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언니가 죽었다. 남편은 내게 살인자라고 했다. 언니의 약혼자였던 차건욱은 나를 별채에 가두고, 끝내 살인범으로 만들어 감옥에 보냈다. 아이를 잃고 죽어가던 날, 나는 마지막 진실을 들었다. 언니는 살아 있었다. 모든 것은 나를 희생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결혼 일주일 전. 이번 생에는 절대 그 남자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 나를 죽인 남편과 언니를 무너뜨리겠다. 그때, 전생에서 나를 구하려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문재율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하지만 차건욱 역시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인 남자가, 이제는 나를 되찾겠다며 미쳐가기 시작했다. 언니는 죽음을 꾸미고, 남편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의 각본대로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View More병원 복도 끝에서 남자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소독약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밀려왔고, 환자를 실은 들것이 바닥을 가로지르며 요란한 바퀴 소리를 냈다. 늦은 밤인데도 접수대 앞에는 보호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복도 안쪽에 쏠려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의사의 멱살을 움켜쥔 채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시 해. 다시 살려 내라고!”
차건욱이었다.
평소라면 셔츠 소매의 작은 구김조차 용납하지 않던 남자가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채 의료진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구겨진 셔츠 아래로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손등에는 어디서 다쳤는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의사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보호자분, 저희도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심정지 이후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됐고, 사망이 확인됐습니다.”
건욱의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경호원 둘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떼어 놓았지만, 건욱은 의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몸이 따뜻했다며. 조금 전까지 숨을 쉬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죽었다는 거야?”
의사가 무언가 설명하려 하자 건욱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병원을 뒤집어엎을 듯 날뛰던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유나 앞에서 죽었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백이안은 응급실 입구에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십 분 전, 남편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침착하던 김민석 실장의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백유나 씨가 사망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전화를 걸어왔던 언니였다. 이안의 결혼반지를 보며 남의 것을 차지하고도 행복하냐고 웃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했다.
그런 언니가 죽었다니.
더구나 지금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었다.
건욱은 의료진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복도 중간에서 멈춰 섰다.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고, 잠시 뒤 다시 의사를 돌아보았다.
“유나한테 데려다줘. 내가 왔다고 말해야 해.”
“차건욱 씨, 고인께서는 현재…….”
“고인이라고 부르지 마.”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나는 나 기다리고 있어. 내가 늦어서 화가 난 거야. 내가 가면 눈 뜰 거라고.”
이안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건욱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민석이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워 건넸다. 그의 얼굴에도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언니가 왜…….”
“정확한 경위는 확인 중입니다. 우선 대표님을 좀 부탁드립니다.”
이안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욱이 자신의 말을 들어 준 적이 있었던가.
결혼한 지 일 년. 그동안 남편은 아내의 부탁보다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유나가 늦은 밤 전화를 걸면 잠든 이안을 두고 나갔고, 유나가 아프다고 하면 오래전부터 약속했던 부부의 일정도 취소했다.
처음에는 오래된 연인 사이에 남은 미련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고, 적어도 자신과 결혼한 이상 언젠가는 남편의 마음도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건욱의 모습을 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영안실 앞에는 백씨 집안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 백정필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복도를 서성였고, 계모 민소정은 의자에 앉아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유나가 즐겨 들던 명품 가방이 놓여 있었다.
소정은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가의 화장이 번져 있었지만, 딸을 잃은 어머니의 얼굴에는 슬픔 못지않게 날카로운 원망이 서려 있었다.
“너 어디 있었니? 네 언니가 이렇게 됐는데 이제야 나타나?”
이안이 연락받자마자 달려왔다고 설명했지만 소정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유나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느냐며 울음을 터뜨렸고, 곁에서 부축하던 친척 여자까지 이안을 흘겨보았다.
건욱의 시선이 미주의 가방에 잠시 머물렀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안은 미주의 손을 놓고 경호원들을 따라 걸었다. 뒤에서 친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미주까지 위험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차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검은 승용차가 장례식장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도심을 가로지르는 동안, 이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익숙한 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차는 집으로 향하는 교차로를 지나쳤다.“어디로 가는 거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민석이 뒤를 돌아보았다.“대표님께서 조용히 쉬실 곳을 마련하셨습니다.”“난 집에 가겠다고 했어요.”“현재 자택에는 기자들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당분간 외부 접촉을 피하시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셨습니다.”이안은 민석을 바라보았다.“기자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할까 봐 무서운 거겠죠.”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미주에게 위치를 전송했다. 이어 회사에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를 발견하고 곧바로 연락했다.설계팀장이었다.“팀장님, 무슨 일이세요?”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업무부터 이야기했을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주변을 살피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이안 씨, 혹시 서림 복합문화센터 건에 관해서 들은 얘기 있어요?”이안은 자세를 바로 했다.서림 복합문화센터는 그녀가 지난 일 년 동안 매달린 프로젝트였다.폐공장을 문화시설로 바꾸는 사업이었다. 오래된 철골 구조를 보존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이안은 수십 차례 현장을 방문했고, 낡은 기둥 하나를 남기기 위해 구조기술자들과 밤늦게까지 의견을 나누었다.결혼 후 자신이 끝까지 지켜 낸 몇 안 되는 일이었다.건욱이 유나의 전시회를 보러 가는 날에도, 집안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듣던 날에도, 그녀는 그 도면을 완성하기 위해 일했다.“내일 최종 협의하기로 했잖아요. 일정이 바뀌었어요?”팀
건욱의 시선이 이안의 휴대전화에 머물렀다.장례식장 복도에는 조문객들이 오가는 발소리와 낮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사람 곁을 지나갔고, 분향소에서 흘러나온 향 냄새가 복도까지 짙게 번지고 있었다.이안은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조금 전 통화한 남자는 장례식장에서 재생된 녹음에 마지막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건욱이 들려준 녹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누구랑 통화했어?”건욱이 다시 물었다.이안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건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신한테 말할 이유 없어.”그가 손을 뻗자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어제부터 반복해서 붙잡힌 손목이 욱신거렸고, 붉게 부어오른 뺨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그 모습을 본 건욱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지만,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내가 모르는 사람이 유나 일에 끼어드는 건 용납 못 해. 전화 줘.”“언니 일이라면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내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니까.”“그러니까 더더욱 네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알아야겠다는 거야.”건욱은 당연한 요구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했다.이안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아내의 휴대전화를 검사하려 한다는 사실보다, 유나에 관한 이야기가 자신의 통제 밖에서 오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더 중요한 듯했다.그때 미주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그만하세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전화까지 검사하겠다는 거예요?”건욱은 미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우리 부부 사이의 일입니다. 비켜 주시죠.”“부부 사이의 일이라면 아내가 맞고 있을 때는 왜 가만히 있었어요?”미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이안이가 뭘 잘못했는지 확인도 안 하고 사과문부터 만들어 놓으셨잖아요. 그게 정
민석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건욱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리고 백이안 씨가 사용하는 차량, 카드, 집 출입 권한도 다시 확인해. 내 명의로 된 건 전부 정리하고.”이안은 남편을 돌아보았다.그는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오히려 낮고 차분했다. 회사에서 계약을 해지하거나 거래처를 정리할 때와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이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다.건욱에게 자신은 아내가 아니었다.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믿는 상대였고, 자신의 권력으로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미주가 이안의 팔을 잡았다.“가자. 여기서 더 있을 필요 없어.”이안은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사진 속 유나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제 통화에서 들었던 마지막 웃음과 너무도 비슷한 얼굴이었다.이안은 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향도 피우지 못했고, 절조차 올리지 못했다.그녀는 사진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미주와 함께 분향소를 나왔다.***복도 끝에 도착했을 때 이안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낯선 번호였다.어젯밤 자신에게 전화했던 번호와 같았다.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미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잠시 기다려 달라는 뜻을 전했다.전화를 받자 상대는 인사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장례식장에서 녹음이 재생됐습니까?”이안은 숨을 삼켰다.“당신 누구예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요?”상대는 잠시 침묵했다.멀리서 차량 문이 닫히는 소리와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는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어젯밤 말씀드린 원본을 보관하던 사람과 연락이 끊겼습니다.”이안은 복도 벽에 손을 짚었다.“원본을 가진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요?”“그 사람은 유나 씨의 통화 파일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부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원본이 남아 있었습니다.”이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
건욱은 이안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정해 놓은 방식으로 유나에게 속죄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태도를 더 용납할 수 없었다.그는 이안의 붉게 부은 뺨을 다시 보았다.소정에게 맞은 자국이었다.건욱은 그 자국이 아프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이 고통을 느낄 때마다 유나가 마지막으로 겪었을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랐다.***그때 분향소 입구에서 휴대전화 카메라의 작은 작동음이 들렸다.정미주였다.검은 코트를 입은 미주는 조문객들 뒤에 서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안은 친구가 방금 벌어진 일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처음으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건욱은 이미 미주의 존재를 발견한 뒤였다.그의 시선이 미주의 휴대전화에 머물렀다.“저 사람 누구야?”민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미주가 앞으로 나왔다.“백이안 씨 친구입니다.”미주는 건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부터 이안의 결혼을 반대했던 사람답게 그의 앞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장례식장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건욱의 표정이 굳었다.그는 미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미주가 촬영한 영상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미주는 휴대전화를 자신의 가방 안에 넣었다.“제 휴대전화에 손대면 바로 신고할 겁니다. 방금 여기서 있었던 일도 포함해서요.”건욱은 한동안 미주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분노보다 냉정한 계산이 떠올라 있었다. 많은 조문객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또 다른 소란을 만들면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했다.그러나 이안에게는 달랐다.“넌 여기 남아.”그는 이안이 미주와 함께 나가려 하자 손목을 붙잡았다. 전날부터 반복해서 붙잡혔던 자리가 다시 아파 왔고, 이안은 본능적으로 팔을 움츠렸다.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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