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돌연 현수의 사고 회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경신이 주변을 둘러보다 미간을 좁히더니 닫혔던 입을 다시 열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고, 헤어진 태하 오빠와 왜 함께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하고는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
“그건 사고였어. 네가 신데렐라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어쩌다 보니 내가 널 쫓아가서 싸우게 된 것 뿐이야. 네가 뭐길래 잘난 척이야?”현수는 이 되바라진 어린 여대생의 코를 납작하게 밟아버리는 모습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철저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경신은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곡 받고 싶다고 했잖아.”
“곡?”현수는 멍청한 표정으로 경신을 응시했다.
“작곡가 T.K.에서 ‘K’. 그게 나야. 내가 멜로디를 쓰면, 태하 오빠가 편곡해서 악보로 옮겨 적
고백. 그 달콤하고 찬란해야 할 단어가 오늘 밤 경신에게는 짓눌리듯 무겁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창밖으로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만큼이나,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올랐다.경신의 눈앞에 태하가 있었다. 이 완벽한 남자에게, 경신은 지금 제 생애 가장 거대한 진실을 건네는 중이었다.이미 반지를 받았고, 서로의 체온을 깊이 나누었건만, 다음에 만났을 때 배가 불러온 자신을 마주한다면 태하가 느낄 충격은 얼마나 잔혹할 것인가.이번 생의 사랑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 경신은 그저 눈앞에 놓인 달콤한 온기를 온전히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오늘만 해도 태하는 경신을 위해 제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주막을 지켜주었다. 이 폭우를 뚫고 오직 그녀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남자인 데다, 불과 몇 시간 뒤면 다시 먼 길을 떠날 사람이기도 했다.반지를 건넨 여자의 몸속에 이미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고, 그 아이가 그의 핏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마땅히 털어놓아야 했다. 진작 꺼냈어야 할, 참으로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하지만 가장 늦었다고 절망할 때가 진실을 마주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경신은 떨리는 두 손을 아랫배 위에 가만히 얹었다. 뱃속의 아가들에게 조용히 용기를 빌린 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말문을 열었다.“태하 씨, 나는 지난 2월 28일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현생의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였어요. 오직 전생의 기억만 간직한 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마주했죠.”태하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경신의 다음 말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이 몸과 이 인생으로 살아온 시간은 제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아요.”경신은 그날 이후의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가만히 펼쳐놓았다. 태하에게 전할 단어를 고르며 깊은 숨을 삼켰다. 배 위에 얹은 손끝으로
에스트렐라는 마치 자신들의 단독 콘서트를 치르듯 30분 동안 무대를 치열하게 집어삼켰다.그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경신의 주막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번져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가 몰려들었다.거센 빗줄기는 여전했으나, 우산을 받쳐 든 채 멀리서나마 에스트렐라를 눈에 담으려는 학생들로 주막 일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그 덕에 축제 기간 내내 꾸역꾸역 쌓아 두었던 주막의 모든 재료가 기적처럼 전량 소진되었다.국어과 학생들은 본래 조를 짜서 당번제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인파에 비상 연락을 돌려 총출동할 수밖에 없었다.화야 역시 수학과 아이들을 대거 이끌고 나타나 서빙과 설거지를 자처하며 국어과 주막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폭풍 같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에야, 경신과 태하는 비로소 온전한 둘만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새벽 2시가 훌쩍 지나서야 주막의 천막이 굳게 닫혔다.쏟아지는 빗속이지만 우산을 쓰고 교정을 걸어가겠다는 경신의 제안을 태하는 부드럽게 만류했다.밤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혹여 피곤치 않을까 염려한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아 드라이브를 택했다.경신은 태하의 다정한 배려 속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과분하고 행복한 하루를 곱씹었다.“태하 씨, 꼭 제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축제를 맞이한 기분이었어요. 기적처럼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태하는 대답 대신 깊고 아늑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조용히 운동장 한편으로 굴렸다.마침 그곳은 과거 태하가 경신에게 반지를 건네며 다정하게 기타를 연주해 주었던, 둘만의 의미 깊은 장소였다.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나직한 엔진음과 함께 시동이 꺼졌다. 축제가 막을 내린 교정은 기
5월의 어느 봄날 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음악이 캠퍼스 곳곳으로 아스라이 퍼져나갔다.세상 어디에서도 연주된 적 없는, 오직 서로에게 깊이 마음을 나눈 이들만이 자아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선율이 울려 퍼졌다.사랑에 빠져 있다는 달콤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아름다운 음률이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교정을 아늑하게 메워갔다.건반을 누르고 기타줄을 튕기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단 한 순간도 멀어지지 않았다. 밀려드는 애틋함에 스며들듯, 둘은 호흡을 맞추며 멈춤 없이 연주를 이어갔다.국어과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오늘따라 유독 기묘한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듣는 이가 늘어날수록 찾는 발길은 더욱 분주해졌고, 빗속을 뚫고 퍼지는 음악 소리 또한 점점 청아하게 스케일을 키워갔다.경신과 태하가 둘만의 세계에 빠져 황홀한 2중주를 펼치는 동안, 주막 주변은 눈이 멀 만큼 화려하게 탈바꿈하는 중이었다.마호는 이미 봉선규를 비롯해 태하가 대동하고 온 전문 인력들과 함께 주막 주변을 완벽하게 정비했다.“봉 실장. 역시 태하의 스케일은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네.” “경신 양의 연주가 학교 전체에 더 웅장하게 울려 퍼지겠어요.”태하가 홍콩에서부터 수소문해 의뢰한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 전문가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앰프와 스피커에 꼼꼼한 방수 작업을 마친 그들이 경신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며 순식간에 시스템을 구축해 낸 것이다.전문가들의 손길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의 간이 앰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최고 사양의 음향 장비가 갖춰지자, 경신이 치던 곡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듯 한층 더 고아하고 웅장하게 대기를 울렸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형 방수 천막과 세련된 파라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관객들이
무대가 코앞인데 기범이 타이를 풀어 젖히자, 옆에 있던 코디가 화들짝 놀라며 기범에게 다가왔다.“호랑님, 왜 그래요?” “이걸로 바꿔 주세요.”그녀가 짠 가벼운 판에 온전히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정민이 자신을 향해 뻗치는 그 발칙한 소유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네 우와! 구하기도 힘든 명품 타이네요. 안목 좋다.”기범은 미소를 지은 채 목을 코디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 정민의 애교는 안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타이를 코디가 멋스럽게 매어 주는 동안 기범은 생각했다.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정민이었다고 해도 기범은 결코 그녀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코디가 타이를 다 매어 주고 난 뒤 자리를 떠나자 기범은 핸드폰을 열었다. 바로 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연결음이 기가 차게도 에스트렐라의 노래였다. 그것도 기범이 부르는 파트라니. 제 목소리를 남 핸드폰에서 들으니 기범의 얼굴이 뜨거워졌다.“그쪽, 뭐야?”- 어머, 우리 자기네. 선물은 마음에 들어?기범은 작게 콧바람을 내뿜고는 정민을 향해 말했다.“목줄?”-하하, 거슬렸나?저 멀리 무대밖에 앉아있을 경신을 생각하며 기범은 전화기 너머에 있는 정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협박도 귀엽게 하긴.”주변에 무대로 올라가는 순서가 어떻게 되나 대기실 모니터 화면을 살펴본 뒤 기범은 통화를 이어나갔다.-그날 난 좋았어. 그런데, 짐승남께서는 키스와 꽃을
다음 날, 비는 여전했다.경신은 주막을 열기 전 낮 시간을 이용해 혼자 우산을 쓰고 교정 여기저기를 거닐며 축제 현장을 눈에 담았다.다른 과의 주막들을 찬찬히 구경하기도 하고, 솜사탕이나 와플 꼬치를 파는 가판대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다.아직 가시지 않은 입덧 탓에 섣불리 무언가를 삼키기가 조심스러워 그저 눈으로만 달콤함을 즐겼다.실내 강당에 마련된 일일 찻집이나 디저트 카페는 테이크아웃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활기가 넘쳤다. 각 동아리에서 준비한 다채로운 공연들도 실내에서 진행된 덕에 그야말로 대흥행을 기록하고 있었다.전생에 경신은 인생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이번이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리는 축제일지도 몰랐다.남은 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을 맞이하면, 출산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삶의 궤도에 진입하게 될 터였다.‘어디 보자, 체육관에서 하는 기범이 공연만 구경하고 주막으로 돌아가야겠다.’주막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린 경신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뒤, 축제의 마지막 코스로 발길을 옮겼다.이미 본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체육관은 쿵쾅거리는 비트와 함께 건물 전체가 들썩이는 듯했다. 오롯이 팬의 입장으로 연예인의 무대를 관람한다는 것 역시 전생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유쾌한 유희였다.경신은 기쁜 마음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만 인파가 몰린 스탠딩 좌석은 임산부의 몸으로 다소 부담스러웠기에, 한적한 2층 관람석으로 올라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그때, 주머니 속에서 나직한 진동이 번졌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자 역시나 태하였다.“여보세요, 태하 씨.”- 재미있어?“그럼요. 비가 계속 와서 조금 야속하긴 하지만요. 그리고···.”경신은 하마터면 당신이 곁에 없어서 조금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어도 경신은 오로지 음악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비가 온 탓에 관객은 많지 않았다. 워낙 지나다니는 인원이 적었기에 과 학생들이 전부였다.비 오는 날의 추억이라니.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저 빗방울처럼 흐릿하게 흩어지는 기억들뿐이었다.피아노 앞에 앉은 경신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오늘 하루의 실망감이 선율 위로 툭툭 흘러내렸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허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은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음표들뿐이었다. 마치 빗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선율은 빗속으로 아스라하게 퍼져나갔다.마지막으로 에스트렐라의 멜로디를 나지막이 울려내었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경신의 해묵은 감정들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성공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그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지난하기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의 빛이 더욱 찬란한 법이니까.하늘이 무심하다고 원망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쏟아지는 빗방울 하나조차 놓치기 싫은 듯, 경신은 온전히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했다. 연주가 깊어질수록 마음의 응어리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Umm Umm경신의 뒷주머니에서 나직한 진동이 울렸다. 평소엔 그저 시계 대용으로만 쓰던 핸드폰이 울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연주를 멈추고 제 정신을 찾아갈 때쯤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가 은은한 주막의 불빛을 반사하며 애틋하게 반짝였다.설마 하는 대담한 예감이 스쳤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태하였다. *** 서정민과 황도윤, 그리고 JJ 소속사 걸그룹이 출동한 대학 축제 공연은 불행 중 다행으로 실내 강당에서 진행되었다.공연이 끝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