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명희는 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항상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걸까?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도윤과의 통화를 끊자마자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내던졌다. 푹신한 이불 위에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휴대전화는 두어 번 튕겨 올랐다가 멈췄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져 망가지지는 않았다.
강명희가 나를 험담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이 결혼 생활이 더욱 지긋지긋해졌다.
그 여자는 내가 유리처럼 부유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를 염치없는 여자 취급하는 걸까?
그럼 그 여자가 그토록 아끼는 아들은 어떤데? 강도윤이라고 해서 뭐가 그렇게 떳떳하다는 거지? 오히려 세상에 둘도 없는 위선자에 가까운 인간이면서.
도윤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의 가족들에게 온갖 모욕을 참아 왔다. 도윤이 그 모든 일을 정말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저 내가 몇 번이고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유리 이야기는 꺼내기도 싫었다.
그 여자는 학식 있고 우아한 척하며 돌아다니지만, 그건 전부 가면에 불과했다. 가면을 벗겨 보면 그 안에는 교활하고 악의적인 본성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직 나에게뿐이었다. 도윤이나 그의 가족들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유리는 굳이 내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 여자에게 나는 도윤의 사랑과 관심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일 뿐이니까.
유리가 본색을 드러낸 순간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도윤에게 직접 만든 점심을 가져다주려고 회사에 깜짝 방문한 적이 있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유리는 도윤의 책상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이게 뭐야? 이제 와서 내조하는 아내라도 된 척하는 거야?”
유리는 내 손에 들린 정성스럽게 포장한 도시락을 힐끗 쳐다보며 비웃었다.
“빌은 보통 밖에서 먹는 걸 더 좋아하거든. 제대로 된 셰프가 요리하는 곳에서 말이야.”
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가끔은 집에서 만든 음식도 괜찮을 것 같아서.”
유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빌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면야. 그런데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이 고급 샐러드나 와규 스테이크를 두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음식으로 바꾸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네.”
나는 도시락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못된 말에 당장이라도 유리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도윤의 회사였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도윤에게 좋을 게 없었다. 나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유리를 모른 척하며 도시락을 도윤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에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 같아 어쩐지 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녀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
가장 서글픈 건 이런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봤자, 사람들은 내가 유리를 질투한다고 생각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한 아내일 뿐이니까.
이제 더는 다른 사람들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도윤이 우리 결혼 생활보다 일과 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
나는 이제 그만두겠다.
나는 서둘러 여행 가방을 꺼내 내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장을 가득 채운 명품 드레스와 고급 액세서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윤과 함께 참석했던 수많은 화려한 행사에 입고 가려고 마련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바라보니 그것들은 더 이상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어울리지 않는 삶을 연기하기 위해 걸쳤던 의상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기로 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다 보니, 이 화려하지만 텅 빈 공간에서 진정으로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게 얼마나 적은지 새삼 깨달았다.
옷을 접어 가방에 넣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도윤은 내게 개인적인 선물을 거의 해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선물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내게 건넨 것이라고는 플래티넘 신용카드 한 장뿐이었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껏 써.'
짐을 다 챙긴 뒤, 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예전에 살던 집의 집주인, 그레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여보세요, 그레이스. 저 지안이에요. 혹시…… 제가 예전에 살던 집이 아직 비어 있나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레이스는 반갑고도 놀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지안이구나! 응, 아직 비어 있긴 해. 그런데…… 지금은 훨씬 좋은 집들도 있어. 너처럼 잘사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말이야.”
그녀가 억만장자의 아내가 된 내 처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내가 벗어나려는 게 바로 그런 삶이었다.
“아니에요, 그레이스. 저는 예전에 살던 그 집이 좋아요. 지금 제게 필요한 곳은 거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래, 네가 정말 원한다면 그 집은 네 거야.”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그레이스.”
택시에 앉아 부촌을 벗어나자, 창밖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잘 정돈된 웅장한 저택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소박하고 작은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점점 활기를 띠었고, 화려한 명품 매장 대신 자그마한 가게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의 분위기도 달라 보였다.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호화로운 삶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때 내가 알던 삶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예전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그레이스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자, 여기가 네가 살던 집이야. 어때?”
나는 익숙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억보다 조금 좁아진 것 같았지만, 어딘가 포근하고 편안했다. 벽을 바라보자 단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나는 기분 좋은 안도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화려한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내게 꼭 맞는 공간이었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집 안을 둘러보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천장의 금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소파도 전보다 조금 낡아 있었다. 내가 쓰던 것이 아닌 물건들도 보였다. 커튼은 바뀌어 있었고, 책장에는 새로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내가 떠난 뒤로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옛집에 짐을 풀고 나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였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번호로 전화를 걸고, 상대방이 받기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마르케스 앤 가르시아 법률사무소인가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상담 직원이 전문적이고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을 말을 꺼냈다.
“이혼 서류 작성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냥 태준 씨와 저녁 한 끼 먹는 것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그저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처음에는 짙은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 주는 완벽한 핏에, 적당히 과감한 네크라인까지. 태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문득 망설여졌다.‘너무 과한가?’결국 그 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입을 수 있는 익숙한 블랙 원피스와 가장 좋아하는 하이힐을 골랐다. 세련되면서도 저녁 내내 신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신발이었다.나는 태준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면서 도대체 언제쯤 올지 궁금해했다.또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태준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도착했어요.]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드디어 왔구나.문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빠르게 뛰었다.눈앞에 선 태준 씨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 보이던 거뭇한 수염 자국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덕분에 턱선이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정장까지 완벽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우디 향이 풍겼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와, 지안 씨. 정말 예쁘네요.”태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덩달아 반짝였다.“고마워요, 태준 씨. 와, 태준 씨도 정말 멋있으신데요?”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그럼 출발할까요?”태준 씨가 물었다.나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그제야 회의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도윤아,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정말이에요. 오히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두 사람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사실 이혼이 최종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클레어 고모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굳이 부정할 필요 없어, 도윤아. 네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잖니.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당연하지.”나는 고모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 결혼 생활이 대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때 클레어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그러고 보니 유리는 아직 혼자라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이 지내 보는 건 어떠니?”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유리는 줄곧 너만 기다려 온 것 같더구나. 이제는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와 연애할 때도 됐지.”“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와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그보다 어머니, 파인먼-웹스터 합병 건이나 이야기하죠. 조만간 성사될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사업 이야기로 돌렸다.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가 내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지냈다.평소보다 훨씬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금융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안서도 준비했다. 바쁘게 지내는 것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 버리고 싶었다.이혼한 뒤로 지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건 지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통화 중이었다.설마 벌써 다른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건가?요즘 지안의 태도를 생각하면 유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태준 삼촌이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안이 이렇게 빨리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3년의 결혼 생활이 지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퇴원할 때만 해도 나는 지안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반쯤 기대했다. 이혼하겠다는 생각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나는 지안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니까.하지만 집에 돌아온 내게 변호사가 전한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지안은 결국 이혼을 진행했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내가 병원에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안은 내게 관계를 되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벌써부터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비웃으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내를 떠난 게 아니라 아내에게 차인 패배자.사람들은 분명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지안은 이혼이 내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내 체면과 지위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비서에게 듣기로 지안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시절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했다.나도 아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지안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피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것만 같았다.이제야 지안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음식 하나도 예전 같지 않았
나는 몇 분 동안 휴대전화만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도윤 씨가 지금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왜 그러니, 딸? 누가 전화했어?”“아, 그냥 친구 스티비야. 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나 봐.”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도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화를 다시 돋우는 건 지금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말했다.“엄마, 아빠.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 방에서 잠깐 쉬어도 될까?”“그럼, 당연하지. 푹 쉬렴.”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해 줘서 고마워. 정말 맛있었어.”계단을 올라가는데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아, 진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혼 관련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도윤 씨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방에 들어서자 옛 추억이 밀려왔다.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붙여 놓았던 포스터와 사진들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십 대 시절 사용하던 낡은 이불까지 그대로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책장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이며 자잘한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대학에 진학한 뒤로도 엄마가 줄곧 내 방을 관리해 주신 게 분명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도윤 씨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 봤다.[전화 좀 받아 줄래? 중요한 일이야. 고마워.]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부탁 좀 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도윤 씨가 이런 문자도 보낼 줄 아네. 이혼하고 나서 예의라도 좀 배웠나 보지.’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곧
아빠는 내 질문에 눈을 반짝였다.“글쎄, 엄마가 정원을 정말 멋지게 가꿔 놨단다. 요리 실력도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지.”아빠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매주 나랑 에어로빅 수업도 듣고 있어. 덕분에 아직 젊게 살고 있지.”엄마가 웃으며 거들었다.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컨설팅 일도 몇 건 맡고 있어. 너무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그래도 이제 은퇴했으니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단다.”“그럼 우리 딸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엄마가 물었다.“아, 별일 없어. 그냥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안아,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아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도윤 씨는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우리 이혼했어.”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이고, 우리 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마음 아프네.”엄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그 순간 아빠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 위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그래,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와서 들려주는 소식이 이혼이라니!”“아빠, 진정해.”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화낼 필요 없어.”“그래도 우린 네가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니?”아빠가 속상한 듯 말했다.“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야.”아빠는 원래부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빠 성격을 생각
서지안의 시점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스티비는 내가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 원하면 내가 머리카락 잡아 줄게.”스티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이제는 꽤 익숙하거든.”나는 대답했다.구토를 마친 뒤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스티비가 임신 사실을 숨긴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였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스티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스티비, 너 울어?”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스티비는 나를 살짝 놓아주며 웃었다.“당연히 울지, 이 바보야! 내가 이모가 된다잖아!”“아니면 우리 아기의 대모가 되어 줄래?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우리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거든.”내 말에 스티비가 활짝 웃었다.“그거 정말 좋다!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네 아기의 대모가 되는 게 좋다는 뜻이야.”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비가 물었다.“잠깐, 도윤 씨는 네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나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말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 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난 좋아.”스티비는 흔쾌히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 둬. 네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우리 미래의 아기 대모가 되어 줄 사람으로서 말이야!”나는 기차를 타고 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가 함께 살던 옛집도 둘러볼 생각이었다.대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옛집을 바라보았다.집은 대체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작은 변화가 있긴 했다. 현관문의 색이 조금 달라졌고, 창문에는 새 덧문이 달려 있었다.나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손가락을 버튼 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올려 둔 채 망설였다.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