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죽자, 남편은 나를 지옥에 가뒀다

언니가 죽자, 남편은 나를 지옥에 가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By:  해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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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었다. 남편은 내게 살인자라고 했다. 언니의 약혼자였던 차건욱은 나를 별채에 가두고, 끝내 살인범으로 만들어 감옥에 보냈다. 아이를 잃고 죽어가던 날, 나는 마지막 진실을 들었다. 언니는 살아 있었다. 모든 것은 나를 희생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결혼 일주일 전. 이번 생에는 절대 그 남자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 나를 죽인 남편과 언니를 무너뜨리겠다. 그때, 전생에서 나를 구하려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문재율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하지만 차건욱 역시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인 남자가, 이제는 나를 되찾겠다며 미쳐가기 시작했다. 언니는 죽음을 꾸미고, 남편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의 각본대로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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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병원 복도 끝에서 남자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소독약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밀려왔고, 환자를 실은 들것이 바닥을 가로지르며 요란한 바퀴 소리를 냈다. 늦은 밤인데도 접수대 앞에는 보호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복도 안쪽에 쏠려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의사의 멱살을 움켜쥔 채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시 해. 다시 살려 내라고!”

차건욱이었다.

평소라면 셔츠 소매의 작은 구김조차 용납하지 않던 남자가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채 의료진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구겨진 셔츠 아래로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손등에는 어디서 다쳤는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의사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보호자분, 저희도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심정지 이후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됐고, 사망이 확인됐습니다.”

건욱의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경호원 둘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떼어 놓았지만, 건욱은 의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몸이 따뜻했다며. 조금 전까지 숨을 쉬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죽었다는 거야?”

의사가 무언가 설명하려 하자 건욱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병원을 뒤집어엎을 듯 날뛰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유나 앞에서 죽었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백이안은 응급실 입구에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십 분 전, 남편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침착하던 김민석 실장의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백유나 씨가 사망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전화를 걸어왔던 언니였다. 이안의 결혼반지를 보며 남의 것을 차지하고도 행복하냐고 웃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했다.

그런 언니가 죽었다니.

더구나 지금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었다.

건욱은 의료진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복도 중간에서 멈춰 섰다.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고, 잠시 뒤 다시 의사를 돌아보았다.

“유나한테 데려다줘. 내가 왔다고 말해야 해.”

“차건욱 씨, 고인께서는 현재…….”

“고인이라고 부르지 마.”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나는 나 기다리고 있어. 내가 늦어서 화가 난 거야. 내가 가면 눈 뜰 거라고.”

이안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건욱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민석이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워 건넸다. 그의 얼굴에도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언니가 왜…….”

“정확한 경위는 확인 중입니다. 우선 대표님을 좀 부탁드립니다.”

이안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욱이 자신의 말을 들어 준 적이 있었던가.

결혼한 지 일 년. 그동안 남편은 아내의 부탁보다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유나가 늦은 밤 전화를 걸면 잠든 이안을 두고 나갔고, 유나가 아프다고 하면 오래전부터 약속했던 부부의 일정도 취소했다.

처음에는 오래된 연인 사이에 남은 미련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고, 적어도 자신과 결혼한 이상 언젠가는 남편의 마음도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건욱의 모습을 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영안실 앞에는 백씨 집안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 백정필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복도를 서성였고, 계모 민소정은 의자에 앉아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유나가 즐겨 들던 명품 가방이 놓여 있었다.

소정은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가의 화장이 번져 있었지만, 딸을 잃은 어머니의 얼굴에는 슬픔 못지않게 날카로운 원망이 서려 있었다.

“너 어디 있었니? 네 언니가 이렇게 됐는데 이제야 나타나?”

이안이 연락받자마자 달려왔다고 설명했지만 소정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유나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느냐며 울음을 터뜨렸고, 곁에서 부축하던 친척 여자까지 이안을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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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복도 끝에서 남자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응급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소독약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밀려왔고, 환자를 실은 들것이 바닥을 가로지르며 요란한 바퀴 소리를 냈다. 늦은 밤인데도 접수대 앞에는 보호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복도 안쪽에 쏠려 있었다.그곳에서 한 남자가 의사의 멱살을 움켜쥔 채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다시 해. 다시 살려 내라고!”차건욱이었다.평소라면 셔츠 소매의 작은 구김조차 용납하지 않던 남자가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채 의료진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구겨진 셔츠 아래로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손등에는 어디서 다쳤는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의사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보호자분, 저희도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심정지 이후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됐고, 사망이 확인됐습니다.”건욱의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경호원 둘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떼어 놓았지만, 건욱은 의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이를 악물었다.“아직 몸이 따뜻했다며. 조금 전까지 숨을 쉬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죽었다는 거야?”의사가 무언가 설명하려 하자 건욱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병원을 뒤집어엎을 듯 날뛰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유나 앞에서 죽었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백이안은 응급실 입구에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십 분 전, 남편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침착하던 김민석 실장의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백유나 씨가 사망했습니다.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전화를 걸어왔던 언니였다. 이안의 결혼반지를 보며 남의 것을 차지하고도 행복하냐고 웃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했다.그런 언니가 죽었다니.더구나 지금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었다.건욱은 의료진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복도 중간에서 멈춰 섰다.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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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정필 역시 딸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그는 영안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건욱의 상태부터 물었고, 이안이 많이 힘들어한다고 대답하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당연하지. 그 애가 유나를 얼마나 아꼈는데.”이안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사위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 아버지에게는 건욱의 사랑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조차 숨길 필요가 없는 사실인 모양이었다.“아버지, 언니가 어떻게 죽은 거예요? 저도 가족이잖아요.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죠.”정필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췄다.“지금 그걸 따질 때냐? 건욱이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 더 자극하지 말고.”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유나와 자신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얼굴로 이안을 꾸짖었다. 언니가 아프면 동생이 양보해야 했고, 언니가 울면 동생이 사과해야 했다.그런데 이번에는 언니가 죽었다.죽음 앞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는 것.그때 영안실 문이 열렸다.건욱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안이 뒤따르려 하자 민석이 조심스럽게 길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혼자 들어가시겠다고 하셨다는 설명에 이안은 자신도 언니 얼굴을 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민석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금속 쟁반이 바닥에 부딪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이안은 놀라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하얀 조명 아래 놓인 침대에는 언니가 누워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굳게 닫힌 눈꺼풀,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카락까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건욱은 침대 앞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유나야, 나 왔어.”그가 언니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피부에 닿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이내 유나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이미 온기를 잃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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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건욱이 영안실에서 나온 것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그동안 정필은 장례 절차를 논의했고, 소정은 유나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을 주문하겠다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척들은 장례식장과 조문객 명단을 의논하면서도 건욱이 나오는 쪽을 수시로 살폈다.그러나 건욱은 장례 절차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아직 안 돼.”병원 관계자가 사망 확인 이후 필요한 절차와 장례식장 이동에 관해 설명하려 했지만, 건욱은 유나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며 말을 끊었다. 정필이 조심스럽게 장례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으나 건욱은 서류에 서명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내가 보내 준다고 한 적 없어.”그는 영안실 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유나가 혼자 있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벌써 보내.”민석이 한참 동안 곁에서 설득한 끝에야 건욱은 의료진이 안내하는 절차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동안에도 자신이 직접 곁에 있겠다고 고집했고, 유나의 소지품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조차 거부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건욱이가 우리 유나를 저렇게 사랑했는데…….”이안은 복도 끝 의자에 앉아 그 말을 들었다.손끝에는 아직 차가운 문틀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영안실 안에서 들었던 남편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그럴수록 어제 언니와 나누었던 마지막 통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어제 오후, 유나는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이안아, 건욱 씨랑 잘 지내? 그냥 궁금해서. 내 동생 행복한지.’이안은 당시 사무실 책상에 펼쳐 놓았던 설계 도면을 기억했다. 마감이 임박한 수정 도면을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옆자리 직원은 출력된 도면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도 유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건욱 씨가 아직도 나한테 전화하는 건 알아? 화내지 마. 내가 먼저 걸라고 한 것도 아닌데.’유나는 가볍게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갤러리에서 자주 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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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 언니에게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건욱에게 계속 연락하고 자신들의 결혼생활에 끼어드는 일을 멈춰 달라고 했다는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건욱의 얼굴에서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다.“끼어들지 말라고?”그는 천천히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서늘한 표정이었다.“네가 지금 누구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 유나가 먼저였어. 네가 내 아내가 되기 훨씬 전부터,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고.”건욱이 이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뼈마디가 눌릴 만큼 강한 힘에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유나는 네 언니야. 네가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 일이었어.”이안은 고통을 참으며 손목을 빼내려 했다.“내가 뭘 얼마나 더 참아야 했는데? 결혼기념일에 언니한테 가도 참았어. 내 생일에 언니랑 여행을 가도 참았고,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 언니 전시회에 간 것도 참았어.”말을 할수록 목이 메었다. 이안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남편을 올려다보았다.“그런데 언니한테 당신한테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까지 잘못이야?”건욱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는 이안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지만, 손을 놓은 뒤에도 사과하지 않았다.오히려 손수건을 꺼내 방금 이안을 붙잡았던 손을 천천히 닦았다.“유나가 죽었어. 그런데 넌 아직도 네 얘기뿐이야.”그는 손수건을 접어 민석에게 건네며 덧붙였다.“사람이 죽었는데 네가 얼마나 서운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해?”그 말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소정은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고, 정필은 딸에게 눈짓으로 물러나라고 했다. 친척들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지만, 그들 사이로 오가는 시선에는 이미 이안을 향한 의심이 섞여 있었다.건욱은 더 이상 아내를 보지 않았다.그는 민석에게 돌아서서 유나의 휴대전화와 마지막 통화 내역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이 확인 중인 물품이라 당장 가져올 수 없다는 설명에도 건욱은 물러서지 않았다.“합법적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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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미주는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같은 설계사무소에서 밤을 새우며 도면을 그린 적도 많았고, 이안이 건욱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끝까지 말렸던 사람이기도 했다.그 남자 너 안 사랑해. 너도 알고 있잖아.그때 이안은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믿었다.그러나 오늘 영안실에서 본 건욱의 모습은 그 믿음을 산산이 부수기에 충분했다.이안은 잠시 망설이다 언니가 어제 자신에게 전화했던 일도 이야기했다. 유나는 자신이 없어지면 이안이 행복할 것 같으냐고 물었고, 이안은 더 이상 결혼생활에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미주는 한동안 침묵했다.“이안아, 그 통화 기록 네 휴대전화에 남아 있지? 절대 지우지 마. 문자도, 통화 기록도 전부 그대로 둬.”“건욱 씨가 내가 언니를 몰아붙였다고 생각해.”“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기록은 남겨 둬. 나중에 네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하잖아.”이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미주의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그때 복도 끝에서 민석이 다가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건욱은 병원 내 별도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탁자 위에는 유나의 통화 내역 일부와 몇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경찰의 확인 절차가 끝나지 않은 자료였으므로 민석이 확보한 것은 유족이 보관하던 통화 화면과 가족에게 전달된 기본적인 안내 내용뿐이었다.이안이 들어왔을 때 건욱은 종이 한 장을 손에 든 채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읽고 있었다. 벗어 놓은 재킷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탁자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앉아.”이안이 문가에 머뭇거리자 건욱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자 그는 통화 내역 한 장을 탁자 위로 밀었다.“어제 오후 네 시 십이 분. 유나랑 십일 분 넘게 통화했더군.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이안은 이미 복도에서 설명했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건욱의 얼굴을 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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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난 언니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경찰에서 조사하겠다면 협조할게. 하지만 당신한테 죄인 취급받으면서 여기 앉아 있을 이유는 없어.”이안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건욱은 천천히 탁자에 서류를 내려놓았다.“그건 내가 판단해.”그는 이안이 문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민석을 불렀다.“사모님 차량부터 회수해. 개인 기사도 당분간 붙이지 말고, 집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내 허락 없이 사모님이 짐을 빼거나 외박하지 못하게 하라고 전해.”이안은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섰다.“지금 무슨 짓이야?”건욱은 아내의 반응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유나 일이 끝날 때까지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야겠어. 네가 쓰는 카드 중 내 명의로 된 것도 사용 내역을 전부 보고받을 거야.”민석이 난처한 표정으로 건욱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사모님 개인 일정까지 확인하는 건…….”“내가 책임질 테니까 지시한 것만 해.”건욱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 민석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이안은 남편에게 다가갔다.“내가 무슨 범죄자야? 당신이 뭔데 내 생활을 마음대로 통제해?”건욱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유나가 죽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다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층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런데 네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어. 내가 널 믿어야 할 이유가 있나?”이안의 입술이 떨렸다.건욱은 민석에게 시선을 돌렸다.“사모님이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보고해. 다만 경찰 조사에 협조하는 건 막지 마. 괜히 불필요한 문제 만들지 말고.”그 말에 이안은 비로소 깨달았다.건욱은 자신을 당장 방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두면서, 자신의 일상에서 그가 제공하던 모든 편의를 하나씩 거둬들이려는 것이었다.차량도, 집도, 생활비도, 주변 사람들의 협조도 모두 건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그는 아내가 어디까지 혼자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려는 사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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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단순히 일부 기록만 전달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유나의 휴대전화가 발견되기 전 누군가 그 번호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었고, 통신 기록의 확인 범위가 서로 달랐을 수도 있었다.이안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대신 자신의 화면에 남아 있는 기록을 캡처했다.그때 민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사모님, 아직 병원이십니까? 대표님께서 장례식장 참석 시간을 오전 아홉 시로 정하셨습니다.”이안은 안내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민 실장님, 아까 건욱 씨가 가지고 있던 언니 통화 기록이 전부였어요?”민석은 잠시 말을 멈췄다.“확인된 자료 중 일부입니다.”“언니가 저한테 다시 전화한 기록이 있어요. 오후 네 시 삼십일 분에요. 그 기록도 확인됐나요?”수화기 너머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민석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피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사모님, 그 기록은 우선 그대로 보관해 주십시오. 대표님께 전달된 자료에는 연결된 통화만 정리돼 있었습니다.”“그럼 부재중 전화는 빠져 있었던 거예요?”“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니, 확인 전까지 다른 분들께 말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이안은 손에 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민석의 설명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연결된 통화와 부재중 전화를 따로 정리했다면 두 자료가 다른 것도 가능했다.그런데 민석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업무상의 조심스러움과는 다른 긴장이 묻어 있었다.“민 실장님,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어요?”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 사모님께 혼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전화가 끊겼다.이안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안에는 건욱이 서 있었다.그는 이미 코트를 갈아입은 상태였다. 붉게 충혈된 눈과 창백한 얼굴만이 조금 전 영안실에서 무너졌던 남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건욱의 시선이 이안의 휴대전화로 내려갔다.“민석이랑 통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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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남편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당장 빼앗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누구와 통화했는지, 어디에 도움을 청했는지 알아내려 들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그녀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켰다.언니의 부재중 전화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오후 네 시 삼십일 분.이안은 그 숫자를 오래 바라보았다.그리고 문득 민석이 조금 전 보내 준 장례 관련 안내 자료를 떠올렸다. 유나가 발견된 장소와 시각을 가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리한 문서였다.자료에는 유나가 발견된 시각이 오후 네 시 이십팔 분으로 적혀 있었다.이안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언니가 발견됐다는 시각보다 삼 분 뒤에 언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물론 그것만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발견 직후 누군가 휴대전화를 사용했을 수도 있었고, 자료에 적힌 시각이 실제 상황과 다를 수도 있었다.그러나 왜 그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누가 전화를 건 것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이안은 서둘러 통화 기록과 안내 자료를 각각 캡처한 뒤 미주에게 전송했다.[미주야. 이 기록 꼭 보관해 줘. 내일 만나면 설명할게.]메시지가 전송된 직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이안은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희미한 숨소리와 함께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다시 누구냐고 묻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백이안 씨 맞습니까?”“네. 누구시죠?”남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백유나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이안은 벽에 등을 기댔다.“어디서 전화하신 거예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내일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그 녹음을 들려주더라도, 그게 전부라고 믿지 마십시오.”이안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무슨 뜻이에요? 녹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수화기 너머에서 급하게 발소리가 들렸다.남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이 다시 물으려는 순간,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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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경호원은 이안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새벽 한 시가 가까워진 병원 로비에는 사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문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가로등 불빛을 잘게 부수고 있었고, 출입구에 대기 중인 검은 승용차의 전조등이 젖은 바닥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이안이 병원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경호원 한 명이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겉으로는 재벌가 사모님을 수행하는 직원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이안이 어디로 가든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어디로 가는 거죠?”앞서 걷던 경호원이 승용차 뒷문을 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숙소입니다. 장례식장과 가까운 곳으로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이안은 열린 차 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는 짐작은 했지만, 어디로 데려가는지조차 알려 주지 않은 채 경호원들을 보냈다는 사실에 속이 서늘해졌다.“난 집에 갈 거예요. 내일 장례식장에는 제시간에 갈 테니까, 건욱 씨한테 그렇게 전하세요.”경호원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차 문을 잡은 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대표님 지시는 변함없습니다.”이안은 직접 택시를 부르기 위해 휴대전화를 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택시를 이용하더라도 자신들이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안은 한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거절할 때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고, 다른 방법을 선택해도 따라붙는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결국 이안은 승용차 뒷좌석에 앉았다.차 문이 닫히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는 검은 가림막이 내려져 있었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물들은 젖은 유리 너머에서 형태를 잃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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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된 통화에서 민석은 해당 문서가 대표님의 요청으로 준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가족들이 민감한 상태이니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는 말도 덧붙였다.“민 실장님, 이걸 누가 쓰라고 했어요?”민석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이안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내가 언니를 죽였다고 인정하라는 거잖아요.”“사모님, 그 문서가 반드시 사용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표님께서…….”“건욱 씨가 쓰라고 했겠죠. 내가 사과문에 서명하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수화기 너머에서 민석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표님이 몹시 격앙되어 있으니 오늘만큼은 지시를 따르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이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사과문을 다시 펼쳤다.한 문장씩 읽을수록 기가 막혔다. 자신이 언니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모든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문장을 만들어 놓았다.이안은 종이를 찢지 않았다.대신 휴대전화로 앞뒤를 촬영했다. 사과문이 들어 있던 봉투와 안내문까지 차례로 사진을 남긴 뒤 미주에게 전송했다.[이런 걸 준비해 놨어. 내가 언니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인정하래.]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이안은 침대 끝에 주저앉았다.손목이 욱신거렸다. 남편이 움켜쥔 자리가 검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손목을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왔다. 얼음이 담긴 봉투를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복도에 서 있는 경호원들에게 또다시 무엇인가를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차가운 수건을 손목에 감자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이안은 침대에 앉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밖으로는 비가 내렸고, 휴대전화 화면에는 미주가 보낸 답장이 떠 있었다.[절대 서명하지 마. 내일 내가 갈게.]***같은 시각, 건욱은 장례식장 안쪽에 마련된 유족 대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탁자 위에는 유나의 사진 여러 장이 펼쳐져 있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갤러리 개관식에서 웃고 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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