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기억을 잃은 채 아이를 품고 도망쳐야 하는 그녀. 하지만 계속 고운 남자가 눈에 밟힌다. 4회차 인생, 비극적 운명은 피해야 하는데, 과연 그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Lihat lebih banyak겨울비가 유리창을 깨부술 듯 사납게 몰아치는 밤이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마천루를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장대비는 30층 펜트하우스의 두꺼운 유리를 매섭게 때렸다. 바깥은 혼돈 그 자체였으나, 차단된 실내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과 뜨거운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무드등 빛 아래, 묵직한 침묵을 찢고 나오는 것은 오직 서로의 몸이 노골적으로 마찰하는 소리와 찰나의 날카로운 신음, 그리고 가쁘게 얽히는 호흡뿐이었다.
그리고 그 은밀한 열기의 중심에는 조각보다 비현실적이고 오만한 실루엣의 남자, 태하가 있었다.
조명 아래 매끄러운 윤기를 띠는 그의 너른 어깨와 굳건하게 다듬어진 근육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듬어진 포식자의 피지컬이었다.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킨 듯한 검은 눈동자는 오로지 제 밑에서 파들거리는 경신에게만 지독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신아, 예쁘네.”
낮게 낮춘 중저음이 그녀의 귓가를 기분 좋게 긁으며 흩어졌다.
“······태하 오빠, 그런 말도 듣기 싫어.”
분명 일주일 전에 떠나려고 했는데.
그의 전화를 피하고, 마음의 벽을 겹겹이 쌓으며 그를 멀리하려 애썼지만 본능 앞에 이성은 무력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태하의 생일 파티장 구석에 서 있었고, 취기 어린 그를 부축해 들어온 이 은밀한 침실에서 결국 완전히 먹혀버리고 있었다.
태하는 25번째 생일 선물로 ‘경신’을 원한다며 마지막 이 순간에도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인데, 그리고 마지막인데.
경신의 손에 들려 있던 초라한 넥타이핀 케이스는 이미 바닥 어딘가로 나뒹굴어 잊힌 지 오래였다.
“Va a ser duro porque es tu primera vez. (처음이라 힘들 거야.) 그리고 안 참을 거니까.”
한국어가 아직도 서툰 태하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크고 기다란 손이 경신의 가녀린 허리를 부서뜨릴 듯 움켜쥐었다.
살갗이 짓눌릴 정도로 거센 악력이었다. 폭주하려는 본능을 겨우 억누르듯, 그늘진 어깨너머로 쏟아지는 그의 호흡은 당장이라도 살을 태워버릴 듯 뜨거웠다.
다정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미 이성을 집어삼킨 열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오빠, 대신 이 밤이 지나면······ 정말 끝이야. 알겠지?”
경신의 차분한 목소리가 거친 빗소리를 뚫고 울렸다. 애절함과 체념이 진하게 엉킨 물음에,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찰박이는 백색소음처럼 둘의 밑으로 깔렸다.
“그래. 걱정 마.”
태하가 서늘한 확답을 던짐과 동시에 참아왔던 열기를 폭발시키듯 그녀의 깊은 곳까지 단숨에 집어삼켰다. 예고 없이 일방적이고도 깊숙하게 파고드는 지독한 압박감에 경신의 사고가 하얗게 질려버렸다.
“오빠, 조금만······ 천천히······!”
“글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나도 처음이라.”자신을 위해 25년을 참았다니. 이렇게 아름답고 세상 꼭대기에 머무는 다 가진 남자에게 따르는 여자는 많았을 텐데, 지독하게도 경신 자신에게만 순정을 바친 그였다.
미안하고 또 고맙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게 격이 맞지 않는 자신은 이제 사라져야 할 때였으니.
유리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경신의 허벅지를 틀어쥔 태하의 손아귀 힘도 거침없이 강해졌다. 마찰하는 살결 사이로 아슬아슬한 열기가 터져 나왔고, 경신은 자신을 온통 짓눌러오는 압도적인 무게감 속에서 하얗게 시야를 흐렸다.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저들의 관계 역시 되돌릴 수 없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단언컨대 이별치고는 지나치게 가학적이고, 지독하게 화려하며, 미치도록 뜨거운 밤이었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형제처럼 자란 시간은 이미 오래전 변질되었다. 스페인으로 입양되었던 그가 완벽하게 다듬어진 남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 ‘가족애’ 따위는 기화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육원 주인의 딸이었던 경신은 이제 천애 고아가 되어 그의 후원에 의지하는 처지였다.
“오빠가 나한테 준 거 다 돌려줄게.”
태하는 야속한 표정을 지으며 움푹 파인 그녀의 목덜미에 거칠게 얼굴을 묻고 낮게 긁히는 소리로 읊조렸다.
“Lo que te estoy dando no me cuesta nada. Disfrútalo. (내가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넌 그냥 누려.)”
“신데렐라는 질색이야······ 끝내는 게 정답이지.”순간, 실내의 온도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경신의 이별 선언에 반응하듯 태하의 눈빛이 차갑고 서늘하게 일렁였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척추를 따라 느릿하게 쓸어내릴 때마다 온몸의 소름이 바짝 돋았다.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
태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잔물결 치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남아있는 숨 한 자락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려는 듯 집요하고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오늘 너, 후회 안 하겠어?”
한계를 넘어선 그는 허기진 포식자와 다름없었다. 경신이 시간을 달라고 애원했을 때 그는 기꺼이 절제하며 그녀의 마음이 자라길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이 이별 통보라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완전한 소유와 폭주뿐이었다.
경신 역시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그의 미래에 자신은 거머리 같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스페인 양부모의 막대한 유산, 미국 명문 음대 졸업, 그리고 국내 기획사 인수까지.
빛나는 그의 앞날에 '고아 출신 여대생'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줄 수는 없었다. 주변의 은근한 멸시와 보이지 않는 압박에 경신의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경신이 몸을 비틀며 저항하려 할수록 그녀의 허리를 조여오는 태하의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그는 절박하게, 낙인을 찍듯 그녀의 온몸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오늘은 후회 안 해.”
이 밤을 보내는 것, 그리고 그와 이별하는 것.
“다시는 네 눈앞에 안 나타나. 단, 네가 돌아오면 절대 안 놔줄 거야.”
거칠어진 빗줄기 아래 두 사람의 숨결이 지독하게 얽혀갔다.
경신은 자신을 부서뜨릴 듯 안아 오는 태하의 축축하고 넓은 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꼭 끌어안았다.
*** 한 달 뒤, 20XX년 2월 28일.계절의 경계에 선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창밖에는 장마철을 연상케 하는 굵은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자극적으로 때리는 소리가 병실의 적막을 깨트렸다.
서울 대한 종합병원 VIP 병실. 정적만이 흐르던 공간에 정체 모를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멍한 눈동자를 한 경신이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협탁 위를 더듬거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곤 콧등 위로 고정했다.
“어? 난 분명 죽었었는데······. 뭐지?”고백. 그 달콤하고 찬란해야 할 단어가 오늘 밤 경신에게는 짓눌리듯 무겁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창밖으로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만큼이나,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올랐다.경신의 눈앞에 태하가 있었다. 이 완벽한 남자에게, 경신은 지금 제 생애 가장 거대한 진실을 건네는 중이었다.이미 반지를 받았고, 서로의 체온을 깊이 나누었건만, 다음에 만났을 때 배가 불러온 자신을 마주한다면 태하가 느낄 충격은 얼마나 잔혹할 것인가.이번 생의 사랑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 경신은 그저 눈앞에 놓인 달콤한 온기를 온전히 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오늘만 해도 태하는 경신을 위해 제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주막을 지켜주었다. 이 폭우를 뚫고 오직 그녀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남자인 데다, 불과 몇 시간 뒤면 다시 먼 길을 떠날 사람이기도 했다.반지를 건넨 여자의 몸속에 이미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고, 그 아이가 그의 핏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마땅히 털어놓아야 했다. 진작 꺼냈어야 할, 참으로 늦어버린 고백이었다. 하지만 가장 늦었다고 절망할 때가 진실을 마주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경신은 떨리는 두 손을 아랫배 위에 가만히 얹었다. 뱃속의 아가들에게 조용히 용기를 빌린 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말문을 열었다.“태하 씨, 나는 지난 2월 28일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현생의 기억을 전부 잃은 상태였어요. 오직 전생의 기억만 간직한 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마주했죠.”태하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경신의 다음 말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이 몸과 이 인생으로 살아온 시간은 제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아요.”경신은 그날 이후의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가만히 펼쳐놓았다. 태하에게 전할 단어를 고르며 깊은 숨을 삼켰다. 배 위에 얹은 손끝으로
에스트렐라는 마치 자신들의 단독 콘서트를 치르듯 30분 동안 무대를 치열하게 집어삼켰다.그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경신의 주막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번져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가 몰려들었다.거센 빗줄기는 여전했으나, 우산을 받쳐 든 채 멀리서나마 에스트렐라를 눈에 담으려는 학생들로 주막 일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그 덕에 축제 기간 내내 꾸역꾸역 쌓아 두었던 주막의 모든 재료가 기적처럼 전량 소진되었다.국어과 학생들은 본래 조를 짜서 당번제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인파에 비상 연락을 돌려 총출동할 수밖에 없었다.화야 역시 수학과 아이들을 대거 이끌고 나타나 서빙과 설거지를 자처하며 국어과 주막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폭풍 같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에야, 경신과 태하는 비로소 온전한 둘만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새벽 2시가 훌쩍 지나서야 주막의 천막이 굳게 닫혔다.쏟아지는 빗속이지만 우산을 쓰고 교정을 걸어가겠다는 경신의 제안을 태하는 부드럽게 만류했다.밤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혹여 피곤치 않을까 염려한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아 드라이브를 택했다.경신은 태하의 다정한 배려 속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과분하고 행복한 하루를 곱씹었다.“태하 씨, 꼭 제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축제를 맞이한 기분이었어요. 기적처럼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태하는 대답 대신 깊고 아늑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조용히 운동장 한편으로 굴렸다.마침 그곳은 과거 태하가 경신에게 반지를 건네며 다정하게 기타를 연주해 주었던, 둘만의 의미 깊은 장소였다.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나직한 엔진음과 함께 시동이 꺼졌다. 축제가 막을 내린 교정은 기
5월의 어느 봄날 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음악이 캠퍼스 곳곳으로 아스라이 퍼져나갔다.세상 어디에서도 연주된 적 없는, 오직 서로에게 깊이 마음을 나눈 이들만이 자아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선율이 울려 퍼졌다.사랑에 빠져 있다는 달콤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아름다운 음률이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교정을 아늑하게 메워갔다.건반을 누르고 기타줄을 튕기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단 한 순간도 멀어지지 않았다. 밀려드는 애틋함에 스며들듯, 둘은 호흡을 맞추며 멈춤 없이 연주를 이어갔다.국어과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오늘따라 유독 기묘한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듣는 이가 늘어날수록 찾는 발길은 더욱 분주해졌고, 빗속을 뚫고 퍼지는 음악 소리 또한 점점 청아하게 스케일을 키워갔다.경신과 태하가 둘만의 세계에 빠져 황홀한 2중주를 펼치는 동안, 주막 주변은 눈이 멀 만큼 화려하게 탈바꿈하는 중이었다.마호는 이미 봉선규를 비롯해 태하가 대동하고 온 전문 인력들과 함께 주막 주변을 완벽하게 정비했다.“봉 실장. 역시 태하의 스케일은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네.” “경신 양의 연주가 학교 전체에 더 웅장하게 울려 퍼지겠어요.”태하가 홍콩에서부터 수소문해 의뢰한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 전문가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앰프와 스피커에 꼼꼼한 방수 작업을 마친 그들이 경신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며 순식간에 시스템을 구축해 낸 것이다.전문가들의 손길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의 간이 앰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최고 사양의 음향 장비가 갖춰지자, 경신이 치던 곡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듯 한층 더 고아하고 웅장하게 대기를 울렸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형 방수 천막과 세련된 파라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관객들이
무대가 코앞인데 기범이 타이를 풀어 젖히자, 옆에 있던 코디가 화들짝 놀라며 기범에게 다가왔다.“호랑님, 왜 그래요?” “이걸로 바꿔 주세요.”그녀가 짠 가벼운 판에 온전히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정민이 자신을 향해 뻗치는 그 발칙한 소유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네 우와! 구하기도 힘든 명품 타이네요. 안목 좋다.”기범은 미소를 지은 채 목을 코디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 정민의 애교는 안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타이를 코디가 멋스럽게 매어 주는 동안 기범은 생각했다.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정민이었다고 해도 기범은 결코 그녀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코디가 타이를 다 매어 주고 난 뒤 자리를 떠나자 기범은 핸드폰을 열었다. 바로 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연결음이 기가 차게도 에스트렐라의 노래였다. 그것도 기범이 부르는 파트라니. 제 목소리를 남 핸드폰에서 들으니 기범의 얼굴이 뜨거워졌다.“그쪽, 뭐야?”- 어머, 우리 자기네. 선물은 마음에 들어?기범은 작게 콧바람을 내뿜고는 정민을 향해 말했다.“목줄?”-하하, 거슬렸나?저 멀리 무대밖에 앉아있을 경신을 생각하며 기범은 전화기 너머에 있는 정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협박도 귀엽게 하긴.”주변에 무대로 올라가는 순서가 어떻게 되나 대기실 모니터 화면을 살펴본 뒤 기범은 통화를 이어나갔다.-그날 난 좋았어. 그런데, 짐승남께서는 키스와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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