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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흔히 길거리 나다니는 사람들 중 아무나 골라도 있을, 남들 다 있는 부모, 형제따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 그러니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소중하고, 제게서 떠나가는 사람이 한없이 밉다. 고아인 지원이 마찬가지로 고아인 남편에게 옆자리를, 품을 내준 것은 어쩌면 그로 인해 촉발된 자기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웠고, 괴로웠으니까. 외로웠을 것이고, 괴로웠을 것임을 지원은 가슴이 찢어져라 공감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리 밀어내고 냈지만은 남편은 다가왔고, 지원이 남편에게 밉고 나쁜 말들을 뱉어도 남편은 지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웃으며 옆을 지켰다. 어느 순간 그게 익숙해진 자신을 깨달았던건,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그렇게 남편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지원. 세상이 주는 밝은 빛이라는 것은 언제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전구 하나일 뿐이라는걸, 그때의 지원은 몰랐다. 결혼식을 올린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차에 치여 허무하게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고, 홀로 남겨진 지원은 멀거니 남편의 영정 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훌쩍.. 훌쩍.. 오빠.." 지원의 옆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아이. 남편의 유일한 피붙이인 남편의 여동생, 하연. 갓 중학생이 되어 살짝 큰 교복을 입은 하연은 장례식 내내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지원과 같은 완벽한 고아. 그것이 하연이었다.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지원은 어른이니 혼자라고 해도 어떻게든 버텨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모든 장례식이 끝나고, 납골당 한켠에 남편이 본인만의 공간을 마련한 후, 남편과 하연이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갈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처음보는 남편의 친척이란 이들의 쑥덕거림이 지원의 귀에 스며들어왔다. "..그나저나 하연이는 어쩌지?" "난 못 데리고 살아. 애들만 셋인데 우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고." "누구는 안 빠듯해? 차라리 그냥 고아원으로.." 그 옆, 복도 벽에 걸터앉은, 두 눈이 새빨개진 하연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이. 아니, 어쩌면 다 알면서도. 그 모양새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지원. 터덜터덜 모여있는 그들에게로 걸어가 "내가 책임질 거에요." 놀라는 남편의 친척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얼굴에서 역겨운, 짐 하나 덜어냈다는 기쁨이 얼핏 보인다. 그게 지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구역질을 자아내게 했지만, 지원은 이를 악 물고 참아냈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한테 간섭하지 말고 살아요. 이제와서 가족행세라도 할 생각 말고." 지원이 하연에게 다가가, 하연의 신발을 신겨주며 "아가씨. 저랑 가요." 지원은 자리를 박차고 납골당을 떠난다. 작고 말랑한 하연의 손을 단단히 잡고. * 그리고 지금. "언니! 하얀색 양말 못봤어요?" "거기 서랍에 있겠지~" "없는데?" 서랍을 구석구석 들쑤시느라 난장판이 된 방. 지원은 앞치마를 입고, 한 손에 뒤집개를 든 채로 하연의 방으로 들어온다. 능숙하게 장롱 속에 손을 집어넣고 양말을 꺼내 건네주는 지원. "이게 양말이 아니면 뭘까~?" "헤헤.." 머쓱하게 웃어보이는 하연. 지원은 그런 하연을 보며 피식, 웃고는 "밥 다 됐으니까 먹으러 와. 일주일 연속 지각하는 고3이 어딨어?"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엉클어버리는 지원. "아, 쫌!" "빨리와!" 지원은 하연의 방을 나간다. 혼자 남은 하연. 엉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다가, 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본다. "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하연. 고3 하연은 남몰래 연분홍빛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새언니를. * 식사를 끝마친 후, 설거지를 하는 지원과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고있는 하연. "언니, 나 갔다올게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목소리. "어, 잘 갔다와~" 하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발 밑창을 탁탁 턴다. "언니! 나 갔다온다고요!" 그제야 고무장갑을 벗지도 못하고 하연에게 다가가는 지원. 하연은 어리광부리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지원은 그런 하연을 꼬옥 안아준다. "어이구..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친구들이랑 싸우지말고, 또.." "뭔.. 내가 애도 아니고." "애 맞거든." 그때, 하연은 그제야 만족한듯 지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현관문을 연다. "갔다올게요!" 팔짱을 낀채 피식, 웃다가 손을 흔들어주는 지원. 하연은 발개진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다 훽, 가버린다. 지원은 한동안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본다. "참.. 그 울보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커서는. 그나저나 얼굴은 왤케 빨갛지? 감기라도 걸렸나? 이따가 감기약이라도 사놔야겠네." 다시 설거지를 하러가는 지원이다. * "여." "하이."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둘. 하연과 그녀의 친구 시원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길을 걷다가, 시원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하연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푸핫! 왜 또 난리야!"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대며 웃는 둘. "표정 봐, 개웃겨!" 하연은 후다닥 도망가듯 뛰어가고, 시원은 그런 하연을 붙잡아 억지로 팔짱을 낀다. "아, 쫌!"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넉살좋게 밀어붙이는 시원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이는 하연이다. "숙제는 했냐?" "어허, 고3한테 뭔 숙제야. 고3에게 숙제란 있어도 없는 것!" "아니, 진짜라니까? 어제 윤리 때 선생님이 수험생은 숙제 안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생각이라고.. 아.. 너 퍼잤구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원. 하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넌 오늘 죽었다. 내가 바로 꼬댈거야." 어깨를 들썩이는 하연. 하연의 어깨에 얼굴을 부딪힌 시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 뼈 맞았어." "축하해." 그런데도 여전히 하연에게 엉겨붙는 시원이다. 그렇게 장난치며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학교.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엎어지는 하연. "나 잔다. 깨우면 조질거임. 딴 애들이 깨워도 너만 조짐." 시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참.. 이런 년이 어떻게 입학할 때부터 시험 볼 때마다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지 몰라. 야, 솔직히 말해봐. 너 컨닝.." 시원의 말을 끊으며 중지를 들어올리는 하연. "입 다무시고." 하연의 쿨한 말에 에휴, 한숨만 내뱉는 시원. "잘 자라." "..." "벌써 자냐?" 답 없는 하연의 뒷통수에 시원은 주먹을 쥐었다가 만다. 곧이어 교실로 들어오는 선생님. "자, 자! 다들 왔니?" "네.." 맥빠진 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 선생님은 그 소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교탁을 탁! 탁! 친다. "자, 왜들 이렇게 힘이 없어! 이제 수능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자는 애들 좀 옆에 애들이 깨워줘라, 좀. 저거, 대놓고 자는 애 누구니, 저거!" 하연을 향하는 선생님의 손가락. 시원은 대신 대답한다. "하연인데요, 오늘 아프대요." 한숨을 내뱉는 선생님. "쟤는 뭐, 맨날.. 아니다. 하연이 아프면 보건실 갔다 오라고 그래. 알았지, 시원아?"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 끝에 붙여 손 붙여 경례를 하는 시원. "넵! 알겠습니다!" "그래, 다들 조금만 더 참자. 수능만 끝나면 너네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니까, 응? 알았지?" "네~" 선생님은 그렇게 교실을 나선다. 잠시들 수근거리다가 이내 다시 자기들 공부하는 것들에 몰두하는 학생들. "나도 내 공부 해야지.." 가방을 뒤적거리는 시원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하연이 시원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쳐자고있는거 아니었냐? 깼으면, 그럼 니가 대답하든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뒤집고는 다시 잠에 드는 하연. "..휴.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니. 걍 마저 주무세요~" 하연은 다시 중지를 들어올리고는 자그맣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든다. "아오, 진짜. 이걸 그냥.." 시원의 말은 이미 꿈나라에 도달한 하연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하다. "..잠이나 자라. 어." 하연의 등을 조심히 토닥여주는 시원. * 그릇들을 뒤적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하연. 그런 하연의 뒤에서 지원이 살며시 하연에게 다가와 안았다. "언니.. 저 사실.." 지원이 하연의 입술에 입술을 맞춰 하연의 말을 끊는다. "..쉿. 말 하지 않아도 알아. 나도 사실 너를.." * "우와!" 모두가 공부하느라 조용한 교실, 하연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선이 다들 하연에게 쏠린다. 옆 자리에 앉은 시원이 하연을 끌어내리듯 앉히며, "드디어 미쳤냐? 쳐 자다 갑자기 왜 난리야!" 하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 아니, 그.. 꿈이었나? 휴.. 어.. 그게.." "쪽팔리니까 아가리 닫아.." 그제야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얌전히 앉는 하연. 시원은 그런 하연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개꿈이라도 꾼거야?" "..아니.. 개꿈은커녕 로또라도 사야될 법 한.. 꿈.." "그건 수능 끝나고 사시고, 그렇게 좋은 꿈이면 다시 쳐 자기나하세요. 잠꼬대 그만하고." "..응.." 쿵쿵거리는 심장을 끌어안고 혹시라도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을까, 행복한 기대를 품으며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하는 하연. 시원은 한숨을 푸욱, 내쉰다.다음 날 저녁, 지원은 하연을 데리고집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언니, 진짜로.. 집 보러 다니는 거예요?”“우리 둘이 살 집.이왕이면 창문 큰 데로.”부동산 직원은 둘을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은 듯단순히 자매쯤으로 여겼다.그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씁쓸했다.“두 분이 함께 지내실 거면, 이 집 구조 괜찮을 거예요.”하연은 집 도면을 바라보다작게 중얼였다.“함께라는 말, 되게 좋네요.”*밤, 돌아오는 길.지원은 문득 물었다.“진짜 괜찮아?”“뭐가요?”“사람들 말, 가족 반응, 미래 불확실한 거..그 모든 걸 다 감수하면서 나랑 같이 사는 거.”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언니.”“응?”“우리 언제부터 당연하게 같이 살 생각했는지기억 안 나요.근데 그만큼..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나 봐요.”“무슨 마음?”“이 사람이랑은,어떤 불편도 같이 견뎌보고 싶다.. 그런 마음.”*그날 밤, 둘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로를 바라보다가지원이 말했다.“이게.. 사랑을 미래로 옮기는 과정인가 봐.”“조금 불편하고,조금 불안하지만,그럼에도 계속 가고 싶은 길.”하연이 웃었다.“언니,우린 이미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마음부터.”사랑은 가벼운 설렘을 지나조금씩 삶이 되고 있었다.현실의 무게를 느끼며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그것이 바로,사랑을 진짜 미래로 데려가는 일이라는 걸두 사람은 이제야 알게 됐다.
봄이 깊어가는 어느 평일 저녁.퇴근 후의 서울은 따뜻하고 붐볐다.지원과 하연은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한강 근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따끈한 파스타와 와인이 놓였다.“요즘엔 어때요? 일.”하연의 질문에, 지원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복잡해.새 프로젝트 맡았는데, 이직 고민도 같이 하니까 머리가 아프더라.”“이직하면.. 회사 근처로 이사 가요?”지원은 하연을 바라봤다.“그 얘기, 하려고 했어.”“ .응?”“이직하면, 좀 더 외곽으로 갈 수도 있어.조용하고, 넓은 집.너랑 같이 살기 더 편한 곳으로.”하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진짜요?”“응. 우리, 이제 진짜 함께 사는 걸한 번 제대로 해보자.”하연은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 조용히 웃었다.“그거, 좀 감동이에요.”“감동만?”“..그리고 좀.. 무서워요.”지원은 고개를 갸웃했다.“왜?”“같이 살고, 미래를 계획한다는 게좋기만 한 게 아니니까.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을지도 몰라요.”지원은 그 말에 진지해졌다.“하연아,너한텐 아직 먼 이야기일 수도 있어.나보다 경험도 적고,이런 관계를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렵잖아.”“응..”“하지만 나한텐 네가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가장 오래 옆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야.”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식사 후, 한강을 따라 걸으며지원이 말했다.“나는 가끔..우리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너한텐 짐이 될까 봐 걱정돼.”“왜요?”“사람들이, 너한테 뭐라 하진 않아?”하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끔 친구들이 물어봐요.‘요즘 누구 만나?’ 같은 거.”“그리고?”“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정도로 말해요.”지원은 하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손을 천천히 잡았다.“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거야.”하연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언니,그런 거 다 감수하고도,나는 언니랑 있는 게 훨씬 좋아요.”
식탁에 앉은 둘 사이엔오랜만에 낯선 공기가 감돌았다.“하연아.”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요즘 무슨 일 있어?”하연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요. 그냥..언니가 자꾸 멀리 느껴져서요.”“멀리?”“언니가 바쁜 거 아는데,그래도.. 난 가끔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요.”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도 그래.너무 좋아서,그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어.”“..그게 왜요?”“너한텐 나 하나뿐인데,나는 너한테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하연은 그 말에 눈을 감았다.“근데 언니.그런 식이면.. 나도 언니한텐 하나뿐이에요.나도 언니 잃는 게 무서운 사람인데.”지원은 고개를 숙였다.말없이 하연의 손등을 감싸며,이런 감정이 꼭 싸움처럼 커지지 않게 조심하려 애썼다.“우리,서로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가끔 오해를 부르나 봐.”“맞아요.그게 문제예요.우린 서로 너무 좋아해서,작은 틈에도 금이 가는 것 같아요.”그날 밤,지원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잠든 줄 알았던 하연의 어깨에조심히 이마를 댔다.“다음부턴 꼭 말해줘.혼자 서운해하지 말고.”“..응.”“그리고, 나 너한테 멀어질 생각 없어.아무리 바빠도,항상 너한테 돌아올 거야.”하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알아요.그래서 아직, 괜찮아요.”사랑이란 게늘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작은 불안, 사소한 틈,말 한마디가 못다한 감정들.그럼에도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다시 손을 내미는 일.그게 결국,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침대 위 두 사람의 온도는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었다.그리고 그 조용한 흔들림을 지나그들은 다시,조금 더 단단해졌다.
일요일 저녁.비가 내렸다.계절의 틈에 걸친 봄비는 유난히 차가웠고,거리는 젖은 우산들로 가득했다.지원은 작업실에서 평소보다 늦게 나왔다.회의가 길어졌고, 클라이언트 요청으로 급하게 수정할 게 생겼다.조용히 휴대폰을 확인하니하연에게서 온 메시지가 여러 개.[하연오늘 비 와요][하연우산 챙겼어요?][하연밥은요?]그리고 마지막으로,2시간 전의 메시지 하나.[하연저 먼저 잘게요조심히 와요]지원은 괜히 마음이 쿡 찔렸다.별말 아닌데도,그 “조심히 와요”라는 말 속에뭔가 지친 숨결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집에 들어섰을 때,하연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불은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TV는 무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안 잤네.”지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기다리다가, 그냥 멍하니 있었어요.”지원은 코트를 벗으며 다가갔다.“미안. 회의가 길어졌어.”“괜찮아요. 그런 줄 알았어요.”하연은 웃었지만,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늦은 저녁, 식사는 시켜 먹기로 했다.지원이 주문을 하고,하연은 아무 말 없이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라면 먹게?”“그냥.. 배고파서 먼저 먹을게요.”“말하지. 방금 주문했는데.”“말해도 바뀌는 거 없잖아요.”지원은 그 말에 순간,작은 파문처럼 퍼지는 감정을 느꼈다.서운함,그리고 죄책감.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지원은 하연이 장바구니에 몰래 넣어둔 딸기 우유를 발견했다.“이거 또 넣었지?”“왜요? 언니 좋아하잖아요.”“...”“언니는, 아기입맛이 귀여운 거 모르죠.”지원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장바구니를 바꿔 들었다.“무겁다. 내가 들게.”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말했다.“언니, 나 요즘 진짜 많이 웃는 거 같아요.”“그래?”“네.이런 거.. 너무 좋잖아요.별거 아닌 거, 같이 하고아무 일 없어도 같이 있고.”지원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바람에 잔머리가 흩날리고,그늘 아래에도 미소가 묻어 있었다.“..나도 그래.”*밤.샤워를 마친 하연은 드라이기 소리를 줄이며 말했다.“언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지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덮고,잠시 고개를 기울였다.“사랑?글쎄..하루에도 몇 번씩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고,그걸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네가 알아줄 것 같아서 안심하는 마음?”“..너무 좋다.”하연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지원 옆에 앉았다.“나는요,사랑이란 게 꼭 타오르는 불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오히려 이렇게..습관처럼, 다정하게 흘러가는 게 더 어렵고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해요.”지원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했다.“그럼 우리, 지금 사랑 잘하고 있는 거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어 말했다.“매일매일, 더 잘하고 있어요.”*불을 끄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잠드는 밤.다정한 말보다,익숙한 숨소리와나란히 있는 손끝이 더 진하게 사랑을 말해주는 시간.함께 사는 일이 사랑을 습관처럼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사랑했기에 이 모든 습관이 더없이 특별해진 거였다.그리고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두 사람의 가장 빛나는 날로 남는다.내일도,아무 일이 없어도,둘은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언니, 양말 또 뒤집어 놨죠.”하연의 목소리가 조용한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세탁기 앞에서 양말을 정리하던 그녀는익숙한 포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지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잼을 바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알아요. 근데 오늘에만 벌써 세 번째잖아요.”하연은 양말을 뒤집으며 웃었다.투덜거리지만,표정엔 지겨움보다는 익숙한 다정함이 스며 있었다.지원은 뻔뻔하게 말했다.“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하면?”“그럼.. 평생 내가 뒤집어줘야죠, 뭐.”“그 말, 녹음해놔야겠다.”*주말 아침,햇살이 창문을 가득 메웠다.하연은 청소기를 돌리고,지원은 커피를 내렸다.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말이 없어도, 따로 말하지 않아도동선이 겹치지 않는 건오랜 습관처럼 몸에 밴 리듬이었다.“우리, 완전 부부 같지 않아요?”하연이 말했다.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닦으며.지원은 고개를 돌렸다.“뭐야, 갑자기.”“아니, 그냥.서로 뭐 안 물어봐도뭐 필요한지 아는 거 보면 그렇잖아요.”지원은 조용히 웃었다.“그러게.우리 그렇게 됐네.”*점심 무렵, 동네 마트에 함께 나섰다.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길,길가에 핀 유채꽃을 하연이 먼저 발견했다.“언니, 저거 봐요.”“음. 벌써 봄 같네.”“봄이 아니라, 이제 진짜 봄이에요.입춘도 지났고.”“그럼 우리도 새 계절에 맞게 바꿔볼까?”“뭐요?”지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이불.너 그 핑크색 이제 좀 지겹지 않아?”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거 언니가 골랐잖아요.귀엽다고.”“지금은 네가 더 귀여우니까이불은 바꿔도 돼.”하연은 터질 듯 웃었다.“아 진짜, 언니 요즘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습관이야.”
토요일 아침.희미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며 방 안에 부드러운 금빛을 제멋대로 흩뿌리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봄바람은 아직 마음 속에서 겨울을 오롯이 보내지는 못했다는듯 아직까지는 살짝 싸늘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닿는 온도가 묘하게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하연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눈을 떴다. 아직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따사로워서,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며 커튼을 젖히자,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이제 드
평생 이렇게 살 것 같던, 각자 눈코뜰새없이 바쁘던 평일들을 견디며 보내고, 일요일 오전.세상 평화로운 햇살은 미지근하게 투명한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고, 아파트 벽에 부딪혀 반사된 빛은 따뜻한 빛으로 거실 바닥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런 느긋한 오전, 하연의 방에서는 아주 희미하고 일정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흐응.."이리저리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그에 더해 코를 고는 건지, 숨을 고르는 건지 모를 조용한 소리는, 오히려 방 안의 적막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언니."지원은 이불 속에 몸을 반쯤 파
“언니, 이거 둘 어때요? 뭐가 더 나아요? 별로면 다른 거 가져올까요? 예쁜 것들 더 많아보이기는 했는데!”하연은 양손에 기다란 코트를 두벌 들고 들뜬 눈빛으로 지원 쪽을 바라봤다.하나는 검은색 롱코트, 하나는 짙은 버건디색 하프코트.부쩍 차가워진 공기에 맞춰 외투를 사야 한다며, 둘은 동네 아울렛으로 나들이 겸 외출을 나선 참이었다.평소에도 옷이나 꾸미는 것에는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고, 무난하기만 하면 최고 아닌가? 하는 성격인 지원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듯 하연을
회색빛의 찌뿌둥한 하늘.지들끼리 어깨동무하며 가득 뭉친 구름이 제 몸을 슬슬슬 잘라내는 중이다.주르륵 주르륵 잠시간의 멈춤도 없이 내리는 비.비 덕분에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베란다에 널어놓은 티셔츠는 여전히 눅눅했고, 수건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회색빛 구름들이 하늘을 덮었고, 바람은 하늘의 실수처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창문을 열자니 비가 오고,닫자니 빨래 때문에 습하고..이를 어찌해야한다는 말인가.."노트 한 장을 찢어 종이 부채를 만든 뒤안타까운 얼굴로 베란다 앞에 앉아 혼자 진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