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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흔히 길거리 나다니는 사람들 중 아무나 골라도 있을, 남들 다 있는 부모, 형제따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 그러니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소중하고, 제게서 떠나가는 사람이 한없이 밉다. 고아인 지원이 마찬가지로 고아인 남편에게 옆자리를, 품을 내준 것은 어쩌면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웠고, 괴로웠으니까. 외로웠을 것이고, 괴로웠을 것임을 지원은 가슴이 찢어져라 공감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리 밀어내고 냈지만은 남편은 다가왔고, 지원이 남편에게 밉고 나쁜 말들을 뱉어도 남편은 지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웃으며 옆을 지켰다. 어느 순간 그게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았던건,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그렇게 남편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지원. 세상이 주는 밝은 빛이라는 것은 언제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구 하나일 뿐이라는걸, 그때의 지원은 몰랐다. 결혼식을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차에 치여 허무하게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고, 홀로 남겨진 지원은 멀거니 남편의 영정 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훌쩍.. 훌쩍.. 오빠.." 지원의 옆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아이. 남편의 유일한 피붙이인 남편의 여동생, 하연. 갓 중학생이 되어 살짝 큰 교복을 입은 하연은 장례식 내내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지원과 같은 완벽한 고아. 그것이 하연이었다.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지원은 어른이니 혼자라고 해도 어떻게든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모든 장례식이 끝나고, 납골당 한켠에 남편이 본인만의 공간을 마련한 후, 남편과 하연이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갈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처음보는 남편의 친척이란 이들의 쑥덕거림이 지원의 귀에 스며들어왔다. "..그나저나 하연이는 어쩌지?" "난 못 데리고 살아. 애들만 셋인데 우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고." "누구는 안 빠듯해? 차라리 그냥 고아원으로.." 그 옆, 복도 벽에 걸터앉은, 두 눈이 새빨개진 하연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이. 아니, 어쩌면 다 알면서도. 그 모양새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지원. 터덜터덜 모여있는 그들에게로 걸어가 "내가 책임질 거에요." 놀라는 남편의 친척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얼굴에서 역겨운, 짐 하나 덜어냈다는 기쁨이 얼핏 보인다. 그게 지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구역질을 자아내게 했지만, 지원은 이를 악 물고 참아냈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한테 간섭하지 말고 살아요. 이제와서 가족행세라도 할 생각 말고." 지원이 하연에게 다가가, 하연의 신발을 신겨주며 "아가씨. 저랑 가요." 지원은 자리를 박차고 납골당을 떠난다. 작고 말랑한 하연의 손을 단단히 잡고. * 그리고 지금. "언니! 하얀색 양말 못봤어요?" "거기 서랍에 있겠지~" "없는데?" 서랍을 구석구석 들쑤시느라 난장판이 된 방. 지원은 앞치마를 입고, 한 손에 뒤집개를 든 채로 하연의 방으로 들어온다. 능숙하게 장롱 속에 손을 집어넣고 양말을 꺼내 건네주는 지원. "이게 양말이 아니면 뭘까~?" "헤헤.." 머쓱하게 웃어보이는 하연. 지원은 그런 하연을 보며 피식, 웃고는 "밥 다 됐으니까 먹으러 와. 일주일 연속 지각하는 고3이 어딨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엉클어버리는 지원. "아, 쫌!" "빨리와!" 지원은 하연의 방을 나간다. 혼자 남은 하연. 엉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다가, 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본다. "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하연. 고3 하연은 남몰래 연분홍빛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새언니를. * 식사를 끝마친 후, 설거지를 하는 지원과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있는 하연. "언니, 나 갔다올게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목소리. "어, 잘 갔다와~" 하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발 밑창을 탁탁 턴다. "언니! 나 갔다온다고요!" 그제야 고무장갑을 벗지도 못하고 하연에게 다가가는 지원. 하연은 어리광부리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지원은 그런 하연을 꼬옥 안아준다. "어이구..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친구들이랑 싸우지말고, 또.." "뭔.. 내가 애도 아니고." "애 맞거든." 그때, 하연은 그제야 만족한듯 지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현관문을 연다. "갔다올게요!" 팔짱을 낀채 피식, 웃다가 손을 흔들어주는 지원. 하연은 발개진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다 훽, 가버린다. 지원은 한동안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본다. "참.. 그 울보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커서는. 그나저나 얼굴은 왤케 빨갛지? 감기라도 걸렸나? 이따가 감기약이라도 사놔야겠네." 다시 설거지를 하러가는 지원이다. * "여." "하이."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둘. 하연과 그녀의 친구 시원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길을 걷다가, 시원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하연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푸핫! 왜 또 난리야!"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대며 웃는 둘. "표정 봐, 개웃겨!" 하연은 후다닥 도망가듯 뛰어가고, 시원은 그런 하연을 붙잡아 억지로 팔짱을 낀다. "아, 쫌!"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넉살좋게 밀어붙이는 시원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이는 하연이다. "숙제는 했냐?" "어허, 고3한테 뭔 숙제야. 고3에게 숙제란 있어도 없는 것!" "아니, 진짜라니까? 어제 윤리 때 선생님이 수험생은 숙제 안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생각이라고.. 아.. 너 퍼잤구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원. 하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넌 오늘 죽었다. 내가 바로 꼬댈거야." 어깨를 들썩이는 하연. 하연의 어깨에 얼굴을 부딪힌 시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 뼈 맞았어." "축하해." 그런데도 여전히 하연에게 엉겨붙는 시원이다. 그렇게 장난치며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학교.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엎어지는 하연. "나 잔다. 깨우면 조질거임. 딴 애들이 깨워도 너만 조짐." 시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참.. 이런 년이 어떻게 입학할 때부터 시험 볼 때마다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지 몰라. 야, 솔직히 말해봐. 너 컨닝.." 시원의 말을 끊으며 중지를 들어올리는 하연. "입 다무시고." 하연의 쿨한 말에 에휴, 한숨만 내뱉는 시원. "잘 자라." "..." "벌써 자냐?" 답 없는 하연의 뒷통수에 시원은 주먹을 쥐었다가 만다. 곧이어 교실로 들어오는 선생님. "자, 자! 다들 왔니?" "네.." 맥빠진 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 선생님은 그 소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교탁을 탁! 탁! 친다. "자, 왜들 이렇게 힘이 없어! 이제 수능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자는 애들 좀 옆에 애들이 깨워줘라, 좀. 저거, 대놓고 자는 애 누구니, 저거!" 하연을 향하는 선생님의 손가락. 시원은 대신 대답한다. "하연인데요, 오늘 아프대요." 한숨을 내뱉는 선생님. "쟤는 뭐, 맨날.. 아니다. 하연이 아프면 보건실 갔다 오라고 그래. 알았지, 시원아?"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 끝에 붙여 손 붙여 경례를 하는 시원. "넵! 알겠습니다!" "그래, 다들 조금만 더 참자. 수능만 끝나면 너네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니까, 응? 알았지?" "네~" 선생님은 그렇게 교실을 나선다. 잠시들 수근거리다가 이내 다시 자기들 공부하는 것들에 몰두하는 학생들. "나도 내 공부 해야지.." 가방을 뒤적거리는 시원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하연이 시원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쳐자고있는거 아니었냐? 깼으면, 그럼 니가 대답하든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뒤집고는 다시 잠에 드는 하연. "..휴.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니. 걍 마저 주무세요~" 하연은 다시 중지를 들어올리고는 자그맣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든다. "아오, 진짜. 이걸 그냥.." 시원의 말은 이미 꿈나라에 도달한 하연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하다. "..잠이나 자라. 어." 하연의 등을 조심히 토닥여주는 시원. * 그릇들을 뒤적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하연. 그런 하연의 뒤에서 지원이 살며시 하연에게 다가와 안았다. "언니.. 저 사실.." 지원이 하연의 입술에 입술을 맞춰 하연의 말을 끊는다. "..쉿. 말 하지 않아도 알아. 나도 사실 너를.." * "우와!" 모두가 공부하느라 조용한 교실, 하연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선이 다들 하연에게 쏠린다. 옆 자리에 앉은 시원이 하연을 끌어내리듯 앉히며, "드디어 미쳤냐? 쳐 자다 갑자기 왜 난리야!" 하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 아니, 그.. 꿈이었나? 휴.. 어.. 그게.." "쪽팔리니까 아가리 닫아.." 그제야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얌전히 앉는 하연. 시원은 그런 하연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개꿈이라도 꾼거야?" "..아니.. 개꿈은커녕 로또라도 사야될 법 한.. 꿈.." "그건 수능 끝나고 사시고, 그렇게 좋은 꿈이면 다시 쳐 자기나하세요. 잠꼬대 그만하고." "..응.." 쿵쿵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혹시라도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을까, 행복한 기대를 품으며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하는 하연. 시원은 한숨을 푸욱, 내쉰다.지원이 깔끔한 셔츠와 재킷을 걸친 남편 옆에 조심스레 서 있었고, 그들의 앞 의자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하연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앉아 있었다.하연은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 시절의 표정이었다.지원은 옆에서 사진을 힐끔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저거 기억나? 네 오빠 생일이었나? 우리가 처음 같이 사진 찍었던 날일 거야.”“그렇구나..”하연은 여전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 속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마치 구겨진 교복처럼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반면 지원은 지금보다 훨씬 말랐고, 정돈된 긴 머리 아래에서 억지로 짓는 미소를 얹고 있었다.한동안 그 사진만 바라보던 하연.“..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얘기인데, 솔직히 말하면 그땐 언니가 좀 무서웠어요.”“내가? 왜?”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예쁘고, 똑똑하고, 완벽해 보여서, 다 가진 사람 같아서, 오빠랑 같이 있어도 언니가 훨씬 더 어른스러워 보여서.나랑 오빠처럼 촌스러운 사람들이랑은 결이 달라보였거든요.”하연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마치 오래된 비밀을 털어놓는 아이처럼.지원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웃었다.“그런 말, 당사자한테 직접 들으니까 되게 민망하네.”“근데 지금은 아니에요.”미간을 장난스레 찌푸리는 지원.“뭐? 지금은 안 예쁘고, 똑똑하지도 않고, 완벽해 보이지도 않다고?”“아니, 뭐..지금은 그냥.. 귀여운 언니예요. 아침에 찌푸린 얼굴로 입이 찢어져라 하품 내뱉으면서 눈 비비며 나오는.. 그런 사람.”하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지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쓴웃음을 지었다.“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 맞지?”“물론이죠.”그 말의 끝에는 지원과 하연의 웃음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어느새, 조용했던 밤이 말랑하게 웃는 공기로 채워졌다.하연은 조심스럽게 가족사진을 상자에 다시 넣었다.그러다 바닥을 살피던 손끝이, 작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
난장판이 된 하연의 방.옷가지, 이불, 베개들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폭풍.그 어지러운 폭풍 한가운데에서, 나른한 향기 폴폴 풍겨대는 것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하연."내가.. 남는 베갯잇을 어디다가 뒀더라.."무릎으로 기어다니며 다시 한 번,방 안 구석구석 서랍 하나까지 뒤져보는 하연."이씨.. 베갯잇에 다리라도 달린거야, 뭐야.야, 이 정도면 눈치껏 나와라, 내가 작정하고 찾아야겠니? 넌 나한테 들키면 죽어, 그니까 빨리 순순히 자수하도록."베겟잇 세탁할 때가 되서 세탁기에 던져놓고,하얀 속베개에, 그 전에 미리 세탁해놓은 새 베갯잇을 씌우려고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에서 골똘히 생각에 집중하는데,"..방 안에 없나? 세탁기에 있나? 언니가 나 몰래 세탁기 돌렸나? 내 베갯잇만? 나 골탕먹이려고?!..그건 아니겠지. 그럼 어디있는거야 대체.."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질러진 방 안을 다시 정리하는 하연.팽개친 옷들을 다시 개고, 이불을 집어넣고, 베개들을 깔끔하게 털고 방 안을 정돈한다.태풍 속 같던 방 안이 다시 한 번 평화로운 밀밭처럼 깔끔히 잠잠해졌다."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나한테도 필살기가 있다는 말씀.."하연의 필살기란 바로.."언니! 내꺼 베갯잇 못봤어요?"거실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목소리."음.. 글쎄?아, 그거 저번에 빨래 갤 때 너껀 너가 정리한다고 방에 가져가지 않았어?""맞아요! 근데 방에 없어요!""내가 찾으면 너 큰일난다, 아주.""히잉."시무룩한 얼굴로 자기 방에서 나와 지원의 옆, 거실 소파에 털썩 쓰러지는 하연."빨래 갤 때던, 빨래 갠 거 가져갈 때던, 늘 두던 자리에 두라고 했지.""언니는 모르는 저만의 기분 전환 인테리어 방식이라구요.""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아무데나 쑤셔박는다고 하지, 아마?"뾰루퉁, 입술을 내밀며 쳇, 하는 하연."베개 빌려줘?""...""베개 없이 자면 불
장보기가 끝난 후, 둘은 마트 근처 벤치에 앉았다.커다란 장바구니는 발밑에 두었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꼭 오래된 친구처럼도 보였다."겨울에 아이스크림이라니.""원래 아이스크림은 겨울이 제철인 법이에요."하연은 장바구니를 슬쩍 발끝으로 찼다."왜 가만 있는 장바구니한테 시비 걸어."“발 심심해서요.그나저나 진짜 같이 살면 이런 느낌일까..”“우리 지금 같이 살고 있는데?”“아니, 그냥.. 더 오래. 진짜 가족처럼.”지원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갸웃했다.“지금도 충분히 가족 같은데.”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부르르, 떠는 하연.지원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하연의 패딩 지퍼를 목끝까지 올려준다."그니까 뭔 아이스크림이야.""원래 아이스크림은 추울 때 먹는 거에요.""..그건 그거고, 우리 가족 맞잖아. 같이 살고, 같이 먹고."“..그렇죠. 근데, 언니가 말하는 가족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사실 나도 잘 몰라.”지원은 웃었다.아이스크림이 살짝 녹아내렸다.하연이 그것을 보고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 주며, 무심히 말했다.“그래도 좋기는 좋아요. 명확한 이름 없이도 둘이 있을 수 있어서.”지원은 조용히 하연을 바라봤다.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하연의 귓가는 조금 붉었다.아이처럼, 혹은 어른처럼도 보이는 하연은,그 중간 어디쯤에서 애매하게 서 있는 사람 같았다.*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해 넣고, 둘이 함께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시계를 잠시 쳐다보고는 지원이 하연에게 물었다.“저녁은 뭐 먹고 싶어?”“음.. 언니가 해주는 거라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세상에서 그 말이 제일 무책임한 거야, 알아?아무거나만큼 무서운 대답은 없을걸.”“그러면.. 고등어 샀잖아요. 고등어 구워먹어요.”지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등어 구워줄게. 그 대신 너가 설거지 해.”입술을 삐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일주일 중 유이하게 알람이 울리지 않는 날. 언제나 소란스러운 집안이 조용하다.침대 위엔 곤히 자고있는 지원이 보인다.한줄기 햇빛이 서서히 기울어지다 지원의 감긴 두 눈위에 드러눕는다.움찔거리는 지원의 눈꺼풀.고개를 몇번이고 까딱거리다가 결국,"으으!"이불 속에서 온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켜는 지원.잠에서 깨어나고도 베개 위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뒹굴거리다, 손을 뻗어 침대 위를 더듬거리더니 잡힌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한다.10시 37분.멀거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지원.햇빛은 여전히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고, 창문 너머에선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원쪽을 바라보는 고양이.지원이 손을 흔들자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사라진다.지원도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새침하긴. 지가 고양이야, 뭐야."방 밖은 조용했다.하연이는 아직 자고 있나, 싶었지만, 싱크대 쪽에서 작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하연아?”잠긴 목소리.지원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반쯤 부은 얼굴로 거실로 나섰다.그러자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머리띠를 이마에 질끈 묶은 하연이,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 위를 행주로 박박 닦고 있었다.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휴, 하며 한숨을 내뱉는 하연의 눈에 잠에서 덜 깨보이는 듯한 지원이 보였다.“어? 언니 일어났어요?..상태가 어째.. 아직 제대로 일어나진 않은 것 같긴 한데, 아무튼.”다시 길게 하품을 뱉는 지원.“..너 무슨 행사라도 있어? 우리 집에서 오늘 뭐 하나? 파티? 미드에서 나오는 것처럼?왜 그렇게 아침부터 온 집 안을 때 빼고 광내시는지 물어봐도 되나?”“할 거 없는 주말엔 역시 대청소죠. 옛날에 오빠가 맨날 그랬거든요. 쉬는 날에 집 안 정리라도 좀 하라고.”“..그래, 그랬었지.”다시 하품을 하는 지원을 보고 하연은,“언니 아직 피곤해보이는데 좀 더 자요.”지원은 하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연의 약간 타긴 했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이 거실 식탁 위에 펼쳐졌다.계란프라이, 간장 두른 참치김치볶음, 애호박볶음, 그리고 진한 된장국.“오, 생각보다 비주얼은 나름 괜찮은데?”“‘생각보다’는 좀 빼주시죠. 뭔 생각을 하셨길래 그런 말이 나오시나요..”지원은 젓가락을 들었다.애호박볶음를 한 젓갈 집어먹어보고,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을 한 숟갈 떠먹어봤다.소금기가 살짝 강했지만, 왠지 그런 게 더 좋았다.하연의 어설픈 진심과 노력이 식사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해서.“맛있어.”“진짜요?”“응. 진짜 맛있어, 하연아.”그 말을 듣고나서야 하연도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그 순간, 둘은 동시에 조용히 웃었다.지원은 아무 말 없었지만, ‘고마워’라는 말이 눈빛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그저 묵묵히 하연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먹을 뿐.*그날 밤, 둘은 동네 카페에 앉아있었다.지원은 창가 쪽, 하연은 맞은편.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떼 사이에 놓인 건, 아마도 정적일테지만 그리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빨대로 라떼를 빙글빙글 돌리다, 얼음을 콕콕 찔러대던 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 진짜 싫어요?”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손끝을 탁자 위에 탁탁 두드리던 지원이 고개를 들어 하연과 눈을 마주쳤다. 의아한 얼굴.“무슨 오해?”“그러니까.. 우리 사이요.우리가 평범한 사이는 아니잖아요.전 새언니와 전 시누이가 단둘이 같이 사는게..조금, 아니, 조금 많이, 이상하잖아요.”지원은 잠시 생각하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흠.. 뭐, 남들이 보기엔 이상할법도 하지.그런데 어쩌겠어.우리 둘이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가 이렇게 버젓이 세상에 존재하는걸.물론 당연히 오해라면 싫지. 근데 오해가 아니라 착각이라면 좀 다를지도 몰라.”“착각?”“응. 착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 말이 맞다고 스스로 믿는 거잖아. 오해는 타인이 하니까 억울하고,그런데 착각은 본인이 지 마음대로 하
“언니, 오늘 일찍 끝난다 그랬나요?아닌가? 내일이었나?오늘 아니면 내일이었던 것 같은데.언니! 언제에요?! 네?!”하연의 목소리가 요란스럽게 거실을 가로질러 들려왔다.지원은 욕실에서 양치질을 마치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대답했다.“응, 오늘~ 원래 오후 일정들 좀 빡빡했는데, 마지막 거 하나 취소 됐다 했잖아.”“그럼.. 우리 저녁은 집에서 밥 먹어요. 제가 만들게요.”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리모컨을 누르며 티비를 틱틱, 채널을 바꿔대는 하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우리 집 유일한 고3님이 야자는 오늘도 그렇게 스무스하게 빠지시려고?""공부보다 언니가 더 소중한데 어떡해요.소중한 언니 잘못! 내 잘못 아님! 만약 쌤이 언니한테 전화하면 나 아프다 그래줘요~"지원은 거울 속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어제 하연이 시원이한테서 ‘커플 같아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 어쩐지 하연의 말투가 조금 더 다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니, 원래도 다정한 편이긴 했는데.. 그게 꼭 무언가를 굉장히 의식하고 던지는 말처럼 느껴졌다.괜히 튕겨보는 지원.“그래요. 근데요, 저기요, 고3님. 너 수능 얼마 안남은 거 알지요?”"그럼요.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합법적으로 술 마실 수 있는 날!"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원."..나는 거기까지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아무튼! 제가 저녁 준비할테니까 그렇게 아십쇼!갑자기 일이 잡힌다거나, 갑자기 회식 가야 된다거나, 갑자기 갑자기스러운 그런거 없기에요!꼭 빨리 오는 거에요! 만약 회사가 야근시키면 내가 가서 깽판놓을거임!""어떻게?""음.. 회사 문 손잡이들마다 식용유를 발라놓는다던지..?""네, 네~ 손바닥 미끌거리기 전에 퇴근할게요~"집 안에는 아침 특유의 잠잠한 햇살이 노크도 없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작은 베란다 창에 걸린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채 미처 다 말리지 못한 지원의 머리칼에도 잔잔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출근 복장인 정장과 셔츠를 옆에 두고, 지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