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르케스 변호사와 통화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이메일을 확인하자 변호사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메일을 열었다.
‘이혼 절차: 초기 서류’
나는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제야 도윤도 내가 정말 이혼할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겠네.”
방금 출력한 이혼 서류를 집어 들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택시를 불렀다. 문을 잠그는 손이 살짝 떨렸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나는 서류를 꼭 움켜쥔 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도윤의 회사 건물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로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천장에 설치된 현대적인 조명에서는 은은한 빛이 쏟아졌다. 짙은 색 목재와 유리로 만들어진 웅장한 안내 데스크 뒤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 다시 발을 들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긴, 도윤은 내가 회사에 찾아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노부부에게 시선이 갔다. 두 사람은 무척 즐거운 듯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빌의 발표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실적도 훌륭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아주 유망하더군요.”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러게요. 함께 있던 여성분도 제안서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더군요. 똑똑한 데다 미인이기도 하고요.”
남자가 맞장구쳤다.
“빌의 아내인가 봐요.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리더군요. 꼭 예전에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아요, 조지?”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내?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여기 있는데, 도윤이 어떻게 아내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는 거지?
잠깐, 혹시 다른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인가?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도윤을 찾아가 직접 확인해야 했다.
나는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예전에 몇 번 방문했을 때 보았던 직원은 아니었다. 새로 온 듯한 여직원은 내가 다가가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어딘가 퉁명스러웠다.
“실례합니다. 강도윤 씨 계신가요?”
내가 묻자 안내 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내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윤 대표님과 약속은 있으신가요?”
“아뇨. 하지만 저는 그 사람 아내예요.”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안내 직원의 무례한 태도에 생각보다 더 신경이 거슬렸다.
그녀가 비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몸을 돌려 도윤의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안내 직원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무릎도 꽤 괜찮았다. 뒤에서 보안 요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도윤을 만나는 것뿐이었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보안 요원들을 피해 서둘러 가던 중, 도윤의 비서 사라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늘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던 사람이었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
사라는 내가 왜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도윤이는 어디 있죠? 꼭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내가 사라에게 더 설명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뒤를 쫓아오는 보안 요원 두 명을 발견했다. 사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분이 우리 대표님 사모님인 거 몰라요? 잘리고 싶어요?”
보안 요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한 명이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저희가 미처 몰랐습니다.”
다른 한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가 대표님께 두 분이 한 일을 말씀드리기 전에 어서 가세요.”
보안 요원들은 더욱 난처해진 얼굴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사라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정말 죄송해요.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사라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사과한 뒤 덧붙였다.
“아무튼 남편분은 지금 회의실에 계세요.”
“고마워요, 사라.”
나는 짧게 인사하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안쪽에서 들려오는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 로비에서 들었던 노부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유리를 도윤의 아내로 착각했던 것이다.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서류를 꽉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나는 노크도 하지 않고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발표를 이어 가던 유리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지안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제야 회의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다들 내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도윤은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 도윤이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급한 일이에요.”
유리는 회의실 안을 한번 둘러본 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인 거 아시잖아요.”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도윤의 아내, 서지안입니다.”
내 소개가 끝나자 회의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강 대표님의 아내라고? 난 한유리 씨가 아내인 줄 알았는데.”
“잘못 들으신 게 아니에요. 제가 강도윤의 아내예요. 한유리 씨가 아니라요.”
나는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듯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 도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무언가 말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도윤은 그저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도윤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마치 내가 아니라 유리가 네 아내였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 순간 도윤이 벌떡 일어나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몸을 가까이 기울이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여기서 이러지 마, 지안아. 사람들 앞에서 나 망신 주지 말고.”
그는 나를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팔을 뿌리쳤다.
바로 그때, 커피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오던 사라가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사라와 부딪혔고, 그녀가 들고 있던 커피가 그대로 내 몸 위로 쏟아졌다.
셔츠 너머로 뜨거운 커피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다.
“어머나! 괜찮으세요?”
유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서둘러 내게 다가와 가방에서 휴지를 꺼냈다. 커피가 묻은 곳을 닦아 주려고 했지만,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휴지로는 해결되지 않겠다고 판단했는지 유리가 말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어요. 휴게실로 가서 제대로 닦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는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덧붙였다.
“여러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죠.”
나는 유리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걸어가면서 문득 예전에 있었던 저녁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사람들 앞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 중심에는 늘 유리가 있었다.
정말이지, 이제는 그 여자의 짓거리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냥 태준 씨와 저녁 한 끼 먹는 것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그저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처음에는 짙은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 주는 완벽한 핏에, 적당히 과감한 네크라인까지. 태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문득 망설여졌다.‘너무 과한가?’결국 그 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입을 수 있는 익숙한 블랙 원피스와 가장 좋아하는 하이힐을 골랐다. 세련되면서도 저녁 내내 신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신발이었다.나는 태준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면서 도대체 언제쯤 올지 궁금해했다.또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태준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도착했어요.]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드디어 왔구나.문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빠르게 뛰었다.눈앞에 선 태준 씨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 보이던 거뭇한 수염 자국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덕분에 턱선이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정장까지 완벽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우디 향이 풍겼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와, 지안 씨. 정말 예쁘네요.”태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덩달아 반짝였다.“고마워요, 태준 씨. 와, 태준 씨도 정말 멋있으신데요?”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그럼 출발할까요?”태준 씨가 물었다.나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그제야 회의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도윤아,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정말이에요. 오히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두 사람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사실 이혼이 최종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클레어 고모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굳이 부정할 필요 없어, 도윤아. 네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잖니.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당연하지.”나는 고모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 결혼 생활이 대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때 클레어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그러고 보니 유리는 아직 혼자라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이 지내 보는 건 어떠니?”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유리는 줄곧 너만 기다려 온 것 같더구나. 이제는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와 연애할 때도 됐지.”“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와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그보다 어머니, 파인먼-웹스터 합병 건이나 이야기하죠. 조만간 성사될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사업 이야기로 돌렸다.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가 내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지냈다.평소보다 훨씬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금융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안서도 준비했다. 바쁘게 지내는 것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 버리고 싶었다.이혼한 뒤로 지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건 지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통화 중이었다.설마 벌써 다른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건가?요즘 지안의 태도를 생각하면 유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태준 삼촌이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안이 이렇게 빨리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3년의 결혼 생활이 지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퇴원할 때만 해도 나는 지안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반쯤 기대했다. 이혼하겠다는 생각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나는 지안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니까.하지만 집에 돌아온 내게 변호사가 전한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지안은 결국 이혼을 진행했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내가 병원에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안은 내게 관계를 되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벌써부터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비웃으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내를 떠난 게 아니라 아내에게 차인 패배자.사람들은 분명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지안은 이혼이 내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내 체면과 지위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비서에게 듣기로 지안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시절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했다.나도 아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지안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피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것만 같았다.이제야 지안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음식 하나도 예전 같지 않았
나는 몇 분 동안 휴대전화만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도윤 씨가 지금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왜 그러니, 딸? 누가 전화했어?”“아, 그냥 친구 스티비야. 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나 봐.”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도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화를 다시 돋우는 건 지금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말했다.“엄마, 아빠.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 방에서 잠깐 쉬어도 될까?”“그럼, 당연하지. 푹 쉬렴.”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해 줘서 고마워. 정말 맛있었어.”계단을 올라가는데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아, 진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혼 관련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도윤 씨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방에 들어서자 옛 추억이 밀려왔다.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붙여 놓았던 포스터와 사진들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십 대 시절 사용하던 낡은 이불까지 그대로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책장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이며 자잘한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대학에 진학한 뒤로도 엄마가 줄곧 내 방을 관리해 주신 게 분명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도윤 씨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 봤다.[전화 좀 받아 줄래? 중요한 일이야. 고마워.]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부탁 좀 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도윤 씨가 이런 문자도 보낼 줄 아네. 이혼하고 나서 예의라도 좀 배웠나 보지.’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곧
아빠는 내 질문에 눈을 반짝였다.“글쎄, 엄마가 정원을 정말 멋지게 가꿔 놨단다. 요리 실력도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지.”아빠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매주 나랑 에어로빅 수업도 듣고 있어. 덕분에 아직 젊게 살고 있지.”엄마가 웃으며 거들었다.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컨설팅 일도 몇 건 맡고 있어. 너무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그래도 이제 은퇴했으니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단다.”“그럼 우리 딸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엄마가 물었다.“아, 별일 없어. 그냥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안아,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아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도윤 씨는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우리 이혼했어.”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이고, 우리 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마음 아프네.”엄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그 순간 아빠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 위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그래,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와서 들려주는 소식이 이혼이라니!”“아빠, 진정해.”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화낼 필요 없어.”“그래도 우린 네가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니?”아빠가 속상한 듯 말했다.“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야.”아빠는 원래부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빠 성격을 생각
서지안의 시점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스티비는 내가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 원하면 내가 머리카락 잡아 줄게.”스티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이제는 꽤 익숙하거든.”나는 대답했다.구토를 마친 뒤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스티비가 임신 사실을 숨긴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였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스티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스티비, 너 울어?”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스티비는 나를 살짝 놓아주며 웃었다.“당연히 울지, 이 바보야! 내가 이모가 된다잖아!”“아니면 우리 아기의 대모가 되어 줄래?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우리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거든.”내 말에 스티비가 활짝 웃었다.“그거 정말 좋다!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네 아기의 대모가 되는 게 좋다는 뜻이야.”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비가 물었다.“잠깐, 도윤 씨는 네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나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말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 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난 좋아.”스티비는 흔쾌히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 둬. 네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우리 미래의 아기 대모가 되어 줄 사람으로서 말이야!”나는 기차를 타고 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가 함께 살던 옛집도 둘러볼 생각이었다.대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옛집을 바라보았다.집은 대체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작은 변화가 있긴 했다. 현관문의 색이 조금 달라졌고, 창문에는 새 덧문이 달려 있었다.나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손가락을 버튼 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올려 둔 채 망설였다.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