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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찹쌀몽
나에게 뭔가 더 모진 말을 말하려던 엄마는, 내 말을 들은 순간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엄마와 함께 나에게 벌컥 화를 내려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나였다면 때려죽인다 해도 절대 이혼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의 뜻밖의 반응에 놀라 충격에 빠진 부모님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서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굳이 병원으로 가서 사과하라는 말씀은 사양할게요. 심사언이 이혼 서류를 준비하는 대로, 변호사 통해서 저한테 보내주면 될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해진 이불은 답답하고 무거웠다.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지금부터 이어질 부모님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내 부모님은 내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내 태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금세 파악했다.

심사언과 이혼하겠다는 내 생각은 이번만큼은 진짜였다.

상황 판단이 끝난 순간, 부모님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그래, 우리 딸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 푹 쉬어. 움직이기 싫으면 가만히 누워 있어도 돼. 엄마가 주미 아주머니를 불러서 너를 잘 돌보라고 할게. 우리 딸은 그냥 쉬기만 하면 돼.”

아빠는 나지막이 웃으며, 내 머리맡에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 카드에 돈 천만 원이 들어 있단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마음껏 써도 좋아. 부족하면 언제든 아빠한테 말하고. 우리 딸, 아직 젊잖아. 몸부터 잘 회복하면, 너에게 좋은 날은 그때부터 시작될 거야.”

부모님은 몇 마디를 더 덧붙이고는 내가 다른 소리를 할까 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부모님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걸 확인한 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예전에도 그랬어.’

‘항상 소아연한테 내 모든 걸 양보하고 나면, 엄마 아빠는 늘 나한테 다정하게 했었어.’

‘어쩌면, 지금 당장 소아연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고 싶었겠지.’

‘...’

나는 침대 머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따뜻한 히터 바람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찬물을 두 바가지나 뒤집어 쓰고 완전히 젖어버린 상태로 어쩔 수 없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내 몸을 녹이려면 따뜻한 물로 씻어야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어가는 것도 힘들었다.

예전에는 샤워를 마친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이 제일 좋았다.

내가 봐도 내 얼굴은 너무 예뻤으니까.

피부도 뽀얗고,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때로는 내가 나를 보고 깨물어주고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차마 거울로 비춰볼 자신이 없었다.

실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폭격 맞은 폐허’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내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

청산빌라 101동.

무표정한 심사언은 거실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당겨 헐겁게 했다.

남자의 날카로운 이목구비 위로 피로가 가득 서려 있었다.

소아연은 원래부터 몸이 약해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밤새 숙면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를 돌보느라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심사언은, 어젯밤도 꼬박 새운 탓에 두통이 밀려왔다.

게다가 어젯밤, 그는 술집에서 술만 잔뜩 마셨을 뿐,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해 속이 점점 쓰렸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익숙한 듯 말했다.

“고이설, 위장약 어디 있어? 가져와.”

“그리고... 속에 부담 안 가게 죽 좀 끓여 줘. 위가 아파.”

예전 같았으면, 심사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달려가 남편의 넥타이를 풀어주고,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건네고, 그의 컨디션을 살폈을 것이었다.

남편이 귀찮다는 듯 나를 밀어낼 때까지, 남편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지만 오늘은, 심사언이 말을 꺼낸 후에도 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상해...’

심사언의 미간이 더 깊게 좁혀졌다.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한층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고이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마침 주방에서 가사도우미 왕자현이 걸어 나왔다.

심사언은 왕자현을 보자 곧장 물었다.

“집사람은요? 집에 없어요?”

왕자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모님이 집을 나간 지가 벌써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저런 질문을 던지다니... 대표님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자기 아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실까?’

그러다 결국, 왕자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모님은 석 달째 집에 안 들어오고 계십니다.”

심사언의 손끝이 미묘하게 움찔했다.

‘고이설이 퇴원하고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석 달 내내 연락도 없이?’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젯밤, 내가 심사언과 소아연의 앞날을 축복해 주고, 그토록 강하게 이혼을 고집했던 장면이 떠오르자 심사언은 순간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고이설, 정말 이혼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네.’

‘마치,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듯이. ‘

심사언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시네.’

‘이혼? 고이설은 그럴 리가 없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뚜-

뚜-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상해. 연락을 피하는 건가?’

이번엔 심사언이 나한테 톡을 보냈다.

[고이설, 전화 받아.]

하지만, ‘1’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메시지가 읽히지 않았다.

순간, 심사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봐도 여전히 ‘1’은 그대로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고이설... 톡에서 나를 차단한 거야?!’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왕자현이 한참을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아무리 늦어도 항상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석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죠.”

“혹시, 사모님께 너무 큰 상처를 주신 건 아닙니까?”

심사언은 말이 없었다.

왕자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모님은요... 대표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어요.”

“사모님이 기다리시던 모습을 저는 늘 지켜봤고요.”

“대표님이 한 번이라도 돌아봐 주시길, 한 번이라도 자신을 선택해 주시길 바라셨어요.”

“그런데요... 여자의 마음이란 한 번 완전히 부서지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라도 사모님을 붙잡아야 해요. 안 그러면... 정말, 다시는 안 돌아오실지도 모릅니다.”

왕자현은 내가 견뎌온 시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모님은, 정말이지... 너무, 너무 안쓰러운 사람이었어요.”

심사언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어 들고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그의 움직임을 본 왕자현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혹시 사모님을 모시러 가시는 건가요?

“밖에서 식사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제가 로맨틱한 프렌치 디너를 준비해 드릴까요?”

하지만 심사언은 비웃듯 짧게 대꾸했다.

“내가 그 사람을 데리러 간다고요?”

“네, 네! 사모님 모시러 가시는 거죠?”

왕자현이 맞장구치려던 찰나, 심사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럴 시간 없어요.”

‘고이설이 설마 평생 집에 안 돌아오기야 하겠어?’

‘어차피, 충분히 시간을 끌고 나면, 본인이 알아서 돌아올 거야.’

‘그만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

나는 부모님의 조급한 모습, 심사언과 소아연의 다정한 관계까지 고려해서, 이혼 서류가 금방이라도 도착할 줄 알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심사언에게서 이혼 서류는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변호사를 불러 직접 이혼 서류를 작성했다.

심사언의 연락처를 차단 해제한 후, 서류를 심사언에게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일까지 이혼할 의향이 있다면, 조건 협의는 가능해. 당신이 원하는 거, 내가 일부는 양보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이혼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재산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 정도야 당연히 감수할 수 있었다.

한 주 내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간신히 자리에 앉아 쉴 수 있었던 심사언은, 나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는 메시지를 열어보기 전,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돌아올 생각인 건가?”

“결국, 용서받고 싶어졌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를 열었는데, 그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이혼 서류였다.

내가 직접 작성한, 굉장히 상세하고 신중하게 정리된 이혼 서류였다.

“고이설, 진심이야?”

그는 불쾌하게 혀를 찼다.

“이혼에 이렇게까지 진심이었다고?”

심사언은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네가 감히, 진짜로 나를 떠날 생각을 했다고?’

‘내가 이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옆에서 송주혁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심사언의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았다.

“이혼 서류?”

송주혁은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심사언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치우며 짧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심사언의 손끝은 은근히 흔들리고 있었다.

‘고이설, 이번엔 좀 심한데?’

‘너무 오래 끌었고, 너무 과했어.’

그걸 느낀 송주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 여자한테는 어느 정도 명분이 필요한 거야.”

“형수님이 원하는 건 그냥 형이 먼저 손 내미는 것뿐일 수도 있어.”

“형, 부상훈 알지? 걔 옆에 한동안 붙어 있던 조용한 애 있었잖아. 부상훈이 시키면 뭐든 다 하고, 어떻게 대하든 절대 떠나지 않았던 애.”

“그래서 부상훈도 당연히 그 여자가 떠날 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얼마 전 그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렸다고 하더라.”

“부상훈은, 결혼식장까지 가서 눈이 퉁퉁 붓도록 펑펑 울었는데도, 그 여자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대.”

“형, 여자는 말이야. 한 번 완전히 지쳐버리면, 그땐 진짜 돌아오지 않아.”

그 말에, 심사언은 왕자현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여자의 마음이 한 번 완전히 부서지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그 말을.

순간,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한 잔, 또 한 잔...

폭탄주를 더 연거푸 들이켰다.

술이 점점 그의 의식을 마비시킬 즈음, 심사언은 문득 송주혁의 말이 조금은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자는 가끔 남자가 내미는 손을 기다리기도 해.’

‘고이설도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술기운을 빌려 내 집으로 향했다.

사실, 심사언은 내가 퇴원한 후,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단지 내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

심사언에게 이혼 서류를 보내고 난 후,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그의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던져진 돌처럼, 그 어떤 회신도 없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린 것 같았다.

‘대체 뭐야?’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그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끝내고 싶었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심사언에게 전화를 걸어버릴 것 같았다.

덜컥-

그 순간, 누군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심사언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순간 굳어졌다.

‘분명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지?’

‘그리고,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인데, 왜 자기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온 거지? 대체 뭘 하러?’

내가 심사언에게 연락하려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취해서 정신없는 개처럼 내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지금 내 현재 상태는 이 사람을 그냥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그리고 이 사람이 나간 뒤, 집 안을 소독제로 싹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딴 걸 신경 써야 해?’

그때, 구명인이 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수, 뭐 해? 형이 이렇게 취했는데, 당연히 와서 부축해야지!”

이런 말투는 마치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리고 비웃듯 덧붙였다.

“이래서 형이 형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있으면서, 결국 형 마음을 못 얻은 이유가 뭐겠어?”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이제 형을 챙기는 것도 안 하면, 살아서 뭐 해?”

‘뭐라고?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선 넘네!’

예전의 내가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구명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읊조렸다.

“내가 살아서 뭐 하냐고?”

그 순간, 구명인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형수,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사는 이유? 너의 그 개 같은 목숨쯤은 손쉽게 날릴 수 있다는 자신감?”

구명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대꾸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가 황급히 되물었다.

“형수, 내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감히 나한테 그렇게...”

나는 구명인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더 차갑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네 아버지 구명산, 그 사람이 나를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잔 들고 비굴하게 인사하는 걸 모르는 모양이네?”

“그런데 네가 뭐라고 나한테 그 따위 말을 해?”

“넌 집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일 뿐이잖아.”

“내가 왜 너 따위를 겁내야 하지?”

구명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바로 ‘사생아’였다.

나는 구명인의 가장 큰 약점을 대놓고 들춰냈다.

“형... 형수...”

구명인은 더듬거렸다.

“나는 형의 가장 친한 친구야!”

“형, 형수가 이렇게 나오면, 형이 진짜로 형수 버릴지도 몰라!”

‘우습지도 않아.’

나는 피식 비웃듯 한숨을 쉬었다.

“심사언? 그딴 놈은 이미 내 안중에 없어.”

“그 개 같은 놈이든, 그 개 같은 놈 옆에 붙어 있는 놈들이든.”

“다 필요 없어. 그러니,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1분 줄게. 그 취한 개자식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야. 불법 침입으로 신고해 버릴 거라고.”

내 말에, 방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구명인은 나를 노려봤다.

“고이설, 진짜 미쳤...”

“그만해.”

그 순간, 송주혁이 나섰다.

그는 한숨을 쉬며 구명인의 팔을 잡았다.

“명인아, 너도 취했으니까 그만하고 가자.”

그 후,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형수님, 명인이가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어요. 방금 한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형은 저희가 여기까지 잘 모셔다드렸으니까, 이제는 형수님께서 형을 좀 챙겨주세요.”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구명인을 끌고 나갔다.

나는 송주혁이 재빠르게 자리를 정리하는 걸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네.’

하지만, 떠나는 녀석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둠 속에 남겨진 심사언이었다.

나는 불쾌한 얼굴로 잔뜩 눈을 찌푸렸다.

‘이 사람, 진짜 경찰을 불러서 쫓아내 버릴까?’

‘아냐, 아직 이혼 문제 논의가 끝나지 않았잖아.’

‘만약 지금 당장 이 사람을 경찰에 넘기면, 이혼 협의가 더 복잡해질 게 뻔해...’

나는 심사언을 하루만 더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그가 술에서 깨는 대로 깨끗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 더럽게 찝찝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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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언은 내가 갑자기 그와 소아연을 이어주려는 듯한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쾌하게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랑 아연이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왜 자꾸 나랑 아연이를 엮는 건데?”‘왜냐하면, 당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애니까.’‘그렇게까지 아끼고 지키는 모습이, 도대체 사랑이 아니면 뭔데?’‘우리 엄마 말대로, 사랑에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면, 이 세상에 다시 시작할 사랑은 하나도 없지. 옛날 황제도 새어머니랑 결혼했다는데, 너는 왜 못 해?’‘나더러 사과하라느니, 차라리 소아연이랑 결혼하는 게 더 확실하게 그 애를 구해주는 길일 텐데.’하지만 이 말들은, 다 속으로만 말했고, 딱히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사언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소아연을 향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나를 향한 모든 폭력과 모욕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믿는 사람이니까.나는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선을 돌려 동행 중인 여경에게 면회를 종료하겠다고 전했다.내가 단 한 마디의 미련도 없이 돌아서자, 심사언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곧 분노했다.“이렇게까지 날 밀어내면... 이제 방법 없어. 이젠 기회도, 없다고.”그 목소리는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심사언을 등진 채 조용히 발을 옮겼다.쾅!그 순간, 내 등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심사언이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였다. 건물이 울릴 만큼의 파열음.‘그 한 방에 얼마나 힘을 줬을지 안 봐도 뻔해.’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심사언이 어떤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았다.그리고 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기준 변호사가 도착했다.엄기준은 원래 심사언이 나한테 소개한 미디어 콘텐츠 회사의 법률 자문이었다. 그 회사를 통해 처음 엄기준을 만났을 땐, 이 사람의 일 처리 능력과 성품

  • 쌍둥이의 백일, 전남편은 눈이 붉어졌다   제97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심사언이 말한 내가 소아연을 해친 ‘그 일’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누굴 해치거나, 도덕적으로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내가 계속 물었다. “심사언, 우리는 8년이나 알고 지냈어. 사귄 건 7년이고.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됨됨이를 믿어주지 않았어.” “누가 영상 하나 들이밀자, 아무 확인도 없이,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지. 그걸 보고 ‘이설이가 그랬을 거야’라고 확신했잖아.”“그렇게 쉽게, 나를 믿는 대신 의심을 택했던 사람이 나를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있긴 해?”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턱선을 따라 식은땀이 난 손을 올려 와이셔츠의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그러고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 터지고 나서 남 탓부터 하는 사람치고, 진짜 억울한 사람 없더라.”“그래, 평소엔 당신도 참 괜찮았어. 법 어기는 일도 안 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 적도 없지. 근데 그게... 아연이한테까지 그랬다는 보장은 없잖아.”“아연이가 너희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당신은 줄곧 의식했잖아.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느꼈고, 그래서 계속 견제하고, 무시하고...”“당신은 부모님의 친딸이고, 형님과도 핏줄이 이어진 진짜 가족이야.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도 자기편에 안 서는지, 그 이유를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물어본 적 있어?”“정말 아무 잘못도 없었다면, 왜 다들 당신보다 아연이를 더 아끼고, 감싸고, 믿을까?”“인정할 건 인정해. 당신 질투가 너무 심했어. 아연이가 잘되는 게 보기 싫었고, 그래서 결국 아연이에게 상처를 준 거니까.”“그때는 당신도 너무 어렸고, 또 나를 너무 사랑했으니까, 불안했겠지. 아연이가 날 빼앗아갈까 봐.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어.”“근데, 괜찮아.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면 돼. 아연이한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우리 그냥... 다 덮고 다시 시작하자.”“아연이도 말했어. 정말 당신이 사과하기

  • 쌍둥이의 백일, 전남편은 눈이 붉어졌다   제96화

    다음 날 아침, 구치소 직원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가 있다는 말에 나는 당연히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준비해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심사언이었다.심사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가엔 온통 핏줄이 터져 있었고, 밤새 단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구치소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밤을 보낸 나보다도 더 초라해 보였다.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룻밤 지났으니까, 이제 생각 좀 정리됐지?” “지금이라도 늦지 았았어. 사과해.”그 말에 나는 불쑥 예전 그 말이 떠올랐다.“3개월이나 반성했으면, 이제는 좀 깨달아야지.”‘정말... 어이가 없네...’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놓고도, 이 모든 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사람이야.’‘계속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네. 나를 위해 참아줬다고, 다 날 위해서라고.’그 말들이 머릿속에 다시 울리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심사언, 혹시 진짜 나 죽이고 홀아비 돼서 재산 독차지하려는 거 아니야?”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어.” “어제 그 말은, 진짜 아연이 시선을 돌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어. 그 틈에 널 구하려고 했다고.”“당신이 여기서 하루 있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내가 어떻게 당신이 죽길 바랄 수가 있겠어...”그는 연신 되풀이했다. 죽게 할 마음은 없었다고,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그러니까, 당신 지금도 날 사랑하고, 내가 감옥에 가는 걸 원하지 않고, 그 모든 게 날 위한 결정이었단 거지? 사과하라는 것도?”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당연하지.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역겨워.”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 쌍둥이의 백일, 전남편은 눈이 붉어졌다   제95화

    엄마의 눈빛은 잠시나마 흔들렸다. 그제야 문득 떠올린 듯했다. 내가 엄마가 열 달 동안 품에 안고 세상에 낳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딸’이라는 사실을.오빠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그 복잡함 속에 가장 도드라진 건 묘한 안도감이었다. 내가 구속되어 수년간 살아야 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생이 된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그 사실에... 속으로 안심하고 있었다.결국, 나를 감옥에 넣은 건 내 친부모, 피 한 방울 다르지 않은 오빠, 그리고... 함께한 지 8년이 넘은 남편이었다....구속된 이후, 나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좁은 생활실에 배정되었다. 누가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 틈. 그 시선들, 말 없는 분위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공포처럼 엄습했다.나도 처음부터 예상하긴 했다.소아연에게 맞서는 순간, 가족과 심사언이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심지어 심사언과 끝장을 볼 각오도 했고, 법정까지 가게 될 걸 알면서도 나는 담담히 맞설 준비를 했다.하지만... 단 한 번도, 내가 진짜 구속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태어날 때부터 법을 지키는 게 당연했고,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내가... 이 좁고 낯선 공간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순식간에 숨이 막혔다.그리고 정말 너무 무서웠다.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나가게 되면... 진짜 절에 찾아가서 절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불길한 징조였다.그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곧 침착함을 되찾고, 담당 변호사에게 연락을 시도했다.하지만 그 시간, 소아연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단순한 여론 조작을 넘어서, 내가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녀는 김은빈을 찾아가, 손에 하얀 꽃 한 송이를 쥔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설 언니...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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