“내 얼굴.. 왜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그 안에는 자각이 있었다.하연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지원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했다.“그냥..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어떤 생각..”“만약 너가 없으면.. 내 하루는, 하루들은 정말 심심하겠구나, 그런 생각. 있어줘서 고마워, 뭐, 그런 느낌..?”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몰랐다.그저 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감정을 가득 담은 말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방 안은 조용했다.아무런 소리도 나지 없었다.하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빛이 거의 없는 어둠 속에서도, 하연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당연하죠, 근데.”하연은 아주 작게 말했다.“저도 언니 없는 하루들은 상상이 잘 안가요..”그 말을 끝으로 하연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지원은 그 자리에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한 걸음이면 손을 잡을 수 있었고,두 걸음이면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말 마지막 남은 선이라는 듯이.평온했고, 평온해야 할 일상이 뒤집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는 듯이.결국, 지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조용히 하연의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는 소리.그건 어떤 감정에는 문을 닫고,어떤 감정에는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그 감정들의 이름은 아직, 모르겠지만.*거실로 돌아온 지원은
6월의 어느 밤.창밖에서는 슬슬 여름의 냄새가 피어오르려하고 있었다.꽃과 약간의 먼지, 따뜻한 시멘트 냄새가 뒤섞인 시원한 밤공기가 천천히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리모컨도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 무심한 정적 속에서, 규칙적인 숨소리 하나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하연은 이미 자기 방에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 안, 어둠과 가로등의 미묘한 틈 사이.하연은 옆으로 누워, 한쪽 팔을 이불 밖으로 느슨하게 뻗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새근거리는 숨소리.그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워서, 마치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도 없이 시간을 살아가는 아기처럼 보였다."..."지원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과 하연의 방 사이 경계, 그 문턱에 조용히 팔짱을 낀 채 기대섰다.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문처럼.그 문턱은 경계였다.한 사람의 밤과, 다른 사람의 감정 사이.지켜야 할 거리와, 넘고 싶은 거리 사이.지원 또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고.이미 핸드폰마저 손에서 놓고 소파에 뒤집어놓았다.빛이 방해될까 봐.아니, 핑계였다. 지원은 그냥 이 고요함에 섞이고 싶었던 거다.하연의 숨소리. 방 안의 어둠.그 틈에 스며든 공기들에 지원은 자신을 천천히 담그고 싶었던 거였다.팔짱을 끼고 하연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지원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았다.간지러웠지만 지원은 머리를 털어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다른 그 어떤 행동조차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은 더 방 안의 하연에게로만 날카로워지고 있었다.어떤 촉감도, 어떤 소리도.하연이 만든 모든 존재의 흔적이, 이상하리만치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어둠에 눈이 익숙해져버린 시간.그러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지원은 팔짱을 풀었다.천천히, 조심스레, 발뒤꿈치를 들고 하연의 방바닥을 밟았다.숨소리조차 죽인 채로 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